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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청년’의 죽음, 세상은 과연 얼마나 변했을까 [박태훈의 스토리뉴스]

전태일 · 김주열· 김경숙· 이한열의 경우...그리고 김용균씨
1994년 12월6일생인 24살 김용균씨는 컵라면 3개, 과자 한봉지와 때묻은 수첩을 남긴 채 지난 11일 외로운 죽음을 맞이했다. 고인은 설비 점검 도중 분탄을 제거하기 위해 몸통 하나 빠져나갈 만한 개구부를 통해 태안화력발전소 컨베이어 벨트를 살피다가 빨려 들어가 참변을 당했지만 사망 5시간 뒤에야 다른 이의 눈길을 받을 수 있었다.

우리들을 더 분노하게 한 것은 2년 전 서울 구의역에서 19살 김모군이 스크린도어에 끼어 삶을 마감했을 때 등장했던 '위험의 외주화', '죽음의 외주화', '원청 하청', '비정규 계약직' 문제가 고스란히, 아니 더 심각한 형태로 남아 있었다는 점이다.

구의역 김모군을 마지막으로 이런 헛된 죽음이 없도록 하겠다던 주변의 맹세가 결국은 헛말이란게 증명됐기 때문이다.

◆ '아름다운 청년의 죽음'은 그 가치를 사회가 앞장서 실현했을 때

10대 후반, 20대 초반의 꽃다운 나이에 불의에 맞서거나 아니면 참단한 현실에 갇혀 세상과 이별했을 때 우리는 '아름다운 청년의 죽음'이라며 애도한다. 죽은 뒤에 '아름다운~'이라는 말을 수만번 번 되풀이 해도 무슨 소용있겠는가 마는 그래도 그 죽음이 갖는 의미와 질서와 환경을 변화시키려 노력하겠다는 다짐으로 '아름다운~'을 입에 올린다.

어떤 아름다운 청년은 우리 정치 상황을 뒤집어 놓았고 또 어떤 청년은 죽음으로 대부분의 사람들이 깨닫지 못하고 있던 현실을 알려 주었다. 또 다른 청년은 허무하게 삶을 마쳤지만 사회가 그 뜻을 받쳐 주지 못해 지금까지 안타까움에 땅만 치고 있다 .
서울 종로5가 청계천 버들다리에 세워진 전태일 열사 동상. 연합뉴스
◆사회 변혁...전태일 열사, 유신 조종 올린 YH무역 김경숙

'아름다운 청년의 죽음'이라는 말은 서울 청계천에서 미싱을 돌리던 22살 전태일 열사로부터 비롯됐다. 가발업체 YH무역의 노동자였던 22살 김경숙 죽음 역시 노동운동사, 정치사에 한 획을 그었다.

전태일 열사는 17살에 청계천 미싱보조로 험한 세상에 발을 디딘 뒤 하루 14시간 이상 일을 하고도 저축 한푼할 수 없는 현실에 분노했다. 많이 달라는 것도 아닌 '내 몫을 그저 일부만이라도 제대로 돌려 달라'고 외쳤던 전 열사는 1970년 11월13일 평화시장 앞에서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를 외치며 분신했다.

그의 죽음은 지식사회에 엄청난 충격을 던졌다. 그의 죽음을 계기로 우리나라 노동운동이 처음 제모습을 갖추기 시작했으며 독재정권에 대한 저항, 민주주의 수호, 사회구조 전반에 걸친 고찰과 변혁을 몰고 왔다. 
1979년 8월 김경숙 열사 추도식 장면. KBS 캡처
박정희는 김재규의 총에 의해 18년 집권을 마감했지만 몰락의 실질적 출발은 1979년 8월 11일 YH무역 노조위원장 김경숙의 죽음이다. 가발제조업체인 YH무역 여성 노동자 170여명은 회사 정상화와 노동자의 생존권 보장을 요구하며 1979년 8월 9일 신민당 당사에서 농성에 들어갔다.

정권은 강제해산을 결정, 8월11일 제1야당에 경찰력 1000여명을 투입해 YH무역 여성 노동자들을 끌어 냈다. 이 과정에서 김경숙 위원장이 숨지고 노동자와 신민당 당직자 등 100여명이 부상 당했다. 김경숙 위원장 죽음이 충격을 받은 노동계는 야당과 힘을 합해 정권타도 투쟁에 돌입했고 이를 지휘하던 당시 김영삼 신민당 총재는 제명당했다. 김영삼 제명소식에 부산마산에도 격력한 시위(부마항쟁)가 벌어졌고 10·26으로 연결됐다. 
머리에 최류탄을 맞은 김주열군이 마산 앞바다에 떠 올랐다는 1960년 4월 12일자 부산일보. 최류탄을 맞은 김군 모습은 모자이크 처리했다. 부산일보 캡처
◆정치 변곡점...4·19 도화선 김주열, 군부독재 무너뜨린 박종철· 이한열

이승만 독재정권을 무너뜨린 1960년 4·19 혁명의 도화선은 4월 11일 마산상고 1학년 김주열의 죽음. 16세 김주열은 그해 3월 15일 자유당 정권 부정선거 규탄 시위에 참석한 뒤 실종됐다.

