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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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분양행락도’ 병풍, 보존처리 덕분에 20년 만에 ‘햇빛’ [해외 우리 문화재 바로알기]

〈19〉 보존·복원 지원으로 새 생명 / 한국문화재, 中·日 것 비해 위상 낮아 / 수장고에 방치되다시피 하는게 현실 /‘문화재보호법’ 보존·홍보 지원 명시 / 매년 공모·접수 통해 지원 대상 선정 / 샌프란시스코亞미술관 미국 최초 / 한국미술 학예직·전시실 등 마련 / 나전칠기 우수성 조명 특별전 개최 / 대중까지도 한국미술에 높은 관심
올해 2∼11월 미국 필라델피아미술관은 전시회 ‘숨겨진 이야기: 최근 보존처리된 한국회화’를 열었다. 전시품 중 하나인 ‘곽분양행락도’ 병풍은 미술관이 기증을 받은 후 20년 만에 일반에 공개되는 것이었다. 수장고에서 잠자던 이 병풍의 나들이는 2015년 국외소재문화재재단의 지원으로 보존처리를 할 수 있었던 덕분에 가능했다. 같이 전시된 ‘봉화, 공작도’ 쌍폭 그림은 2008년 국립문화재연구소의 지원을 받았다.

전시품들을 본 많은 미국인 각자의 감상을 알 길은 없으나 분명한 것은 한국 문화의 위상과 품격을 높이는 데 기여할 소중한 자원을 우리가 또 하나 갖게 되었다는 점이다. 뿌듯해야 할 일이다. 그러나 한 번쯤 되새겨 보아야 할 대목이 있다. 해외의 박물관이나 미술관에 소장된 한국문화재가 소홀한 대접을 받는 경우가 많다는 사실과 이런 현실에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 하는 점이다. 
샌프란시스코아시아미술관 나전칠기 전시장 국외소재문화재재단 지원으로 보존처리된 나전칠기 4점이 출품된 샌프란시스코아시아미술관의 ‘맑은 빛, 고운 선: 한국 나전칠기의 아름다움’ 전시장 모습.
샌프란시스코아시아미술관 제공

◆중·일 문화재에 비해 소홀한 대접받는 한국문화재

해외 소재 한국문화재는 수량이 적은 데다 중국, 일본의 것에 비해 덜 알려져 있어 위상이 높지 않다. 이런 이유로 보존처리가 시급한 상태지만 수장고에 방치되다시피 하는 게 현실이다. 보존처리를 한다고 해도 문제가 생긴다. 회화를 예로 들자면, 한국회화를 전문적으로 다룰 수 있는 인력이 없다 보니 일본식 혹은 중국식으로 엉뚱하게 개장되어 정체성이 훼손되거나 우리나라의 전통재료 및 제작방법에 대한 이해와 보존기술이 배제된 채 처리되어 오히려 원형을 손상시키는 안타까운 일들이 발생한다.

‘문화재보호법’은 이런 문제에 대응하기 위한 규정을 두고 있다. 제69조의3에 재단이 국외문화재의 현황, 반출경위, 환수, 보호활용에 대한 조사·연구, 국외문화재의 취득 및 보전·관리 등과 함께 국외문화재 보존처리 및 홍보 지원, 외국박물관 한국실 운영 지원, 한국담당 학예사의 파견 및 교육 훈련 등의 사업을 하도록 명시하고 있는 것이다. 재단이 ‘국외문화재 보존·복원 지원 사업’을 시행할 수 있는 근거이기도 하다.

재단은 해마다 해외 한국문화재 보존·복원 지원을 공모·접수하고, 심사를 거쳐 지원 대상을 선정한다. 지원을 요청하는 대상은 회화 유물이 가장 많고 칠공예, 목가구 등도 적지 않다. 보존처리 과정과 결과를 공유할 수 있는 영상제작, 심포지엄 등 연계 활용사업도 지원하는데 2014년부터 지금까지 8개국, 18개 기관이 소장한 30건의 문화재가 혜택을 보았다. 아울러 예방보존 차원에서 해외기관 아시아 담당 보존전문가를 대상으로 ‘한국문화재 보존·복원 교육 워크숍’도 개최하고 있다.

최근 해외기관이 이 사업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한국문화재 고유의 보존처리에 대한 아시아 문화재 보존전문가들의 관심이 늘어나는 추세라 반갑다. 사장(死藏)된 문화재를 보존·복원하여 새 생명을 찾아 주고 전시를 통해 관람객들이 문화재의 역사적, 예술적, 학술적 가치를 즐기도록 하는 데 목적을 둔 해외 한국문화재 보존·복원 프로젝트의 성공 사례를 살펴보는 것은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을 것이다. 
‘곽분양행락도’ 병풍 출품 보존처리 후 새단장을 해 20년 만에 관람객과 만난 필라델피아미술관 소장 ‘곽분양행락도’ 병풍이 출품된 ‘숨겨진 이야기: 최근 보존처리된 한국회화’ 전시회 전경.
필라델피아미술관 제공

◆20년 만의 나들이 가능하게 한 보존처리 지원

필라델피아미술관 우현수 한국미술 큐레이터는 해외에서 처음으로 한국의 일반회화 유물 보존처리 프로젝트와 관련 전시를 기획했다. 앞서 소개한 곽분양행락도 보존처리 지원이 이 사업의 일환이었다.

