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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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불붙은 부성주의 논쟁… "양성평등" vs"시기상조"

정부, 저출산 대책 일환으로 '자녀 성=아버지 성' 원칙 폐기 추진 / 지금도 부부 합의 아래 아버지 대신 어머니 성 따를 길 열려있어 / "부부가 협의해 엄마 성 따른다고? 시댁에서 반대할 텐데…" 현실 / 2005년 헌법재판관 대부분 "부성주의 합헌"… 다시 헌재로 가면?
“자(子)는 부(父)의 성(姓)과 본(本)을 따르고 부가(父家)에 입적(入籍)한다.”(옛 민법 제781조 제1항)

“자는 부의 성과 본을 따른다. 다만, 부모가 혼인신고 시 모의 성과 본을 따르기로 협의한 경우에는 모의 성과 본을 따른다.”(2005년 개정 후 현행 민법 제781조 제1항)

정부가 최근 저출산 대책 일환으로 ‘자녀는 우선적으로 아버지 성을 따른다’는 현행 부성주의(父姓主義) 원칙의 폐기를 추진하고 나서면서 부성주의를 규정한 민법 제781조 제1항의 ‘운명’에 법조계 이목이 쏠린다. 정부는 일단 민법을 개정하는 방안 쪽에 무게를 두고 있으나 일부 여성이 해당 조항을 상대로 헌법재판소에 헌법소원을 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지금으로부터 13년 전인 2005년에는 부성주의의 위헌성 여부를 두고 심리에 참여한 헌법재판관 8명의 의견이 5명(헌법불합치) 대 2명(위헌) 대 1명(합헌)으로 엇갈렸다.

◆저출산 대책 일환으로 '자녀 성=아버지 성' 원칙 폐기 추진

10일 법조계에 따르면 대통령 직속 저출산·고령사회위원회는 위원회 심의를 거쳐 최근 ‘저출산·고령사회 정책 로드맵’을 확정·발표했다. 로드맵은 저출산을 부추기는 불합리한 법제 개선의 일환으로 자녀 성 결정을 아버지 성을 우선하는 부성주의 원칙에서 부모 간 협의 원칙으로 전환한다는 내용을 담았다.

맨 위에서 보듯 우리 민법은 제정 당시 자녀는 무조건 아버지 성을 따르도록 했다. 예외가 허용되지 않았다. 이는 곧 ‘딸은 대(代)를 이을 수 없다’는 가부장주의와 직결됐다. 자손 대대로 우리 집안 성을 물려주려면, 그래서 대가 끊기지 않게 하려면 무조건 아들을 낳아야 한다는 생각으로 이어져 ‘남아선호사상’이 널리 퍼지게 됐다.

이번에 위원회가 부성주의 원칙 폐기를 저출산과 연관지은 점에서 보듯 부성주의는 여성들로 하여금 ‘애를 낳아도 내 성을 물려줄 수 없는데 굳이…’ 하는 생각을 갖게 만들어 저출산의 한 원인으로 작용해왔다는 분석도 있다. 
2005년 민법상 부성주의 논쟁에서 맞붙은 전효숙 전 헌법재판관(왼쪽)과 권성 전 헌법재판관. 전 전 재판관은 “부성주의는 양성평등을 침해해 위헌”, 권 전 재판관은 “부성주의는 헌법 이전의 문화로 그 폐기는 시기상조”라고 각각 주장했다. 연합뉴스·뉴시스
◆"부부가 협의해 엄마 성 따른다고? 시댁에서 반대할 텐데…"

노무현정부 시절 호주제가 폐지되면서 부성주의 조항도 일부 수정이 가해지는 게 불가피해졌다. 2005년 개정된 현행 민법은 먼저 ‘자는 부의 성과 본을 따른다’고 규정해 부성주의 우선 원칙을 선언했다. 그리고 이어 ‘부모가 혼인신고 시 모의 성과 본을 따르기로 협의한 경우에는 모의 성과 본을 따른다’는 단서조항을 뒀다.

