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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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순구의일상의 경제학] 한국경제와 네덜란드병

석유 나오자 제조업계 경쟁력 약화 불러 / 반도체만 호황인 한국 모습 ‘닮은 꼴’ 우려
영어로는 더치 디지즈(Dutch Disease), 번역하면 네덜란드병이라는 경제용어가 있다. 네덜란드 바다에서 석유가 발견됐는데 그로 인해 네덜란드의 경제가 침체된 사건에서 비롯된 단어이다. 네덜란드병이라는 단어를 처음 들은 것은 아프리카 출신 지인과의 대화 중이었다.

어려서부터 석유 한 방울도 나지 않는 대한민국에서 자라며 석유 파동 등이 일어날 때마다 천연자원이 부족한 한국의 상황을 원망했던 나로서는 석유뿐만 아니라 천연자원이 너무 풍부해 경제가 걱정이라는 아프리카 지인의 말은 농담처럼 들렸다. 하지만 대화를 하면서 정말로 아프리카의 국가들은 네덜란드병에 대한 근심이 크다는 것을 깨닫게 됐다.

사실 석유와 같은 천연자원이 풍부해 이런 천연자원을 수출함으로써 막대한 돈을 벌 수 있는 국가 중에는 천연자원 채굴 이외의 산업은 모두 침체된 곳이 상당히 많다. 특히 제조업 분야의 발전이 느려지는 현상을 자주 발견할 수 있는데, 이것은 논리적인 설명이 가능하다. 가령 석유가 발견돼 석유를 수출할 수 있다면 이렇게 벌어들인 외화를 사용해서 자동차 등의 제조업 상품을 손쉽게 구매할 수 있다. 외국의 우수한 제품을 넘쳐나는 외화를 이용해 얼마든지 구매할 수 있는 상황에서 기술이 부족한 자국의 공장에서 만든 제품을 사용하지 않게 된다. 이에 수입 가능한 제조업 공산품 분야는 쇠퇴하게 되고 수입이 불가능한 서비스 분야로 사람이 몰리는 것이 네덜란드병의 전형적인 현상이다.

달리 해석해 보면, 천연자원을 수출해서 상당한 수입을 올리게 된 마당에 해외의 상품과 경쟁해 이기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해야 하는 제조업의 힘든 일자리를 굳이 선택할 필요가 없으므로 편한 서비스 분야로 몰려든다는 것이다. 물론 이렇게 천연자원 수출과 서비스업만으로 국가 경제가 잘 돌아간다고 한다면 ‘병(disease)’과 같이 나쁜 의미가 단어로 사용되지 않았을 것이다. 문제는 석유와 같은 천연자원의 가격이 하락하는 상황이 자주 일어난다는 것이다. 특별한 기술이나 경쟁력 있는 산업을 가지고 있지 않은 상황에서 석유 가격이 하락하면 해당 국가의 경제는 극심한 타격을 입게 된다.

최근 불현듯 한국 경제도 네덜란드병에 걸린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우리는 변변히 수출할 만한 천연자원이 없는 국가이다. 하지만 반도체와 같은 특정 상품이 경쟁력이 뛰어난 관계로 엄청난 수출을 하고 있다. 물론 반도체는 제조업 상품이므로 네덜란드병에 정확히 일치하는 상황은 아니지만 이상하게 다른 제조업 상품은 국제 경쟁력을 잃고 수출이 감소하는 상황에서 오로지 반도체 분야만 엄청난 무역흑자를 보고 있다는 점과 서비스산업으로 경제활동인구가 몰려들고 있다는 점에서 보면 네덜란드병과 상당히 일치하고 있다.

제조업 경쟁력이 떨어지고 있지만 반도체의 수출로 환율은 그다지 오르지 않고 있으므로 반도체 이외의 제조업이 쇠퇴하고 있다. 이러다가 반도체 가격이 하락하면 마치 석유 수출에 의존하던 네덜란드가 석유가격 하락으로 경제의 극심한 침체를 겪었던 일이 우리에게도 일어날 수 있다. 제조업 경쟁력 제고를 위한 정부와 국민의 노력이 절실히 필요하다.

한순구 연세대 교수·경제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