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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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몸으로부터 타인으로 가는 길 - 최은미 작가론 [신춘문예(문학평론)]

박신영
*이 글은 최은미의 소설집 『너무 아름다운 꿈』(문학동네, 2013), 『목련정전』(문학과지성사, 2015), 장편 『아홉번째 파도』(문학동네, 2017), 단편 「점등」(『현대문학』, 2017년 8월호)을 다룬다. 이후 인용할 시 작품명과 쪽수만 명기한다.

1. 응답을 기다리는 목소리들

여기 거듭 자신의 죽음을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최은미의 첫 소설집 『너무 아름다운 꿈』 속에 사는 이들이다. 울음은 두 번째 소설집 『목련정전』에 이르도록 계속된다. 이들은 자신의 내면을 헤집어 무엇이 자신을 그토록 아프게 하는지 묻고 또 묻는다. 거듭된 물음과 거듭된 대답은 출구 없는 세상에 균열을 내어, 고통 속에 살던 인물들로 하여금 바깥 세계를 상상하게 한다.
최은미의 소설 세계는 그 세계를 주조하는 방법이 있다. 문장을 반복하고, 인물을 반복하고, 플롯을 반복함으로써 세계를 만들어내고, 고통의 실체를 옭아매는 것이다. 두 편의 소설집에 수록된 열일곱 편의 단편소설에서 인물들은 저마다의 공간과 시간을 부여받지만 그들이 만들어내는 세상은 모양만 달리할 뿐 속살은 지옥이었다. 고통의 사슬은 작품을 건너뛰며 최은미 소설을 하나로 묶어낸다. 즙이 많은 아기를 낳아 팔다리를 자르는 상상이(「전곡숲」) 생식기만 온전한 기형아 출산으로 이어지고(「한밤」), 내 정액 어디 갔냐고 부르짖는 청년의 울음을 낳는다(「어느 작은」).
한 작품에서 다른 작품으로 모습을 바꾸어 나타나는 지옥의 세계 가운데에서 최은미 소설들이 끊임없이 회귀하는 지점에는 생명이 있다. 구더기나 곤충, 머릿니로 형상을 바꾸어가며 등장하는 생명체들은 모체가 감당하지 못하는 생명, 모체에게 죽임을 당하는 생명, 모체를 죽이는 생명으로 의미가 변형된다. 이 끝없는 행렬들을 우리는 더 이상 은유라 부를 수 없다. 은유로 생성되는 이름들은 가장 정확한 이름을 얻기 전까지 끊임없이 미끄러지는 환유이다. 끝없는 환유의 발걸음을 아무리 재게 놀려도 세계 밖으로의 탈출이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최은미의 인물들은 반복 속에서 당시의 고통과 공포를 영원히 재현해야 하는 저주에서 빠져나오지 못한다. 김형중이 최은미 소설에서 “이중 삼중으로 결정된 채 출구가 막혀버린 지옥의 모습”(김형중, 「미리 결정된 지옥에서」, 최은미, 『목련정전』, 문학과지성사, 2015, 351쪽)을 읽어낸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이다. 벗어나고 싶지만 벗어날 수 없는 반복은 과거의 기억이 아니다. 이것은 망각으로 사라지는 것들의 뒷덜미를 잡아끄는 손짓이다. 반복행위가 말하고자 하는 삶의 진실을 제대로 읽어낼 때 화자는 이 폐쇄회로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최은미 소설에서 나타나는 반복은 지옥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몸부림이다.
몸부림은 변화를 몰고 와, 『아홉번째 파도』와 「점등」에서 인물들은 제 안에 고정되었던 눈을 들어 타인의 존재에 시선을 둔다. 제 고통을 못 이겨 터트리던 울음은 이제 타인의 아픔에 공명하여 우는 울음이 되었다. 그러므로 2006년부터 2017년에 이르기까지 10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스무 편의 소설을 잉태하는 산고를 거치면서 최은미는 지옥 속에서 타인의 아픔에 조응하는 삶을 건져 올렸다.
이 세계들을 책으로 엮은 후, 작가는 편집자와 비평가에게 소회를 전한다. “왠지 두 분은 내 인물들을 이해해 주실 것만 같다.”(최은미, 「작가의 말」, 『목련정전』, 355쪽) ‘두 분은’이라고 했다. 분리 보조사 ‘은’ 뒤에는 이 인물들이 그간 이해받지 못했다는 함의가 숨어 있다. 그리고 또 한 겹, 문장의 심연 안에는 이해해줄 사람을 기다리는 인물들의 목소리가 웅크리고 있다. 그 목소리를 따라가다 보면 동일성의 반복 안에 변화의 조짐을 이끌어 내는 시선과 눈이 마주칠지도 모른다. 반복의 고리 속에 갇혀 버린 이들의 말이 복원될 때 영혼들은 발걸음을 멈추고, 아픈 다리를 주무를 수 있을 것이다.

