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기록관은 '12·12, 5·18 실록(1997년 5월 대한민국재향군인회 발간·이하 실록)', '제5공화국 전사', 검찰 수사·재판 기록 등을 토대로 전씨와 보안사의 5·18 관련 행적을 분석해 22일 공개했다.
이 실록 등에 따르면 전씨는 5월25일 오후 12시15분쯤부터 2시간가량 국방부 육군회관에서 주영복 국방장관, 이희성 계엄사령관, 황영시 육군참모차장 등과 상무충정작전 지침을 검토하고 5월27일 새벽 도청을 재진압키로 했다.
5월26일 오전 전씨는 보안사에서 재진압 작전과 관련한 두 번째 회의를 가졌다. 정호용 특전사령관, 노태우, 백운택 9사단장 등 하나회 회원들(이상 육사 11기)과 소준열 전교사령관(육사 10기)이 함께했다.
전씨는 이 자리에서 정 특전사령관으로부터 작전 계획을 보고받고 작전에 필요한 가발(침투시 변장용)을 지원했다.
정 특전사령관은 5월26일 오후 2시쯤 이희성 계엄사령관에게 충격용 수류탄과 항공사진을 받아 같은 날 오후 9시쯤 광주 송정리 비행장에 도착했다. 이후 20사단장, 3·7·11공수여단장을 소집해 장비를 분배하고 '침투 시작 시간'을 27일 오전 4시로 밝힌 뒤 각 여단의 임무를 재확인했다.
소 전교사령관은 정 특전사령관보다 5시간 먼저(26일 오후 4시) 광주비행장을 찾아 공수여단 장병들을 격려했다.
전씨가 5월26일 계엄군에게 중식용 소 7마리를 지원하는 '잔치판'을 열어주고 격려금(6300만 원 중 전씨는 300만 원) 전달을 지시했다는 기록(505보안대 작성)도 있다.
5월 25일(한국감시단 상황보고 7호)·26일자 미국 기밀문서에도 '전두환 장군은 교착상태를 종료하고 시내로 진입해야 한다는 극심한 압박감에 시달리고 있다고 한다. 도시를 재장악하기 위한 군사작전이 24~36시간 내 실시될 것이라고 함'이라고 나와 있다.
이 같은 기록으로 미뤄 전씨가 재진압 작전 결정회의에 두 차례 참석해 사실상 작전을 이끈 것으로 5·18 기록관은 분석했다.
전씨가 5월21일 오후 1시쯤 전남도청 집단발포가 이뤄진 직후 '자위권 발동과 계엄군 광주외곽 배치'와 관련한 회의를 주도한 것으로 추정되는 기록도 나왔다. 실록 285쪽엔 '21일 오후 2시35분께 국방부장관실에서 시위가 극에 달했다는 보고를 받은 전씨 등이 시위대를 무장폭도로 규정하고 계엄군을 광주외곽으로 전환 배치해 봉쇄한 뒤 사상자가 발생하더라도 자위권을 발동, 신속히 진압키로 했다'고 기록돼 있다.
'21일 오후 4시35분쯤 열린 국방부 장관 주재 회의에 전씨를 대신해 참석한 정도영 보안처장 등이 계엄군 외곽 배치, 자위권 발동 등의 구체적인 실행방안을 결정했다'고도 적혀 있다.
앞서 국방부 과거사위가 기무사에서 찾은 육군 제2군사령부의 '광주권 충정작전 간 군 지시 및 조치 사항'에 '전(全) 각하(閣下) : 초병에 대해 난동 시에 군인복무규율에 의거 자위권 발동 강조'라고 명시돼 있는 점도 사실상 전씨가 자위권 발동 명목으로 발포 지시를 내렸다는 정황을 뒷받침하고 있다.
실록은 외곽 포위 작전의 기본 개념을 '광주를 고립시켜 생활필수품 부족으로 인한 장기 저항이 불가능하게 하려 한 것'이라고 기록했다.
나의갑 5·18 기록관장은 "실록과 달리 전두환 지시로 1982년 5월 발간된 5공화국 전사에는 시국 수습 방안, 전두환이 재진압작전 결정 모임에 두차례 참석한 사실 등을 누락시켰다"고 밝혔다.
광주=한현묵 기자 hanshim@segye.com
사진=뉴시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