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씨는 입사 첫날부터 “어차피 조금 경력 쌓다가 서울로 자리 옮기겠지”라고 면전에서 이야기하는 몇몇 선배 사원의 이야기를 듣고 충격을 받았다. 이곳에 터를 잡고 살겠다는 각오로 이미 주소지 이전까지 마친 상황이었다. 그는 “아무런 연고가 없는 지역에 일자리를 얻은 건 맞지만, 하루 만에 그런 이야기를 들을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고 떠올렸다.
노동조합도 김씨의 회사 생활을 꼬이게 만들었다. 직장 상사는 오리엔테이션 기간 중 “노조에 가입할 것이냐”고 넌지시 물었다. 그는 “다른 선배 사원은 다들 가입한 상태”라고 덧붙였다. 김씨는 별생각 없이 “다른 분들이 다 가입했으니 저도 하겠다”고 말했다.
반나절도 지나지 않아 김씨가 노조 가입 의사를 밝혔다는 사실이 일파만파 퍼져나가 회사 경영진 귀에도 들어갔다. 휴대전화 메신저는 소문을 걷잡을 수 없이 퍼뜨리는 데 일익을 담당했다. 그렇게 며칠 만에 김씨는 회사 고위층의 눈 밖에 났다.
김씨는 “머잖아 떠날 사람”, “입사한 지 이틀 만에 노조에 가입하겠다고 상사 앞에서 말한 무개념 신입사원” 등 사내에서 퍼지는 온갖 수군거림에 견딜 수가 없었다. 결국 1년도 버티지 못하고 회사를 뛰쳐나올 수밖에 없었다. 그는 당시를 떠올리며 “다신 ‘사내정치’의 희생양이 되는 일이 없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일만 열심히 하면 되는 줄 알았는데…”
김씨 사례에서 보듯 직장은 단순히 일만 열심히 한다고 인정을 받을 수 있는 곳이 아니다. 한국 사회에서 전통적으로 ‘든든한 배경’으로 여겨지는 학연과 지연이 허술하면 직장에서 오래 버티기 힘들다. 딱히 학연이나 지연이 없으면 윗사람에게 잘 보이기라도 해야 한다. 한 번 경영진 눈 밖에 난 신입사원에게 도움의 손길을 건네는 이는 드물다. 자신도 윗사람한테 밉보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게 현실정치 못지않게 ‘비정한’ 사내정치의 실상이다.
6일 기자가 그동안 취재 과정에서 만난 직장인 10명의 얘기를 종합해보니 다들 “사내정치의 폐단을 직접 겪거나 곁에서 봤다”고 했다. 그중에는 김씨만큼 한국의 사내정치 문화를 혐오해 아예 일본 오카야마현으로 건너가 현지인과 결혼한 유모(34)씨도 있다.
유씨는 한국에서 잠시나마 제조업과 서비스업에 종사하던 시절을 떠올리며 “남는 건 없고 스트레스만 쌓여가는 기분이었다”고 회상했다. 이어 “취직 준비를 할 때는 마음은 고됐지만 희망이란 건 있었다”며 “한 번뿐인 인생을 쓸데없는 것에 허비하고 싶지 않다”고 덧붙였다.
지금은 일본 제조업체에서 근무하고 있다. 그는 “동양 문화권이어서 한국과 비슷한 면이 전혀 없다고 할 순 없다”면서도 “여기선 일할 때만큼은 다른 것 생각 안 하고 집중할 수 있어 좋다”고 했다. 그는 일본에서의 지금 삶에 만족한다.
물론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니 회사에서도 정치를 잘하면 좋은 것 아니냐고 생각할 수 있다. 외국계 기업에 다니는 이모(31)씨가 그렇다. 이씨는 “어차피 회사 생활이란 게 혼자 할 수 있는 건 아니다”고 잘라 말했다. 그러면서 “사내정치를 잘해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업무를 추진하는 것도 ‘능력’ 아니겠느냐”고 강조했다.
취업정보 사이트 ‘사람인’이 지난해 9월 직장인 828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한 결과 10명 중 7명이 “사내정치 때문에 스트레스가 쌓인다”고 답했다. 단순한 스트레스를 넘어 부당하게 책임 추궁을 받거나(43.1%), 자신의 업적을 남에게 빼앗기거나(34.8%), 인사 불이익까지 감수해야(31.5%) 할 정도로 사내정치의 폐해는 심각한 것으로 나타났다. 심지어 직장 내 따돌림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구정우 성균관대 교수(사회학)는 “한국의 기업문화가 여전히 상명하달식 시스템에 익숙한 것이 원인”이라며 “지금보다 더 수평적이고 소통하는 기업문화를 만드는 데 기업들이 나설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김윤태 고려대 교수(사회학)도 “회사라는 시스템을 한 개인이 쉽게 벗어나는 것은 어렵다”며 “불필요한 오해와 갈등을 피하려면 상급자들이 나서야 한다”고 했다.
배민영 기자 goodpoint@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