그림= 이진하(화가)
2. 도착(倒錯)된 모성의 뫼비우스

최은미의 여성 인물들은 아프다. 수면장애를 앓거나, 자해충동에 사로잡히거나, 삶의 매 순간 환각에 시달린다. 일상을 휘저어 버리는 증상들로부터 도망가려 해보지만 언제나 원래의 자리로 붙들려 온다. 고삐를 쥐고 있는 이는, 자신이 얼마나 아픈지 무엇 때문에 아픈지 이야기하고 싶은 자아, 청자가 들어주기 전까지는 증상을 놓지 않을 자아이다. 화자는 내러티브를 풀어놓고는 이야기의 첫 번째 청자가 되어 제 이야기를 듣는다. 화자와 청자 사이를 오가며 만들어진 이야기는 같은 지점을 더듬고 또 더듬는다.
최은미의 첫 소설 「울고 간다」(2008)의 주인공, 영희는 일 년이 넘어가도록 만성 소화불량에 시달리고 있다. 일 년 전에 먹은 부침개가 가슴에 맺혀 있다는 이 신경증은 연인의 결별 통보 때부터 시작된 것이다. 엄마가 죽은 이후의 시간을 지켜준 사람, 내밀한 속사정을 모두 보여준 그이가 떠나가는 상황이니 앓을 만도 하다. 그러나 이 내러티브가 말하고 싶은 것은 연인과의 이별, 그 너머에 있다. 연인의 이별 선포는 이 모든 비밀의 핵심으로 독자를 데리고 간다.
“난 네가 락앤락 김치통에 뭘 넣어놨는지 다 알아. 넌 미쳤어.”(같은 책. 271쪽)
그가 견디지 못하는 것은 영희의 증상, 엄마의 유골을 김치통 속에 품고 있는 것이다. 엄마를 떠나보내지 못하는 딸의 삶은 모성에 귀속된 채 하나가 되어 있다. 엄마의 이름 대신 영희의 이름을 갖다 붙여도 무방하다. 그리하여 서술자는 엄마의 자리에 영희의 이름을 부려 놓는다. “영희는 아직 그 안에 살고”(255쪽) 있다.
딸이 엄마라는 환상에 흡착되어 있다면 연인은 현실적 상황 쪽에 서 있다. 혼자서는 살 수 없는 영희에게 연인이라는 현실원칙은 죽은 엄마를 품고 살도록 허락하지 않는다. 떠남과 떠날 수 없음 사이에 갇힌 영희의 가슴에 이별의 날 먹은 부침개가 가로막혀 있다. 내려가지 않는 부침개는 엄마의 또 다른 형상이다. 엄마를 소화시키지 않고서는 영희의 만성 소화불량은 낫지 않을 것이다. 영희는 엄마와 현실적 삶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손등뼈로 냉장고 문을 두드려본 뒤 영희는 냉장고 문을 연다. 그리고 착한 이불이라도 된 것처럼 몸을 접어 그 안으로 구깃구깃 들어간다.(최은미, 같은 책, 279쪽)

