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러한 민화의 마법과 같은 매력은 100여년 전에도 강력했다. 이번 민화 전시를 다룬 기사와 전시 안내에는 일찍부터 민화에 주목했던 한 사람의 이름이 심심찮게 등장했다. 지금의 민화에 ‘민화’라는 이름을 붙여준 사람,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悅·1889∼1961)이다.
1921년 조선 찾은 야나기 1921년 개최된 ‘조선민족미술전람회’에서 야나기 무네요시. |
‘민예운동의 아버지’로 불리는 야나기는 특출한 개인이나 유명작가가 아닌 무명의 민중이 제작한 일상의 물건이 가진 ‘평상(平常)의 아름다움’에 주목하였다. 이른바 ‘민예’(民藝)이다. 그리고 자신이 나고 자라난 일본뿐 아니라 한국, 중국, 영국, 대만, 아프리카에 이르기까지 전 세계를 대상으로 하여 이러한 아름다움을 갖춘 민예품을 수집했으며, 뜻을 같이하는 동인들과 활발히 교류하며 민예품의 아름다움을 알리는 데 애썼다. 그리고 마침내 1936년에는 민예품의 수집과 전시, 연구, 보존을 전문으로 하는 일본민예관을 설립하게 되는데, 그 소장품은 1만7000여점을 헤아린다. 그중 한국문화재는 약 10% 정도를 차지한다.
야나기는 20대의 젊은 시절부터 한국, 한국문화재와 인연을 맺었는데, 계기가 자못 흥미롭다. 도쿄제국대학 철학과를 졸업한 후 잡지 ‘시라카바’(白樺)를 창간하고 예술문화운동을 진행한 그는 서양미술 소개에 힘썼다. 그런데 어느 날 야나기가 보관하고 있던 로댕의 조각을 보기 위하여 아사카와 노리타카라는 한 조각가 지망생이 방문했다. 당시 조선에서 교사로 일하던 아사카와는 조선시대 청화백자 한 점을 선물로 가져왔고, 그것에 마음을 사로잡힌 것이 길고 깊은 인연의 시작이었다.
1916년 첫 방문을 시작으로 1940년까지 그는 21회나 한국과 일본을 오가며 도자기를 비롯한 민예품 수집에 열중했다. 지금이야 하루에도 다녀올 수 있는 거리이나, 당시의 정세나 교통편을 생각하면 결코 적지 않은 횟수다. 도자기를 소개해 준 아사카와 노리타카, 그의 동생인 아사카와 다쿠미와 계속하여 교분을 이어 나가며 함께 해인사와 석굴암, 계룡산 요지 등을 방문하고 수집도 계속했다.
당시만 해도 고려청자와 같은 명품 수집이 주류인 상황에서, 소박한 조선백자와 무명의 화공들이 그린 문자도(文字圖)와 같은 민화, 소반, 벼루, 주전자, 담배합 등 민간에서 사용되고 있는 민예품에 주목한 야나기의 수집은 오히려 색다른 접근이었다. 훗날 야나기는 자신의 이런 수집을 두고 세간에서 돈이 없기 때문에 하찮은 것들만 모은다는 수군거림이나 비난도 있었다고 회고했다. 하지만 야나기와 그의 동인들은 꾸준하게 한국의 민예품들을 수집했다.
10년 만에 찾아낸 ‘백화청자동화합’ 야나기는 조선후기의 ‘백자청화당초동화복자문합’을 처음 한국에서 만났으나 소장하지는 못했는데, 아슬아슬하게 이어지던 인연은 첫 만남 후 십여 년의 시간이 흐른 뒤 미국에서 결실을 맺었다. |
야나기가 ‘수집이야기’(蒐集物語)에서 직접 수집 경위를 밝힌 몇 개의 소장품들 중 인상적인 것이 있다. 앙증맞은 작은 몸체에는 청화로 당초문이, 볼록한 뚜껑에는 붉은 동화로 ‘복’(福) 자를 비롯한 글자들이 장식되어 있는 ‘백자청화동화합’에 얽힌 이야기이다. 야나기는 이 합을 한국의 한 골동상에서 우연히 보고 구입을 약속했으나, 부지불식간에 다른 이에게 팔리게 되며 눈앞에서 놓쳤다. 그 후 도미타 기사쿠를 방문해 컬렉션을 살펴보던 중 이 합이 그의 수중으로 들어갔음을 알았으나 도미타 사후 그의 컬렉션이 흩어지며 합은 다시 자취를 감추었다. 아슬아슬하게 이어지던 야나기와 이 합의 인연은 10여년의 세월이 흐른 후 미국에서 결실을 맺었다. 미국에 체류 중이던 그가 보스턴의 야마나카상회에 들렀다가 이 합을 우연히 다시 만나 사들이게 된 것이다.
