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옆이 지는 깊어가는 가을날 서소문 순례길 4.5㎞를 걸었다. 이 길을 걸으면 종교와 건축, 서울도심의 풍경을 모두 경험할 수 있다. 서소문 순례길은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역사가 살아 숨쉬는 서울을 만날 수 있다. 조선시대 궁궐과 근현대 건축물, 빌딩숲이 어우러진 수도 서울의 진면목을 볼 수 있다.
3일 오전 11시쯤 명동성당을 출발해 대한성공회 서울주교좌성당을 지나 서소문 밖 네거리 순교성지와 중림동 약현성당까지 느림과 여유의 미학을 느끼며 발걸음을 내딛었다. 이 길은 천주교 신자뿐만 아니라 국내외 관광객 모두 종교적 거부감 없이 즐길 수 있도록 조성됐다.
서울 도심 한복판에 위치해 있으며 국내 천주교회의 산실 격인 명당성당은 관광객과 신도들로 붐볐다. 외국관광객들은 성당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으며 가을을 만끽했다. 새로운 인생을 출발하는 신혼부부는 흩날리는 낙엽을 보며 함박 웃음을 지었다. 명동성당 계단을 오르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이 하늘 높이 뾰족하게 솟아오른 성당 첨탑이다. 빌딩 숲속의 도심 한복판에 자리 잡은 명동성당은 국내에서 가장 규모가 큰 고딕양식 건축물이다.
명동성당 앞 골목길로 접어들면서 본격적인 서소문 순례길 탐방이 시작됐다. 을지로의 느티나무 가로수는 주황색으로 곱게 물들고 있었다. 가을 바람에 힘없이 날리는 낙엽을 보며 가을이 깊어가고 있다는 것을 실감했다. 순례길에는 서울도보관광 표지판(사진)이 설치돼 편안하게 걸을 수 있다. 서울의 가을을 몸으로 느끼며 걷다 보니 어느새 서울시청 앞 광장에 다다랗다. 잔디밭을 뛰어다니는 천진난만한 어린이들의 표정이 즐겁게만 보였다. 바로 옆에 있는 서울도서관의 현관문을 열고 들어갔다. 독서삼매경에 빠진 시민들의 얼굴이 행복해 보였다. 동남아 관광객이 서울관광 안내도를 보며 다음 행선지를 찾고 있었다.
서울 중구 중림동 약현성당을 찾은 관광객들이 성당으로 가는 오르막 길을 오르고 있다. |
다시 발길을 돌려 길 건너 정동에 위치한 대한성공회 서울주교좌성당을 찾았다. 성당은 서울시유형문화재 제35호로 1922년 코프 초대주교가 착공해 1926년 5월 완공한 로마네스크 양식 건물이다. 화강석과 붉은 벽돌을 아울러 쌓은 조적조 구조다. 일제침략기에 서양인에 의해 설계된 건축양식이라는 점에서 의미있는 건물이다. 성당을 향해 있는 단층 한옥의 사목관이 눈에 들어왔다. 사목관 왼편에는 등록문화재로 지정된 경운궁 양이재가 있다. 경운궁 양이재는 1905년 지어진 건물로 대한제국 시절 귀족들의 교육기관인 수학원으로 사용됐다. 현재 대한성공회 서울교구 주교의 집무실로 사용 중이다. 옆에 위치한 덕수궁과 성공회성당이 조화롭게 어울렸다. 정오를 넘기자 성당에서 치는 종소리가 은은하게 들렸다. 덕수궁 돌담길을 걷다 보면 바로 서울시립미술관이 나온다. 미술관에는 한국화의 채색화 분야에서 독자적인 화풍을 이룬 천경자 화백의 작품을 볼 수 있다.
미술관을 나와 서소문역사공원 방향으로 발길을 돌렸다. 이곳은 ‘서소문 밖 네거리’로 불렸으며 조선시대 공식 처형장이었다. 이 처형장에서는 천주교도 100여명이 순교했다. 한국 최초로 세례를 받은 이승훈과 정약종, 황사영 등이 신유박해 등 세 차례에 걸쳐 처형됐다. 2014년 8월 방한한 프란치스코 교황이 순교성지에 세워진 현양탑을 찾아 참배했다.
서소문 성지가 내려다보이는 언덕에 위치한 중림동 약현성당은 단풍이 곱게 물들어 가을 정취가 짙게 풍겼다. 순교자의 죽음이 헛되지 않았음을 알려주는 듯한 성당은 명동성당보다 6년이나 일찍 건축됐다. 1892년 건축된 약현성당은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벽돌조 고딕양식으로 지어졌다. 약현성당은 1977년 국가문화재로 지정된 본성당 건물과 서소문 순교자 기념관 등이 자리 잡고 있어 한국 가톨릭문화의 중심지 역할을 하고 있다
서정협 서울시 문화본부장은 “서울 순례길은 천주교 신자들의 소중한 신앙유산이며 일반 시민에게는 의미있는 역사 문화유산”이라며 “서울 순례길을 통해 한국 천주교회의 특별한 발자취와 서울의 역사문화유산을 널리 알리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글·사진=박연직 선임기자 repo21@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