그는 결국 세상의 문턱에서 자궁으로의 회귀를 택한다. 인물의 내면은 엄마와 분리되지 못한 유아기의 한 지점에 서 있다. 앞으로 이어지는 최은미 소설에는 줄곧 딸의 삶에서 소화되지 않는 엄마의 존재가 숨쉬고 있다. 작품과 작품을 뛰어넘으며 존재하는 숨은 화자는 엄마를 이야기하고 또 이야기한다. 이 소설들이 말하는 엄마는 같은 듯 다른 모습으로 거듭 등장하고 있다.
「눈을 감고 기다리렴」(2010)의 은영은 꿈과 현실 사이에서 부유한다. 벼린 날로 이마를 찍어가며 현실에 발붙이려 애쓰지만 잠으로 끌려드는 데에는 속수무책이다. 강력한 잠의 방문과 함께 찾아오는 꿈속의 환영은 배 속에서 죽은 쌍둥이 자매 영이다. 꿈을 통해 나타난 목소리는 은영이 억눌러 놓은 과거를 불러낸다. 그 속에는 어린 은영의 생식기를 향불로 태우는 엄마가 있다. 죽은 아이가 한을 품고 잉태 능력을 앗아갈까 봐 두려운 어머니는 살아남은 딸을 제물로 바친다. 자장가로 딸을 재우던 엄마가 딸의 신체를 해하는 모습으로 나타나는 이 순간 공포감이 발생한다. 프로이트는 낯선 대상 속에서 일상적이고 친숙한 모습이 얼비칠 때의 섬뜩한 공포를 ‘Unheimlich’라는 독일어로 설명한다.(지그문트 프로이트, 「두려운 낯설음」, 『예술, 문학, 정신분석』, 정장진 역, 열린책들, 2016, 404쪽) 집(heim)에서 느끼는 친숙함을 반의어 표지(un)가 억압하고 있는 형국이다. 절대 내 것일 리 없다고 느꼈던 타인의 얼굴을 내 안에서 발견하게 될 때 우리는 이 정동을 느낀다. 향불을 든 엄마의 싸늘한 얼굴은 자애로운 미소로 존재하던 모성 판타지의 뒷면이다. 이제 모성에 덧씌워졌던 환상은 대를 이어야 한다는 이데올로기의 명령 앞에서 딸에게 위협을 가하는 실체로 폭로된다. 그것은 현실 위에 모습을 드러내서는 안 되는 비밀이기에 소설은 꿈의 환영을 빌리고 있다. 앞선 소설에서 자궁으로의 회귀를 염원하던 딸은 엄마의 섬뜩한 낯섦에 소스라친다.
「전임자의 즐겨찾기」(2009)에 이르러 모성은 이제 생명을 낳고 죽이는 반복행위에 갇힌다. 어미 물고기의 배를 비틀어 치어를 부화시킨 후, 독약 풀기를 반복하며 잉태와 죽음 사이를 오가는 주인공 장수영의 강박은 과거 사건의 현장으로 자아를 불러들인다. 그 속에는 아이를 낳고 버렸던 십대의 주인공이 있고, 어린 딸의 출산을 방치한 엄마가 있다. 자식을 유기한 엄마로서의 서사와 방치된 아이로서의 서사가 주는 죄책감과 공포를 자아는 이겨낼 수가 없다. 그리하여 수영은 증상과 현실 사이의 길목을 떠돈다. 그의 떠돎은 어머니의 자리에서, 그리고 딸의 자리에서 겪어야 했던 고통의 실체를 들려주고 있다.
돌아가고 싶은 유토피아에서, 생명의 원천으로, 죽음의 위협으로 변주를 거치며 모성의 면면을 탐색한 소설은 이제 모성이 제 몸에서 잉태된 생명을 왜 죽일 수밖에 없는가의 문제 앞에 선다. 「비밀동화」(2010)는 그에 대한 답을 찾고 있다. 이 비극적인 이야기의 한가운데에는 어렵게 얻은 사랑이 허상이었음을 자각하는 여인이 있다. 여인은 부모의 세계를 떠나 진리를 찾아 헤매는 탐구자이며 자유인이다. 결핍된 모성의 품을 떠도는 이전의 여성들, 영희, 은영, 수영의 어린 자아가 성장한 모습이다. 공부하는 삶을 희구하는 여자는 진리의 길을 함께 걸어갈 영혼의 동반자를 만난다. 사랑을 반대하는 그 어떤 장애물도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정작 문제는 사랑을 성취하자 발생한다.

아빠와 살기 전에는 탑이 있는 고대도시를 돌아다니며 공부를 하던 엄마는 아빠와 살고부터는 경전 한 구절도 읽지 않습니다.(최은미, 같은 책, 28쪽)

한곳을 바라보며 걷던 연인의 삶에 균열이 발생한다. 여인에게 학문과 진리를 향한 불꽃을 꺼뜨려야 하는 삶이 펼쳐진다. 그의 손에는 탐독하던 경전 대신 열무단과 아이 둘이 매달려 있다. 이 여성에게 사랑은, 나아가 결혼은 남편의 여자, 아이들의 어머니가 되어야 하는 과정이다. 결혼과 함께 새로운 이름을 얻는 순간 평생을 염원했던 자아상은 죽임을 당한다. 이제 엄마라는 이름은 온 존재를 붙들고 늘어진다. 열무단같이 무거운 삶이 흘러내린다. 여자는 자신을 죽이면서 울고, 쉬이 죽어지지 않는 자신을 보면서 또 운다.
통곡하는 여성들의 삶 앞에서 이제 내러티브의 시선은 인간의 기원을 더듬는다. 「전곡숲」(2011)에 이르러 인물은 인류 역사에 대고 왜 이렇게 고통스러운가. 언제부터 그랬는가 라는 질문을 던진다. 구더기를 만들고 죽이면서 이 이야기의 딸이 노려보는 것은 잉태와 죽음 사이에서 도착(倒錯)된 모성이다.
그에게 생명은 자연의 신비도, 축복도 아니다. 그것은 징그러운 그 무엇, 죽음이다. 잉태와 죽음의 짝은 몸에서 시작되었고, 우리 모두는 몸을 갖고 태어나기에 끊어지지 않는 사슬로서 역사를 이어간다. 그리하여 이 여성이 잉태와 죽음의 의식을 치르는 공간 또한 여자의 생식기관이다.