높이가 4㎝가 채 되지 않는 자그마한 합의 여정에 일제강점기 일본인들의 한국문화재 수집과 유통 상황이 압축적으로 담겨 있다는 점이 흥미롭고, 한편으로는 묵직하게 다가온다. 야나기가 미국에 머물던 시절에도 한국문화재에 대한 관심을 이어가고, 흘려버리기 쉬운 작은 소품 하나하나까지도 가치를 찾아내고 소중하게 여겼다는 사실도 알 수 있다. 훗날 그가 설립한 일본민예관의 컬렉션에 합이나 병의 뚜껑 등 완형이 아닌 것들도 골고루 포함되어 있는 건 이런 관심과 애정 덕분일 것이다. 회화는 이암(李巖·1507~1566)의 ‘화하구자도’(花下狗子圖)와 ‘선전관청계회도’(宣傳官廳契會圖)와 같은 일반회화도 있으나, ‘문방도’와 ‘책가도’, ‘화조도’, ‘사당도’, ‘문자도’와 같은 민화가 컬렉션의 대부분이다. 그중에는 야나기가 장황을 새로 하고, 그와 교류하며 민예운동에도 참가한 도예가 버나드 리치가 도자기로 족자의 축을 만들어준 것도 있다. 조선시대의 한 이름 없는 화공의 그림에 일본의 사상가와 영국 도예가의 손길이 모여 지금 우리가 감상하고 있는 작품이 완성되었다는 점은 해외로 나가게 된 우리 문화재가 어떻게 향유되고 보존되어 왔는지를 보여주는 한 사례다.
이렇듯 야나기는 제각각의 사연을 가진 소장품을 하나둘 모아 컬렉션을 만들어갔으며, 이를 바탕으로 1924년 서울에 조선민족미술관을 열게 된다. 그 즈음 ‘조선의 벗에게 보내는 글’(朝鮮の友に贈る書), ‘사라지려 하는 어느 조선 건축을 위하여’(失われんとする一朝鮮建築のために)와 같은 글을 신문에 게재했다. 특히 후자의 글은 세간에 반향을 불러일으키며, 광화문의 철거를 막아내는 데 큰 역할을 했다. 1936년에는 일본 도쿄도 메구로구에 현재의 일본민예관을 설립해 초대 관장으로 부임했고, 생전 자신의 집(현재 일본민예관 서관)을 포함한 사유재산을 모두 일본민예관에 기증했다.
야나기가 장황(裝潢)한 ‘화조도’ 조선후기 ‘화조도’는 야나기가 수집하고, 도예가 버나드 리치가 도자기로 족자의 축을 만들어 보관됐다. 일본민예관 제공 |
국외소재문화재재단은 2014년 일본민예관과 인연을 맺었다. 당시까지만 해도 이곳의 소장품들은 대표적인 도자기, 민화류를 중심으로 소수의 유물만 도록이나 전시의 형태로 공개되었을 뿐 전모를 알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이것은 비단 일본민예관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해외 기관들이 적게는 수십에서 많게는 수백, 수천 점에 이르는 한국문화재를 가지고 있지만 한국문화재 전문 큐레이터의 부재, 전시 공간의 부족, 연구·보존에 필요한 재원의 문제 등으로 소장품이 공개되지 않거나 접근이 어려운 경우가 대부분이다.
남은실 국외소재문화재재단 협력지원팀 대리 |
올해도 일본민예관은 11월 말까지 특별전 ‘백자’(白磁, Joseon White Porcelains)를 진행 중이다. 재단은 지난달 일본민예관 실태조사의 마지막 결과물인 ‘일본민예관 소장 한국문화재: 도자·회화편’의 일문판 발간을 마쳤다. 하지만 이것이 끝은 아니다. 재단은 야나기가 한국 방문 시 촬영하고 기록했던 역사자료들의 분석과 연구도 계속할 계획이다.
남은실 국외소재문화재재단 협력지원팀 대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