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 있는’ 대학 연합 동아리의 추한 민낯이 드러났다. 끈끈한 연대감을 자랑하던 동아리 내의 남학생들이 뒤에선 ‘여학생 경매’를 일삼았다. 비밀리에 잠자리하고 싶은 여학생을 투표하고, 낙찰받은 남학생은 자기들끼리 규칙을 만들어 여학생들을 ‘소유’하고 관리했다. 피해자들이 공론화하려 하자 명예훼손으로 고소하자는 이야기까지 나왔다고 한다. 전문가는 대학가 내에서 성희롱이 끊이지 않는 이유에 대해 “법과 제도가 나아졌더라도 사회적 인식이 뒷받침되지 못하다는 방증”이라며 “진심 없는 가해자의 사과는 2차 피해의 유인이 될 수 있다”고 지적했다.
◆20년 악습이 전통으로 둔갑한 ‘여학생 경매’
대학생 연합 요들 동아리 ‘알핀로제’는 1969년 창립했다. 주한 스위스 대사관으로부터 요들 공연 관련 친서까지 받았다는 이 동아리엔 20년 넘는 끔찍한 ‘전통’이 있다. 바로 여학생 경매다.
남학생들끼리 모임을 만든 후 여학생을 외모로 평가해 순위를 매긴다. 술을 가장 많이 마시는 남학생이 마음에 드는 여학생들을 낙찰받는다. 애인이 있는 여학생도 예외 없이 경매 대상에 올랐다. 자신의 여자친구를 경매에서 뺏기지 않으려 과음하는 남학생도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알핀로제’ 회원인 A씨는 12일 CBS라디오 ‘김현정의 뉴스쇼’에 출연해 “그들만의 규칙이 있었다. 낙찰을 받았으면 그 1명과는 사적인 대화가 가능하고 나머지 여성과는 사적인 대화를 하면 안 되는 것”이라며 “그런 경매를 하는 와중에서 서로 나눴던 대화들을 보면 ‘내가 낙찰한 여자인데 왜 네가 감히 대화하느냐’ 이런 식으로 이미 마치 여자친구이거나 소유물인 것처럼 저희를 취급했었다”고 분노했다.
◆“잠자리 순위까지 매겨... 사과문 올리곤 뒤에서 고소 언급”
가해자들은 잠자리하고 싶은 여학생 순위까지 매겼던 것으로 드러났다. A씨는 “저희는 외모 평가만 매긴 줄 알았지만 알고 보니 자고 싶은 여성을 쪽지에 적어서 내라라는 요구를 듣고 실제로 그렇게 했다는 얘기를 들었다. 제보를 통해서 그런 일이 있었다는 걸 확인했다”며 “(공론화하지 않았으면 ‘전통’이란 이름으로 계속됐을 거라고) 저는 정말 그렇게 됐을 거라고 생각이 든다”고 전했다.
가해자들은 개인 성명서와 단체 성명서로 피해자들에게 사과했다. 하지만 피해자들은 “사과에 진정성이 없다”는 입장이다. 사과문이 올라오던 시기 이른바 가해자들이 ‘비상대책위원회’를 만들어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냐” “실제로 추행이나 폭행이 일어났으면 모를까” 등의 대화를 나눈 사실이 알려졌다. 이들은 성희롱 건을 공론화하려는 피해자들을 ‘사실적시 명예훼손’으로 고소하자는 이야기까지 나눴다고 전해진다.
◆상아탑 더럽힌 성희롱... 피해자 “증거 수집하다 죽음까지 생각”
대학가의 성희롱 사태는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바른미래당 장정숙 의원이 교육부로부터 제출받은 자료에 따르면, 지난 2013년부터 지난해 말까지 국내 106개 대학에서 발생한 성범죄 사건은 적발된 것만 320건에 달했다. 선후배 및 교수-학생 등 수직적인 대학 문화 등을 고려하면 말 못한 범죄는 이보다 더 많을 것으로 추정된다.
지난 2016년 8월 서강대 한 학과 단톡방에서 남학생들이 술에 만취해 잠든 여학생의 사진을 공유한 뒤 “여자냐? 과방으로 데려가라” “형 참아” “못 참는다” 등의 성희롱을 해 문제가 됐다.
같은 해 7월 서울대 남학생들도 단톡방에서 낯 뜨거운 대화를 쏟아냈다. 채팅방 안에는 여자 회원도 있었지만, 남학생들은 동기 여학생들의 사진을 올리며 “이 가슴 진짜일까”, “논평 좀 해봐라” 등의 성희롱적 발언을 여러 차례 했다. 또한 한 학생은 채팅방에서 “XX(남학생 이름)야 이 방에서 OO(여학생 이름)가 벌리면 할 거냐?” “여신?” “섹시행” 등의 발언을 반복한 것으로 드러났다.