지진이 갈라놓은 틈새처럼, 넓고 평평한 대지 사이에는 현무암 절벽이 거대하게 파여 있었다. 이십여 만 년 전의 용암이 굳어 생긴 절벽이었다. 협곡 사이로는 ‘검고 큰 강’이 흘렀다. 물줄기는 곳곳에 여울과 소와 폭포를 만들었고 그 틈새에 크고 작은 숲들이 생겨났다. 그러므로 숲은 대지 위에 솟은 숲이 아니라 대지 사이의 틈에 숨어 있는 숲이었다.(최은미, 「전곡숲」, 『너무 아름다운 꿈』, 문학동네, 2015, 192쪽)

이 숲에서 딸은 자기 몸의 욕망을 감지한다. 몸의 욕망은 덫이다. 몸이 주는 열락은 여성들에게 자신을 소유하라고 유혹하지만 건드리는 순간 죽을 때까지 덫에 걸린 삶을 살아야 한다. 그리하여 욕망은 자신도 누군가의 어머니가 될 것이라는 모성 공포증으로 다가온다.(아드리엔느 리치, 『더이상 어머니는 없다』, 김인성 역, 평민사, 1995, 292쪽) 욕망과 죽음 사이에서 번민하는 딸을 가장 잘 아는 이는 같은 몸으로 생을 산 이, 어머니이다. 시간대를 달리한 채 같은 플롯을 걸어가는 어머니가 딸에게 들려주는 이야기는 인간의 역사를 가리킨다.

전곡은 분명히 해마다 돼지고기를 쌓아놓고 구석기축제를 벌이는 곳이었다. 우리가 숲에서, 계곡에서, 이 대지 위에서 겪은 일들이 진짜가 아니라고 반박할 여지가 없었다. 누나는 몇 십만 년의 진화를 몇 주 만에 겪어버린 것처럼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최은미, 위의 책, 204쪽)

이 땅에는 구석기 시대부터 사람이 살아온 역사가 있다. 여자들은 지금껏 불을 피우고, 밥을 해 먹이고, 아이를 낳으면서 그렇게 살아왔으니 그만 체념하라고 엄마는 말한다. 그러나 딸은 용납할 수 없다. 잉태와 죽음의 길목을 오가는 그 삶은 바꾸어야만 하는 플롯이다. 딸은 이 숲에서, 그리고 이 삶에서 벗어날 유토피아를 찾는다. 그곳은 최초의 역사가 시작되었던 시간대, 그리하여 역사를 다시 쓸 수 있는 구석기 시대이다. 몸의 욕망에 화답해도 되는 곳, 잉태와 죽음 사이에 가로놓인 외길 바깥으로 나아갈 수 있는 통로이다.
그러나 그리스어 ‘u’(없다)와 ‘topos’(장소)의 결합에서 온 이 말, 유토피아는 애초에 현실에 없는 공간이다. 구석기인의 형상으로 유토피아를 찾아 헤매던 딸은 울음을 터트린다. 욕망과 금기의 한계를 떠날 수 있는 곳, 이 세상 어디에도 찾을 수 없는 곳, 그것은 다만 ‘유토피아’라는 사실 앞에서 울음을 운다.
소설은 자꾸만 반복한다. 한 텍스트에서 다른 텍스트로 건너가면서도 같은 단어를 반복하고, 같은 모티프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반복을 거듭하는 지점에는 자아를 장악하는 고통의 상처가 가로놓여 있다. 인물들이 발걸음을 멈춘 환부에는 생명, 잉태, 죽음이 있다. ‘지옥의 군상들’이라는 말로 요약되는 그 인물들은 다름 아닌 여성이었다. 이들은 생명을 잉태하는 몸이면서 잉태와 더불어 자아의 죽음을 경험해야 하는 몸이며, 더불어 자기 죽음의 체험을 딸에게 물려주는 몸이다. 몸으로부터 비롯되는 삶의 질곡에서 이들의 신음소리가 새어나오고 있다. 

