무엇이 승부를 갈랐을까. 한동안 떠나지 않았던 이 의문에 모 교수는 신분사회를 유지하려는 조선 지배층의 우민화 정책을 답으로 제시했다. 서적 간행이 쉬워지면 기존 체제에 위협이 된다고 생각했던 지배층이 금속활자를 민간에 공개하지 않고 관용(官用)으로만 사용했다는 주장이다. 그는 한글도 지배층의 외면을 받다가 구한말이 돼서야 국문(國文)으로 인정받지 않았느냐고 반문했다. 그럴듯했지만 선뜻 납득이 되지 않았다. 혁신적인 기술이 수백년 동안 비밀로 남아 있을 수는 없었을 것이라고 보는 게 상식적이다. 그런 해석보다는 최근 발간된 ‘투자자가 된 인문학도’의 저자 조현철의 설명이 보다 설득력이 있다. 저자는 고려인이 만든 금속활자가 ‘시제품’에 불과했다고 봤다. 이 시제품이 광범위하게 사용되려면 대량 인쇄가 가능한 수준까지 금속활자가 개량돼야 하는데 그러지 못했다는 것이다. 기술 수준은 생산력의 차이를 낳는다. 저자에 따르면 조선 세종 시대인 1434년에 만들어진 구리활자 갑인자(甲寅字)는 조선 최고의 활자로 평가받고 있지만 하루에 찍을 수 있는 양이 40장 정도에 그쳤던 반면 합금 활자로 내구성을 높인 구텐베르크의 인쇄기는 1500년대 초기에 300장, 1600년대에는 1500장 정도에 달했다.
조남규 경제부장 |
4차 산업혁명이 화두다. 인류는 1차, 2차, 3차 산업혁명을 거칠 때마다 비약적인 생산력의 향상을 목도했다. 인공지능(AI) 등이 만들어낼 4차 산업혁명은 이제 초입 단계다. 인쇄술의 혁신이 동서양의 생산력 격차를 만들어냈듯이 21세기에는 4차 산업혁명 시대의 주도권을 잡는 국가가 그 시대의 헤게모니를 장악하게 된다.
금융 분야도 예외가 아니다. 앞서가면 도약의 기회를 잡을 수 있지만 뒤처지면 존폐의 기로에 서게 된다. 세계일보와 세계파이낸스가 지난 18일 개최한 ‘제1회 세계미래포럼’의 주제는 ‘4차 산업혁명과 금융의 디지털혁신’이었다. 기조 연설에 나선 셍홍위 앤트파이낸셜 리스크 담당 임원은 “우리는 이제 막 새로운 금융제도로 가는 여정의 출발점에 서 있다. 1만미터 중 100미터밖에 못 왔다”면서 분발을 촉구했다. 화약을 발명하고도 서양의 대포에 유린당했던 중국은 4차 산업혁명의 주도권을 잡기 위해 규제를 혁파하면서 혁신을 독려하고 있다. 우리는 어떤가. 대통령이 약속한 인터넷전문은행 특례법마저 일부 여당 의원들에 의해 발목이 잡히는 사태가 연출되고 있다. 이러다 우리 기업과 혁신가들이 제2, 제3의 구텐베르크에게 속절없이 추월당하는 사태가 재연될 수 있다.
조남규 경제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