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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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지중지 소장품 기증… 加박물관 유일 ‘한국실’ 만든 교민들 [해외 우리 문화재 바로알기]

<15> 문화 전도사 된 한인사회 / 토론토서 결성 ‘한국예술진흥협회’ / 한국의 멋과 예술 알리기에 앞장서 / 민진장 등 조선 문인 10여명 편지 / 교민 박소인씨 대가없이 ‘쾌척’키로 / 로열온타리오만 한국유물 1479점 / ‘한국실’ 역사 자긍심 높이는 ‘창구’ / 교민들 한국어 표기 교정 적극 도움 / 기금도 조성 지속적인 유물 구입도
2016년 8월, 캐나다 토론토의 로열온타리오박물관의 수장고를 조사하던 중 발견한 편지 한 묶음. 그중 한 장을 펴보니 예리하나 약하지 않고 흔들림 없이 정갈하게 써내려간 글씨가 눈에 띈다. 세상을 떠난 아버지에 대한 절절한 그리움을 표현하고 있는데, 하영휘 성균관대 교수의 번역은 이렇다.

“뒤따라 부여잡고 울부짖으며 사모해도 더욱 미칠 수 없어, 오장이 찢어지는 슬픔이 천지간에 끝이 없습니다. 이때 뜻밖에 영손(令孫·수신자의 손자)이 와서 손수 쓰신 편지를 전하고 아울러 위문하였습니다. 어진 은혜를 받으니 슬픔과 감사를 감당하기 어렵습니다.”
아버지에 대한 절절한 그리움 담은 편지
아버지 민정중의 상을 치른 뒤 애끓는 심정을 표현한 민진장의 편지. 이 편지의 소장자인 캐나다 교민 박소인씨가 캐나다 로열온타리오박물관에 기증의사를 밝혀 관련 절차가 진행 중이다.
"© 2016 Royal Ontario Museum. Photographed by the Overseas Korean Cultural Heritage Foundation."
편지를 쓴 이는 숙종 연간 우의정을 지낸 민진장(閔鎭長·1649∼1700)이다. 부친 민정중(閔鼎重·1628∼1692)의 상을 위로하는 편지를 받고 슬픔과 감사의 뜻을 담아 답한 편지다. 민정중은 좌의정까지 지냈으나 1689년 기사환국으로 평안북도 최북단인 벽동으로 유배되었다가 3년 후 세상을 떠났고, 1694년 갑술환국으로 관직이 회복되었다. 정1품의 높은 지위를 누리다 유배되어 사망하고 복권이 되기까지 5년도 채 걸리지 않은 아버지의 장례를 고향인 양주에서 치른 뒤 그의 외아들 민진장이 쓴 편지인 셈이다.

당시의 혼란스러웠던 정치사와 민진장의 부친에 대한 그리움이 고스란히 담긴 이 편지는 현재 캐나다 토론토에 거주하는 교민 박소인씨의 소장품이다. 박씨는 이 외에도 민정중, 선조의 사위 신익성, 권상하, 김창협 등 저명한 조선시대 문인 10여명의 편지를 함께 소장하고 있다. 그는 최근 이 편지들을 로열온타리오박물관(Royal Ontario Museum)에 기증하겠다는 의사를 밝혔고, 관련 절차가 진행 중이다.

박씨와 같은 해외 교민들의 의지가 해외 각국에 한국의 전통 문화를 알리는 데 큰 역할을 하고 있다. 유물을 기증하는 등 도드라지는 역할을 맡는가 하면 한국 관련 전시회의 기획과 준비 과정에서 크고 작은 힘을 보태기도 한다. 
통일신라 유물 ‘뚜껑굽단지’
통일신라시대의 작품인 ‘뚜껑굽단지’는 캐나다의 한국예술진흥협회가 현지 박물관에 기증한 것이다. "© 2016 Royal Ontario Museum. Photographed by the Overseas Korean Cultural Heritage Foundation."

◆해외 박물관 한국컬렉션 성장시킨 교민사회의 힘

박씨가 기증 의사를 밝힌 로열온타리오박물관은 토론토시에 위치한 최대 규모의 박물관이다. 1909년 분청사기귀얄문완(16세기)을 입수한 이래 한국소장품을 꾸준히 늘려 지금은 1479점에 이르며, 이 중 250여점이 한국전시실에 진열되어 있다.