그림= 이진하(화가)
3. 균열의 틈으로 세계를 넘어

피터 브룩스는 화자의 이야기 행위와 청자의 듣기 행위가 내러티브에 끼치는 영향을 강조한다.(피터 브룩스, 『플롯찾아읽기』, 박혜란 역, 도서출판 강, 2011, 332쪽) 청자의 해석 행위는 다시 화자에게 반추됨으로써 내러티브의 의미는 말하기와 듣기 과정 안에서 재탄생한다. 분석가와 피분석가의 대화를 바탕으로 하는 정신분석 치료 메커니즘에서 착안한 이 아이디어는 최은미의 소설을 이야기하는 데에도 소용된다. 화자-저자가 모성을 이야기하고 나면 청자-저자가 다시 자기 이야기의 분석가가 된다. 분석을 거친 이야기는 원텍스트가 감추고 있던 의미를 찾아낸다. 새로이 찾아낸 의미는 은폐된 기억을 들추어내는 퍼즐조각이 된다. 이야기 행위와 분석 행위가 오가면서 숨겨진 퍼즐은 하나씩 제 모습을 드러내고, 새로 얻은 퍼즐은 점차 완성된 서사를 만들어간다. 그리하여 같은 지점을 떠돌던 최은미 소설은 이제 비동일성의 반복을 통하여 세계를 확장해 간다. 지옥이기만 했던 최은미의 내러티브는 변태(變態)를 준비하고 있다.
「근린」과 「라라네」는 두 번째 소설집 『목련정전』(2015)에 수록된 작품이다. 모성회귀를 열망하던 첫 작품으로부터 6년이 흐른 시점에 창작된 이 소설들에는 새로운 인물들이 등장한다. 비명을 지르던 어머니와 딸의 모습 뒤로 다양한 연령의 여자들이 오간다. 어머니와 유대 관계를 맺는 딸이 등장하고, 어떠한 억압도 받지 않은 채 성적 욕망을 분출하는 노년기의 여성이 있다. 엄마가 만들어낸 지옥의 세계에서 죽음을 맞던 딸은 엄마의 세계를 박차고 나가 제 삶을 찾는 듯하다.
「근린」은 추락한 무인정찰기로 인해 한 여성이 죽게 되는 사건으로부터 시작된다. 피해 여성은 이 공원을 자주 이용하는 60대 여성들, 회색 후드티, 아이 엄마, 중년 여성 중 한 명이다. 지금까지 최은미 소설에서 줄곧 등장했던 모성적 삶의 계보를 따른다면 죽음의 당사자가 누구인지 추측할 수 있다. 무인 정찰기의 추락 전부터 죽음 속에서 살던 이, 아이 엄마이다.

여자는 나무줄기에 등을 기댔다. 땀과 습기로 후줄근해진 여자의 몸에서 김이 올라왔다. 여자는 배란기 때마다 몸을 자해해왔다. 그 끔찍한 몸의 작용들을 이제 나무가 거두어줄 것이다.(최은미, 「근린」, 『목련정전』, 문학과지성사, 2015, 154쪽)

여자의 죽음 행위는 생명 잉태와 관련될 때 혹독해진다. 배란기 때마다 자기 몸을 파괴하는 이 여인은 동자개 치어를 죽이던 장수영(「전임자의 즐겨찾기」)이고, 구더기를 으깨는 누나(「전곡숲」)이다. 이 여인이 자해하는 것은 잉태의 가능성을 품고 있는 것으로서의 몸이다. 아내와 어머니의 이름 이외에는 갖지 못하는 삶, 오직 모성이기만을 요구당하는 이 여성이 붙들 것은 죽음밖에 없다. 지금까지 수없이 그려왔던 지옥 속의 여성이다.
그러나 「근린」의 화자는 죽음을 사는 여성 너머에 시선을 둔다는 점에서 모성의 양가성 사이를 오가던 이전 소설의 화자와 대별되는 지점이 있다. 그곳에는 죽음이 진행되는 중에도 사랑을 갈구하는 요양원 커플과 육체적 관계를 희구하는 여성 노인들이 있다. 그간 불행의 근간이기만 했던 여성의 몸이, 사랑의 열락을 주는 몸으로 다시 태어나고 있다.
이리가레는 여성은 자신의 신체와 성적 쾌감을 자각하고 이를 표현함으로써 자의식이 발현된다고 했다.(앤 로잘린드 존즈, 김효, 「몸으로 글쓰기: 여성적 글쓰기의 이해를 위하여」, 『한국여성연구소 기타간행물』, 1990.01, 176쪽) 배란기마다 자해하는 저 여인은 자기 몸을 부정한다. 여성으로서 그의 삶은 세계의 억압에 잠식당한 채, 독립된 존재로서 피어나지 못하고 있다. 반면 그 어떠한 억압도 없이 몸의 욕망을 누리는 이 노인들은 주체적 삶의 길목에 들어서는 새로운 여성상이다. 이들이 누리는 것은 「전곡숲」의 딸이 그토록 찾아 헤매던 유토피아적 삶이다. 시선의 확장은 소설의 공간을 통해 다시 한 번 제시된다.