2017년 6월 고려대에서는 남학생 8명이 단톡방에서 1년간 여학생을 상대로 성희롱한 것으로 알려져 논란이 됐다. 가해자들은 ‘새따(새내기 따먹기) 해야 하는데’ ‘술집 가서 X나 먹이고 자취방 데려와’ 등 성범죄를 부추기는 발언을 했다. 3월 동국대에선 남학생들이 단톡방에서 특정 여학생을 “야동(야한 동영상) 배우 닮았다”고 하거나 “잠실에서 교배시키자”라고 한 사실이 알려져 공분이 일기도 했다.
지난 2월 홍익대에선 남학생들이 단톡방에서 한 여학생을 언급하며 “여행 중이면 남자친구와 XX중이겠네” “XX하면 행복하겠다”라며 성희롱을 했다. 여학생 여러 명의 셀카 사진을 올리며 “X빻았다(못생겼다)” “XX 물리고 싶네”라는 발언을 하기도 했다.
피해자들은 정신적 고통을 호소하고 있다. ‘홍대 성희롱 단톡방’ 피해자는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평소 가해자들과 가족 같은 사이였는데 뒤에서 이런 행동을 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며 “가해자 처벌을 위해 카카오톡을 복구하거나 증거를 수집하는 과정에서 벌써 지친다. 다들 ‘죽고 싶다’는 말을 많이 할 정도다”라고 말했다.
그는 또 “만약 가해자들이 처벌을 받지 않거나 솜방망이 처벌에 그친다면 오히려 우리가 그들을 피해다녀야 하는 상황이 올까봐 두렵다”고 말하기도 했다.
◆가해자들 ‘솜방망이’ 처벌 받고 복학
하지만 피해자들의 우려와는 반대로 가해자들에 대한 처벌 수위는 사회봉사, 성평등 상담, 수개월 정학 등에 그치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가해자들은 휴학을 하거나 군대에 다녀온 후 일상적으로 학교 생활을 이어간 것으로 알려졌다.
성희롱을 한 경찰대생 B씨가 학교로부터 퇴학을 당한 후 “퇴학 처분은 비위 행위에 비해 과중하다”며 학교를 상대로 소송을 낸 사안에서 법원도 고소인의 손을 들어줬다. 서울행정법원 행정12부는 지난달 15일 퇴학 처분을 취소하라고 판결했다.
법원은 단톡방 성희롱이 징계 사유가 되는 것은 맞지만 퇴학까지 당하는 것은 과하다고 보았다. 재판부는 “B씨의 성희롱 언행은 평소 친하게 지냈던 남학생들로 참여자가 제한된 카카오톡방에서 이루어진 것”이라며 “성희롱 언행의 직접적 상대방에게 성적 수치심과 모멸감을 야기한 사건과는 성격이 분명히 다르다”고 했다. 그러면서 “B씨는 인격적으로 배움과 성숙 과정에 있는 어린 학생이므로 대학생 신분을 박탈하는 것보다 반성과 성찰의 기회를 갖도록 하는 것이 교육적으로는 물론 사회적으로 유의미하다”고 했다. 경찰대 관계자는 “법원의 판단을 존중하지만 퇴학 처분은 정당했다고 판단하고 있어 항소할 예정”이라고 전했다.
◆전문가 “대학생들 성희롱, 미투에 대한 사회적 인식 수준 보여줘”
이미경 한국성폭력상담소장은 12일 세계일보와의 통화에서 “올해 미투로 많은 사람이 사회의 변화를 온몸으로 외쳤다. 성희롱 가해자들은 이런 사회 분위기에 무감각했을 것”이라며 “그들도 ‘나도 미투는 알아’ 이렇게 얘기했겠지만 실제 자기 자신이 하는 행동이 어떤 것인지에 대한 인지와 성찰이 없는 것”이라고 꼬집었다.
이 소장은 또 “더군다나 대학생들은 많이 배우고 사회적 위치가 있는 사람들인데 무슨 잘못을 저지르지 못하고 있다는 건 법과 제도가 나아가더라도 사회적 인식이 따라오지 못하고 있다, 교육이 이를 뒷받침해주지 못하고 있다는 것의 방증”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성희롱 가해자들을 영구 배제하는 건 이상적이지 않다. 다만 그들이 진심으로 사과하고 변화했는지가 중요하다”며 “진심 없이 처벌과 징계가 주어지면 오히려 피해자에 대한 2차 가해 유인이 될 수 있다”고 우려했다.
이 소장은 이어 “대학가 성희롱 사태는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제발 개개인이 자기 자신을 돌아보는 게 사회 변화의 초석이 된다는 점을 다시 한 번 생각했음 좋겠다”고 말했다.
나진희 기자 najin@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