이 작품은 1955∼1958년 주한미군으로 근무한 고 스티븐 맥코믹(1912∼2003) 대령이 2000년에 기증했다. 19세기 전반에 제작된 세부묘사가 돋보이는 작품이었지만 기증 당시부터 화면 일부가 손상되어 일반 공개를 하지 못했다. 곽분양행락도 보존·복원 프로젝트의 진행이 결정되면서 재단과 필라델피아미술관은 역할을 분담했다. 재단은 미르치과 네트워크의 기부금으로 보존처리비용과 국내 전시, 영상제작을 지원했고, 필라델피아미술관은 자체 기금으로 포장, 운송, 보험 및 행정비용, 현지 전시 등을 맡았다. 재단은 이 작품을 전면 보수를 했고, 후대에 개장된 장황도 고증을 통해 19세기 형식에 가깝도록 복원했다. 보존처리 중 배접지 해체 과정에서 1950년대의 한국 신문지가 발견되어 맥코믹 대령이 한국에 살았던 당시에 개장되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박지선 용인대 교수의 보존처리 후 이 작품은 스펜서미술관 소장 ‘곽분양행락도’ 2점과 함께 국립고궁박물관의 ‘미국 소재 ‘곽분양행락도’ 보존처리 특별공개전: 만복을 바라다’(2016년 12월13일∼2017년 2월5일) 전시회에서 관람객들과 만났다. 올해 필라델피아미술관 전시회에서는 ‘봉황, 공작도’ 쌍폭 그림, 필라델피아미술관 자체 재원으로 2010년에 보존처리한 ‘모란도’와 함께 전시됐다.

소장품을 새로 단장하고 관람객들에게 선보인 필라델피아미술관의 기쁨도 컸다.

우현수 큐레이터는 “곽분양행락도를 거의 20년 만에 일반에게 공개하게 되어 무척 보람을 느꼈다. 관람객들은 보존처리를 통해 밝혀진 뒷이야기에 큰 흥미를 보였다”며 “올해 재단의 지원으로 진행할 수 있게 된 ‘백동자도’ 보존처리 프로젝트도 기대하고 있다”고 말했다. 
독일 ‘보존·복원교육 워크숍’ 지난 7월 독일 상트 오틸리엔수도원 선교박물관에서 열린 ‘유럽 지역 보존처리 전문가 대상 한국서화문화재 보존·복원교육 워크숍’에서 재단 관계자들과 참석자들의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보존처리·인력양성 등 과제 산적…정부·기업 관심 커졌으면

샌프란시스코아시아미술관은 미국에서 최초로 한국미술 전문학예직과 단독 전시실을 마련해 한국의 미술과 문화를 미국에 소개하는 선구적 역할을 해왔다. 이곳의 김현정 한국미술 큐레이터는 미국 내에서 처음으로 한국 나전칠기 보존처리 프로젝트와 나전칠기의 우수성과 아름다움을 조명하는 특별전을 기획했다.

김현정 큐레이터는 해당 전시에서 나전칠기 전통작품 25점과 현대작품 5점을 선보였다. 이 가운데 나전칠기 4점은 2014년 재단에서 보존처리 비용을 지원했다. 이 유물들의 보존프로젝트를 위해 샌프란시스코아시아미술관의 보존연구부는 미국 내 동아시아 칠기공예 보존처리 전문기관인 게티 보존과학 연구소와 긴밀히 협력했다. 화학적 분광 분석 및 엑스레이 촬영 등의 분석을 통해 거북 등껍데기 아래에 금속 포일을 넣는 기법 등 지금껏 알려진 적이 없는 여러 제작기술이 확인되기도 했다.

재단 지원으로 보존처리된 나전칠기 4점은 ‘맑은 빛, 고운 선: 한국 나전칠기의 아름다움’ 전시회(2016년 4월29일∼10월23일)를 풍성하게 했다. 전시실에서는 4점의 보존·복원 과정을 설명하는 다큐멘터리 영상도 상영됐다. 관람객들은 “조선시대의 나전칠기를 미학적 가치가 있는 하나의 예술작품으로 감상할 수 있었고, 한국의 전통과 문화를 보존하는 방법에 대해 배울 수 있었다”고 평가했다고 한다. 김현정 큐레이터는 “2016년 5월에는 ‘새롭게 보는 한국 나전칠기’ 심포지엄에서 동아시아 칠기보존 분야의 전문가들이 모여 주요 주제들에 대해 심도 있게 토론했고, 참석한 일반 대중까지도 한국미술에 대한 높은 관심을 보였다”고 만족감을 표시했다.

샌프란시스코아시아미술관 소장의 조선시대 불교회화 ‘제석천도’와 ‘치성광여래도’의 보존처리 지원도 지난해 결정돼 작업이 진행 중이다. 이 불화들이 보존처리를 위해 한국으로 들어온 후 필자를 비롯한 재단 담당 직원들과 관련 전문가들이 보존처리 방법을 논의했고, 지금은 보존처리작업과 함께 영상을 제작하고 있다. 내년 1월 보존처리가 완료되면 2월 국내에서 오픈스튜디오로 공개되고 미국으로 돌아가 전시를 통해 선보일 예정이다. 2020년에는 재단과 샌프란시스코아시아미술관 공동 주최로 미국 지역 서화류 보존·복원 전문가를 대상으로 한 ‘한국 초상화의 보존·복원 교육 워크숍’과 심포지엄을 열려고 한다. 
차미애 국외소재문화재재단 조사활용1팀장

‘곽분양행락도’와 나전칠기와 같은 성공 사례를 늘려가는 것은 중국, 일본의 것에 비해 인지도가 낮은 한국문화재의 위상을 높이고 한국문화를 알리는 데 중요하다. 이를 위해 해외박물관 내 한국문화재 보존·복원스튜디오의 설립, 한국문화재 담당 큐레이터와 보존전문가들의 양성과 파견 등이 필수적이다. 하지만 재원과 인력 등의 부족 등으로 어려움이 많은 게 사실이다. 정부가 좀 더 적극적인 관심을 보이고, 기업의 후원이 많아졌으면 하는 바람이 크다.

차미애 국외소재문화재재단 조사활용1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