그들 뒤로 비안개에 휩싸인 아파트 단지의 불빛이 펼쳐졌다. 총 24개 동 2000세대의 불빛이 풍등처럼 떠오르다 허공 속에서 점멸했다. 그중 서른일곱집의 여자들이 아이를 보며 말했다. “우리……같이 죽을까?” 그날 밤 한 집에서 그 말을 행동으로 옮겼다.(최은미, 같은 책, 148쪽)

2000세대의 아파트는 기존의 여성적 고통 너머에 있는 공간이다. 아이와의 죽음을 실행하는 여자가 한 명 있다면, 그 너머에는 고통을 안은 채 살기로 한 서른여섯 가구가 있고, 그 너머에는 또 다른 생을 사는 1963세대의 세계가 있다. 온통 지옥인 줄만 알았던 세상 속에 다른 세계가 있음을 발견하는 순간이다.
이는 최은미의 내러티브가 지옥세계를 거듭 반복한 끝에 거두어들인 결과이다. 고통을 삼키며 거듭 세계의 원상에 의문을 던지던 이야기 행위와 해석을 통해 답을 찾아가는 듣기 행위 속에서 새로운 내러티브 의미가 발견되는 것이다. 세계 밖의 세계는 최은미 소설 전체를 주관하고 있는 목소리가 아이와 함께 죽으려는 저 젊은 어머니에게 보여주고 싶은 세상이다.
같은 해 여름에 발표된 「라라네」는 또 한 번의 변화를 시도한다. 미래 세대로서의 딸이 등장하여 어머니에게서 딸로 향하던 대물림의 세계를 박차고 나가는 것이다. 바깥을 향하던 「근린」의 시선이 이제 실천적 행동으로 이어지고 있다.

라라를 보신 적이 있나요? 키 110센티미터에 몸무게 17킬로그램. 분홍 파자마 차림에 맨발입니다. 금발머리 마론 인형을 안고 있을 거예요. 10초에 한 번 정도는 머리를 긁을 겁니다. 라라의 머리카락 길이는 50센티미터, 라라는 구불거리는 머리카락을 허리까지 늘어뜨리고 있습니다. 옆쪽을 쥐가 조금 파먹었어요.(최은미, 「라라네」, 『목련정전』, 문학과지성사, 2015, 51쪽)

위는 「라라네」의 첫 장면이다. 내러티브의 욕망은 소설 첫 문단에 결집되어 있다던 피터 브룩스의 주장에 기대본다면(피터 브룩스, 같은 책, 72쪽) 이 소설의 주인공은 단연 라라가 될 것이다. 아직 세상의 이데올로기에 학습되지 않은 라라는 자신을 지켜내기 위해 어머니의 세계를 박차고 나가는 인물이다. 이 아이가 고수하기 위해 분투하는 머리카락은 구석기 시대부터 이어져 내려오는 여성적 몸의 상징이다. 쥐 파먹은 형상의 머리는 훼손된 삶을 살고 있는 어머니의 자기 파괴적 행위의 결과이며, 라라의 사라짐은 자신의 불행을 빌미로 딸의 삶을 재단하려는 모성에 대한 단호한 거부를 의미한다.

