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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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인희의세상보기] ‘빚투’의 이면 ‘가족 공리주의’의 굴레

개인·가족의 완벽 분리 불가능 /‘부모 잘못 성공한 자식 책임’ / 연좌제 적용하듯 연예인 비난 / 너무 엄격한 잣대 아닌가 우려

가족이란 ‘무엇에 관해 말할 수 있는가’보다는 ‘무엇에 관해 말해서는 안 되는가’를 둘러싼 규범이, 보다 정교하게 발달돼 있는 제도라는 주장이 있다. 혼외자식 혹은 배다른 형제자매가 있다거나, 아내 구타 혹은 자녀 학대와 같은 가족 폭력의 희생자가 있다거나, 친족 간 상속 재산을 둘러싸고 송사(訟事)가 진행 중이라거나, 가족 중 누군가가 자살했고 누군가는 범죄자라거나 등은 가능한 한 숨기고 싶은 가족의 부끄러운 모습임이 분명하다.

 

그런가 하면 가족은 겉으로 드러나는 이미지와 실제 살아가는 모습 사이에 상당한 괴리가 존재한다는 의미에서 ‘문화적 위선’이라 불러도 손색이 없으리라는 주장도 있다. 누가 봐도 겉으로는 아무런 문제 없는 ‘정상가족’으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가족의 기능을 전혀 수행하지 못하는 ‘빈 조개껍데기 가족’은 이의 대표적 실례라 할 수 있다. 최근 마이크로닷을 필두로 유명 연예인과 그들 가족을 둘러싼 채 불거지고 있는 ‘빚투’ 현상을 보자니, 우리에게 가족은 과연 무슨 의미를 가지고 있을까 새삼 묻어뒀던 의문이 고개를 든다.

 

함인희 이화여대 교수 사회학

처음 ‘빚투’가 언론에 보도되기 시작했을 때 이를 바라보는 대중의 시선은 양가적(兩價的)이었다. 해당 연예인을 동정하는 입장에서는 ‘지금이 어느 시대인데 마치 가족 연좌제를 적용하듯 연예인을 비난하는 것은 온당치 않다’는 목소리가 나왔다. 반면, 해당 연예인의 부적절하고 때론 무책임한 듯한 대응에 불편함과 분노를 느낀 입장에서는, ‘어찌됐든 가해자가 있는 상황이니 법적 책임은 차치하더라도 연예인의 사회적 위상을 고려해 도덕적 윤리적 책임을 지는 것이 마땅하리라’는 주장을 내놓았다.

 

이 대목에서 주목할 만한 점은 한국에선 개인과 가족을 완벽하게 분리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일 것이다. 개인주의가 제도화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서구에서 프라이버시를 이야기할 때와, 개인과 가족이 공고하게 얽혀 있는 한국에서 사생활을 이야기할 때 그 의미가 동일하지 않음은 물론이다. 피차 누구 집 자식인지 알고 지냈던 전통사회와 비교해보면 지금은 익명적 개인이 모여 사는 도시적 생활양식에 익숙해지긴 했지만, 여전히 우리는 오롯이 개인으로 존재하기보다는 가족이란 맥락 속에 개인이 자리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여기에 더하여 ‘가족 공리주의’라는 우리네 특징이 ‘빚투’를 외치게 된 주요 원인 중 하나임을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으리란 생각이다. 한국의 가족은 가장이나 아들 때론 딸의 성공과 출세를 위해 가족 내부의 희소한 자원을 끌어모아 선택과 집중하에 투자를 하는 경향이 있다. 예전 장남의 성공을 위해 누나 혹은 여동생이 희생을 감수한다거나, 자녀의 성공을 위해 부부가 기꺼이 희생을 감수하는 등은 한국 가족의 공리주의적 성격을 전형적으로 보여주는 실례이다. 가족 누군가가 희생하고 헌신하며 양보하는 것은 먼 훗날 그에 상응하는 보상이 있으리라는 기대를 전제하기 때문이다. 낡은 이야기가 돼 가고 있긴 하지만, 아들 중에서 하나만 출세해도 부모의 안락한 노후가 보장되었기에, 아들을 일종의 노후 보험으로 간주한 부모들이 헌신적으로 투자했던 것이다.

 

상황이 이러하다 보니 성공한 자식이 부모를 나 몰라라 하는 것은 일종의 불효라 생각하는 인식이 자연스럽게 자리 잡았던 것으로 보인다. 연예인의 사회적 위상이 눈에 띄게 높아지면서 ‘유명 연예인=성공한 자녀의 상징’이 되고 보니, 잠재돼 있던 가족 공리주의 의식이 표면으로 떠오르며 작동하게 된 것이라 추측된다. 대중에게 이름이 알려진 연예인을 중심으로 ‘빚투’ 이슈가 제기되고 있음에서 이에 대한 심증이 굳어진다. 한데 ‘빚투’에 대한 해명이 시작되면서 덩달아 연예인의 숨기고 싶었던 가족사가 적나라하게 드러나기 시작했음은 예기치 않았던 슬픈 반전이라 하겠다. 지금까지 밝혀진 사연 중엔 부모가 이혼한 경우도 여럿 있었고, 어머니 사망 후 아버지와 연이 끊긴 경우도 있었고, 사정이야 어찌됐든 가족이 야반도주한 경우도 있었으니 말이다. 이런 종류의 사생활만큼은 굳이 대중에게 알려지길 원치 않았건만, ‘오직 연예인이라는 이유로’ 부끄러움과 수치심, 안타까움과 당황스러움을 감당해야 하는 현실은 일면 온당치 않다는 생각도 든다.

 

지난주 우연히 공중파에서 방영 중인 연예 프로그램을 볼 기회가 있었다. ‘빚투’의 의미를 조망해보는 그 자리에는 한 문화평론가가 초대됐다. 그는 “과거엔 터부시됐던 이야기가 이젠 표면 위로 올라오는 시대가 됐기에 연예인 자신도 이미지 메이킹을 넘어 인격 혹은 인성 메이킹에 힘써야 하리라”는 취지의 인터뷰를 했다.

 

그의 의견에 동의하면서도 유독 우리네 연예인에게 너무 무거운 가족의 굴레를 씌우는 건 아닌지 우려도 숨길 수가 없다. 가족과 결혼을 주제로 한 일명 관찰 예능 프로그램 속에서 연예인은 사랑과 행복이 넘치는 애정 공동체의 다채로운 이미지를 시연하고 있지만, 실제의 삶 속에선 그에 못지않게 미움과 갈등도 있고 분노와 좌절도 있음을 고려해야 할 것이다. 어쩌면 오늘의 ‘빚투’는 가족 공리주의가 뿌리 깊게 남아 있는 상황에서, 연예인을 향해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며 과도한 책임을 요구함으로써 야기된 안타까운 결과가 아닐까 싶다.

 

함인희 이화여대 교수 사회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