로열온타리오박물관이 이만한 소장품과 독립된 전시실까지 갖출 수 있었던 원동력은 무엇일까. 20세기 중반까지만 해도 한국에서 활동했던 캐나다인 선교사 또는 그의 후손들의 기증이 큰 몫을 차지했다. 한국에서 활동하며 소장하게 된 각종 유물이 선교사 본인이나 후손들의 기증으로 로열온타리오박물관의 한국소장품을 살찌운 것이다. 그러나 20세기 후반부터는 박씨처럼 한국미술을 캐나다에서 널리 알리고 관련 활동을 후원하고자 한 캐나다 거주 한국 교민들의 활동이 결정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

특히 1984년 토론토 교민들을 중심으로 결성된 ‘한국예술진흥협회(Canadian Association for the Recognition and Appreciation of Korean Arts·이하 협회)’가 주목된다. 협회가 만들어지면서 캐나다 교민사회는 로열온타리오박물관 내 한국소장품의 성장과 활성화를 도모하는 견인차 역할을 하기 시작했다. 협회 멤버들은 자신들의 소장품을 기증하기도 하고(앞서 소개한 박씨도 협회의 핵심 일원이다), 기금을 조성해 로열온타리오박물관에 없거나 부족한 유물을 협회 이름으로 구입하기도 했다.

협회의 열성적인 활동은 로열온타리오박물관이 소장한 한국 관련 유물을 유심히 돌아보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고, 더불어 지역의 한국미술 소장가 및 애호가들의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효과를 낳았다. 협회가 발족된 1984년 이후 한국소장품의 규모가 두 배 이상 확장되었으니 가히 그 기여도를 짐작할 수 있다.
加 한국 유물 조사 보고서
국외소재문화재재단이 2015∼16년 로열온타리오박물관의 한국 유물을 조사하고 2018년 10월 발간한 보고서.

◆캐나다 유일의 박물관 한국실 유치

협회의 가장 큰 성과는 1999년 로열온타리오박물관 내에 한국실을 유치한 일이다. 국제교류재단의 지원과 함께 이루어낸 결실이었다. 로열온타리오박물관의 한국실은 선사부터 현대까지 다양한 한국 문화와 예술을 한눈에 보여주는 창구다. 캐나다 유일의 한국미술 전담 상설전시실이라는 점에서 토론토를 넘어 캐나다 전역의 교민들에게 문화적 자긍심을 높이고 한국의 역사와 문화·예술을 배울 수 있는 공간이기도 하다. 협회가 한국실에 정기적으로 견학을 오는 한글학교 학생들의 입장료를 전액 지원해 주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로열온타리오박물관도 다른 해외 박물관과 마찬가지로 앞으로 한국미술 전문 학예연구원을 마련해야 하는 과제에 당면해 있다. 많은 소장품과 독립된 전시실이 마련되어 있더라도 전문 인력 없이는 안정적인 관리와 창조적 발전이 어렵기 때문이다. 현재는 이런 공백을 윌프리드 로리에 대학의 한희연 교수가 메워주고 있다. 2003년부터 로열온타리오박물관 한국소장품 조사에 참여한 이래 한 교수는 그것의 관리와 한국실 운영을 위한 다양한 지원을 하고 있다. 그는 캐나다 한글학교, 토론토대학 등의 프로그램을 통해 한국실 의미와 한국소장품의 가치에 관한 교육에도 힘쓰고 있다.

◆“한국 교민은 매우 결정적인 순간에 도움을 준다”

유물 기증, 전시 기획 등은 아니더라도 해외 교민들이 한국문화를 알리는 데 역할을 하는 방법은 다양하다. 현지 박물관의 한국 관련 전시에 참여해 크고 작은 역할을 하는 것도 그중 하나다.

최근 독일 함부르크 로텐바움박물관에서는 특별전 ‘변화와 고요의 나라, 한국’이 열렸다. 국립민속박물관과 공동으로 준비한 전시이다. 이 전시회를 준비한 큐레이터 수잔나 크뇌델 박사는 전시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한국 교민들에게 한국어 표기 등 세세한 부분에서 여러 가지 도움을 받았다. 크뇌델 박사는 “전시를 개최하기까지 들어가는 수많은 공정을 본다면 비중이 크지 않은 것처럼 보일 수도 있으나 사실 그들(한국교민)은 매우 결정적인 순간에 도움을 준다”며 “게다가 개인 시간을 쪼개서 도움을 준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그들의 기여는) 실로 엄청난 것”이라고 말했다.
이민선 국외소재문화재재단 조사활용1팀 대리

유물 기증부터 한국어 표기 교정까지, 나아가 한국 주제 전시와 교육·체험프로그램에서 현지 교민들이 주된 소비자라는 점을 고려하면, 해외 박물관의 한국컬렉션 관리와 활용에 있어 교민사회가 기여하는 바는 실로 상당하다. 해외 소재 문화재에 관한 업무를 하는 국외소재문화재재단에서 근무하는 필자도 교민들로부터 적잖은 도움을 받는다. 인터넷으로는 알 수 없는 현지 상황을 전해 듣고 도움을 받다 보면 그들의 메일 한 통이 묵직한 감동으로 다가오기도 한다. 해외에서 우리 문화재를 향유하고 홍보하며 해외 소재 문화재를 대상으로 한 국내의 각종 활동에 크고 작은 지원을 해주는 현지 교민들에게 지면을 빌려 감사의 뜻을 전하고 싶다.

이민선 국외소재문화재재단 조사활용1팀 대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