“여섯 살짜리가 벌써부터 밝히면 나중에 뭐가 되려고 그래. 너 중학교 교복 벗기 전에 임신하고 싶어? 다른 애들은 학원 찾아다닐 때 낙태할 병원 찾으러 다닐래? 너 살인자 되는 거야.”(최은미, 같은 책, 74~75쪽)

어머니는 라라의 자위 습관으로 형상화된 딸의 성적 욕망을 용납하지 못한다. 그가 라라를 위협하기 위해 꺼내놓은 이야기는 성행위-임신-낙태-죽음으로 이어지는 자기 삶의 역사이다. 분석심리학에 따르면 독일 민담 「라푼첼」의 마녀는 딸의 성장을 두려워하는 어머니를 상징한다. 불안과 억압 속에 갇혀 살았던 어머니는 딸에게 자신이 살아온 것과 똑같은 방식의 세계를 부여하고 이로써 딸, 라푼첼을 감금하기에 이르는 것이다.(오이겐 드레버만, 『어른을 위한 그림 동화 심리 읽기 1』, 김태의 역, 교양인, 2013, 348쪽) 전나경에게 딸의 자위는 죽음과도 같은 자기 삶의 반복을 예고하는 행위이다. 불안에 질식된 그는 라라의 탐스러운 머리카락을 그러잡는다. 어머니가 들이대는 향불에 속절없이 비명을 지르던 은영이(「눈을 감고 기다리렴」) 재탄생하려는 순간이다. 그러나 라라는 성을 나가버림으로써 반복된 삶의 고리를 잘라낸다. 어머니의 고통을 대물림 받던 딸은 내러티브의 반복과 변주 끝에 성장 가능성이 차단된 삶의 공간, 라푼첼의 탑에서 벗어난다.

4. 당신의 자리를 내어주다

지금까지 고통에 질식된 채 자신의 몸과 욕망을 혐오하던 여성 인물들은 상대를 돌아볼 여력이 없었다. 그러나 『아홉 번째 파도』(2017), 「점등點燈」(2017)의 여성들은 이전과는 다른 인물들이다.

내 몸이 느끼고, 내가 느끼는 걸 그가 알고, 그렇게 서로를 움켜잡던 순간의 만족감. 송인화는 윤태진과 그런 순간을 나누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너무도 좋았던 그 순간들이 순간의 즐거움만으로 그치지 않고 어떤 결과를 가져온다는 게 송인화는 불가사의한 벌처럼 느껴졌다.(최은미, 같은 책, 152쪽)

『아홉 번째 파도』(2017)의 송인화는 자기 몸에서 얻는 기쁨을 언어로 표현해냄으로써 몸으로부터 오는 충만감을 의식하고 있다. 이제 최은미의 인물은 자신의 것이었으나 고통의 원인 혹은 혐오의 대상이기만 했던 몸을 다른 시각으로 인식하고 있다. 송인화 역시 욕망의 결과로 따라붙는 임신에 대해 회의를 품는다. 그러나 그것은 감정의 분출이 뒤섞인 절망이 아니라 아이러니를 품고 있는 삶의 단면을 바라보는 담담한 시선이다.
최은미의 여성들이 겪는 고통은 모성적 삶과 모성 이전의 자아의 삶이 공존하지 못하는 데에서 발생하며 그 뿌리는 남성중심의 모성 이데올로기에 있다. 그러므로 사건을 전개하는 데에 있어서 체제 내의 강자로 존재하는 남성과 여성이 대결구도로 등장할 법도 하지만 소설은 남녀의 대립구도를 최소화하며 고집스레 남성의 자리를 배제한다. 「창 너머 겨울」(2013), 「백일동안」(2013), 「어느 작은」(2014)에 남성 주인공이 등장하나, 유전자 번식에 대한 욕망에 사로잡힌 그들은 여성들에게 타자로서, 응시의 대상일 뿐이다. 나머지 남성 인물들은 연인 및 동료(「전임자의 즐겨찾기」, 「울고 간다」), 동생(「비밀 동화」, 「전곡숲」)으로, 여성 인물의 서사를 뒷받침하기 위한 존재로 머문다. 남성과의 관계에서 비롯된 증상임에도 불구하고 여성들은 혼자서 앓거나, 어머니 혹은 딸과의 갈등 속에서 자기 삶의 문제로 끌어안는다.
이리가레는 가부장제 아래의 성차는 생물학적인 욕구나 재생산을 위한 기능적 차이로 치부될 뿐, 타자를 향한 욕망의 관계에서 사유된 적이 없음을 지적한다.(황주영, 『뤼스 이리가레』, 커뮤니케이션북스, 2017, 48쪽) 앞서 출판된 두 편의 소설집에서 남성들은 성적 욕망의 파트너이거나 잉태의 한 축을 담당할 뿐 여성들과 삶을 나누는 관계를 맺지 못함으로써 남녀의 성은 기능적 차이로 존재한다. 그러나 『아홉번째 파도』의 송인화와 서상화는 개별적인 주체로 만나 삶을 나누며 서로를 열망하는 연인으로, ‘타자를 향한 욕망의 관계’를 맺는다.
공동체에 대한 사유를 펼친 철학자 장 뤽 낭시는 개인의 폐쇄성을 넘어서는 방법으로 “동일자가 타자로, 동일자가 타자로 인해, 또는 동일자가 타자에게 향해 있거나 기울어져”(장 뤽 낭시, 『무위의 공동체』, 박준상 역, 인간사랑, 2010, 26쪽) 있는 상태를 제안한다. 닫아 건 빗장을 풀고 내가 당신에게, 당신이 나에게 열려 있는 상태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간 최은미 소설이 사랑에서 오는 고통을 이야기하면서도 그 대상인 남성의 존재를 삭제한 것은 고통을 앓는 이들이 폐쇄된 개인으로 제각각 존재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홉 번째 파도』의 인물들은 서로에게 서로를 노출시키고 있다. 그렇기에 송인화는 서상화의 이름을 “푸른 하늘 은하수를 잘하는 상화, 샤파 연필깎이를 십 년 동안 고쳐 쓴 상화, 임연수 김밥을 좋아하는 상화 … 여덟 평짜리 약국에서 소아용 시럽을 따르며 살 수도 있었을 상화”로 부를 수 있는 있는 것이다.
우리는 타자의 죽음을 경험할 수 없다. 그러나 이제 타인을 향해 돌아선 최은미의 인물들은 실패할 것을 알면서도 타인의 죽음을 제 안에서 재생하려 애쓴다. 다음은 연인의 죽음을 대하는 「점등」의 여성 주인공, 안의 이야기이다.