어머니가 고향인 남원에서 급히 마산으로 내려가 애타게 찾았지만 아들 소식은 없었다. 그러던 중 실종 27일만인 4월11일 김주열의 시신이 마산 중앙부두 앞바다에 떠 올랐다. 그것도 머리에 최루탄이 박힌 채 주검으로. 분노한 학생들과 시민들은 부정선거 규탄이 아닌 이승만 하야를 요구하며 들고 일어났다. 결국 4월 26일 이승만은 모든 것을 내려 놓고 청와대를 떠났다.

1987년 1월14일 24살 박종철 열사, 그해 6월 21살 이한열 열사의 쓰러짐은 군부독재 정권을 종식시키고 대통령 직선제를 가져오게 만들었다. 
박종철 열사 죽음에 분노한 학생들이 '종철아 잘 가 그래이'라는 문구와 함께 거리에 나섰다. 동아일보 캡처
서울대 언어학과 대표였던 박종철 열사는 1월14일 서울 남영동의 경찰 공안분실에서 물고문을 받다가 숨졌다. 이후 정권은 '책상을 턱하고 쳤더니 억하고 쓰러졌다'라는 희대의 변명을 늘어 놓았지만 분노한 국민들은 6월항쟁으로 맞섰다. 
1987년 6월 9일 경찰이 쏜 최류탄에 맞아 쓰러진 이한열 열사의 모습을 그린 걸래그림. 연합뉴스
6월항쟁이 절정을 향해 치닫던 6월9일 연세대 이한열 열사는 경찰이 쏜 최류탄에 머리를 맞고 혼수상태에 빠졌다. 이한열 열사가 최류탄을 맞았다는 소식은 숨죽이고 있던 넥타이부대까지 거리로 뛰쳐나오게 만들었고 군부독재 정권의 6·29선언을 받아냈다. 이 열사는 그해 7월5일 사망했다.

◆ '죽음의 외주화 NO’ 외친, 구의역 김군·김용균

2016년 5월28일 서울 지하철 2호선 구의역에서 일어난 19살 김모군의 죽음, 2년 6개월이 지난 2018년 12월11일 태안화력발전소에서 숨진 24살 김용균씨의 죽음은 너무 허망하다는 점에서 꼭 닮았다.
많은 시민들이 구의역 김군을 추모하는 글을 포스트 잇에 남겼다. 연합뉴스
구의역 김군은 내선순환 승강장에서 스크린도어를 혼자 수리하던 중 출발하던 전동열차에 치어 사망했다. 김용균씨도 혼자서 컴컴한 컨베이어 벨트를 살피다가 변을 당했다. 2인 1조 근무였다면 도저히 일어날 수 없는 일이었다.

컵라면으로 끼니를 때운 것도 비슷했다. 구의역 김군은 월 144만원을 받으면서 컵라면조차 제대로 못 먹을 정도로 중노동에 시달렸다. 김용균씨도 컵라면으로 지친 몸을 달래가면서 철야근무를 해야 했다.

구의역 김군과 태안화력발전소의 김용균씨는 모두 하청업체 직원, 그것도 계약직이었다. 김군 사망 1년 뒤인 2017년 7월 서울교통공사는 스크린점검 등을 담당하는 승강장 안전문관리단 170명을 무기계약직으로 채용했지만 그들은 김군이 간절히 원했던 정규직은 아니었다. 김용균씨는 문재인 대통령에게 비정규직이 1100만명에 이른다며 비정규직 철폐를 호소했다.
14일 고 김용균씨 측이 빈소를 찾은 이용선(왼쪽) 청와대 시민사회수석에게 김용군씨가 두달여전 비정규직 철폐를 호소하면서 대통령 면담을 요구했던 당시 사진을 설명하고 있다. 뉴시스
하지만 정치권은 여전히 미온적이다. 구의역 김군 죽음 당시 거대 정당이었던 새누리당과 더불어민주당은 사흘 뒤인 31일에서야 현장을 찾고 재발방지책 마련을 요구하고 약속했다.

김용균씨의 경우도 비슷하다. 민주당은 사망 이틀 뒤인 13일 "2인1조 원칙이 지켜지지 않은 죽음의 외주화였다"라는 비난성명과 함께 안전한 노동환경마련을 다짐했다. 자유한국당은 사흘이 지난 14일 "2년전 구의역 김군 사고와 닮았다"라며 정부의 대책마련을 촉구했다.

김용균씨 사망사건을 전후해 정치권의 관심은 '연동형 비례대표제'를 받느냐 마느냐, 그 경우 의석수가 늘어날 것인가에 쏠려 있었다.

박태훈 기자 buckbak@segye.com
머리사진=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