한마디로 아버지 성을 따르는 게 원칙이나 부부가 혼인신고 때 “우리는 애를 낳으면 어머니 성을 물려주기로 합의가 되었습니다” 하면 예외적으로 어머니 성도 따를 수 있다는 뜻이다.

하지만 실제로 민법 개정 후 부부가 협의해 남편 아닌 아내의 성을 따르기로 한 사례가 과연 몇 건이나 되는지는 관련 통계조차 찾기 힘든 실정이다. 기혼 여성인 A씨는 “법률에 그런 조항이 있는 줄 미처 몰랐다”며 “그런데 아무리 부부끼리 협의가 되어도 시댁 어른들이 반대하든가 하면 실행이 불가능할 것만 같다”고 전했다.

◆전효숙 재판관 "부성 강요는 헌법상 양성평등 침해해 위헌"

헌법재판소는 지난 2005년 우리 민법의 부성주의를 정면으로 다뤘다. 관여 재판관 8명 중 5명이 ‘헌법불합치’, 2명은 ‘위헌’, 1명은 ‘합헌’ 의견을 냈다. 결과적으로 헌법불합치 결정이 내려져 ‘예외없는 부성주의를 규정한’ 옛 민법 조항이 ‘부성주의의 예외를 허용한’ 지금의 민법 조항으로 고쳐지는 계기가 되었다.
김상희 저출산·고령사회위원회 부위원장이 지난 7일 정부서울청사에서 ‘저출산·고령사회 정책 로드맵’을 발표하고 있다. 연합뉴스

다만 헌법불합치 의견에 선 재판관 5명과 위헌 의견에 선 재판관 2명의 의견은 확연히 갈렸다. 헌법불합치 진영은 “부성주의 자체가 위헌인 건 아니고 부성주의를 강요하는 것이 부당한 경우에 대해서도 예외를 규정하지 않은 것이 위헌”이라고 봤다. 아버지 성을 따른다는 원칙 자체는 합헌이란 취지다.

반면 위헌 진영은 “국가가 일방적으로 부성의 사용을 강제하는 건 혼인과 가족생활에 있어 양성평등을 명하고 있는 헌법 위반”이라고 봤다. 아버지 성을 따라야 한다는 것이 위헌이란 논리다. 당시 재판관 중 유일한 여성이던 전효숙 재판관이 이 의견에 가담했다.

◆권성 재판관 "가족의 일체감·유대감 강화… 폐기 시기상조"

유일하게 권성 재판관 혼자 부성주의는 위헌도, 헌법불합치도 아닌 ‘합헌’이란 의견에 섰다. 권 재판관은 소수의견에서 “가족제도 중에도 부성주의는 헌법에 선행하는 문화”라며 “부성주의는 출산과 수유로 인해 외관상 확인이 가능한 어머니와의 혈통관계에 비해 본질적으로 불확실한 아버지와의 혈통관계를 대외적으로 공시하고 부와 자녀 간 일체감과 유대감을 강화, 가족의 존속과 통합을 보장한다”고 주장했다.

이어 “추상적 자유와 평등의 잣대만으로 우리 사회에서 여전히 유효하게 존속하면서 그 가치를 인정받고 있는 생활양식이자 문화 현상인 부성주의의 합헌성을 부정하는 것은 시기상조”라고 일갈했다.

이 결정이 내려지고 어느덧 13년이 지났다. 정부는 민법 개정을 통해 부성주의 원칙을 폐기한다는 복안이다. 전효숙 재판관 말대로 ‘양성평등 실현’에 꼭 필요한 일일까, 아니면 권성 재판관 말대로 ‘아직은 시기상조’일까. 국회의 민법 개정이 먼저 이뤄질지, 아니면 다시 헌재 위헌심사를 거치게 될지도 중대 변수다.

김태훈 기자 af103@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