신을 보내는 짧은 의식이 끝나고 안 앞에 남은 건 신을 이해해야 하는 기나긴 시간이었다. 가까운 사람이 한 그 엄청난 선택을 되짚어가는 것은, 그가 혼자 그런 결정을 하고 그걸 정말로 실행하기까지의 마음 상태를 따라가는 것은 두려웠을 것이 분명한 그 순간을 반복해 떠올리는 것은 남은 사람에겐 형벌과도 같은 고통이었다. 안은 지난 1년간 그 과정을 수없이 되풀이했다. 30년이고 40년이고 죽을 때까지 그 과정을 반복하리라는 것도 알았다.(최은미, 「점등點燈」, 『현대문학』, 2017. 8월호, 74쪽)

‘안’은 연인 ‘신’의 자살 앞에 망연자실해 있다. 어떠한 예고도, 암시도 없었던 연인의 자살 앞에서 안이 선택한 행위는 신의 행적을 그대로 따라 밟는 일이다. 그 길에서 자신이 알지 못했던 연인의 삶의 무게를 자기 삶 위에서 재생시키고자 한다. 그것이 홀로 남은 안이 죽은 연인을 이해하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의 전부이다. 신에게는 영혼이 메말라 있었던 때에 곁을 지켜준 형이 있다. 그러나 그는 신이 성인이 되자 출가하여 소식을 끊는다. 혼자 남은 신의 삶은 말없이 떠나버린 형을 이해하기 위한 시간으로 채워진다. 자신을 두고 떠난 이의 마음을 이해하는 일, 실패로 끝날 것이 자명한 그 일에 투신하던 신이 그랬던 것처럼, 안은 신을 이해하기 위해 마음을 모은다. 혼자 결정해 버린 연인의 죽음, 그것을 이해하는 일 또한 애초에 불가능해 보인다. 그러나 안은 신이 경험한 마음의 결을 더듬어간다. 형의 족적을 밟아가며 느꼈을 그의 외로움, 두려움이 제 안에 그대로 반복되기를 기도한다. 죽음의 세계를 끝없이 맴돌며 그저 지금의 고통이 앞선 고통과 조금이라도 다른 것이기를 희구하던 최은미의 인물이 이제는 타인의 고통을, 한 치의 어긋남도 없는 반복으로 경험하기를 염원하고 있다. 등가성에 가까운 반복에 성공할수록 안의 고통은 클 것이다. 그러나 그는 기꺼이 고통을 끌어안는다. 타인의 존재는 최은미 소설에 드러나는 반복의 성격을 바꾸어 놓았다. 이제 그 반복은 벗어나고 싶은 행위가 아니라 한 발짝 더 다가들고 싶은 세계이다.

5. 반복 뒤에 남겨진 것들

최은미 소설은 생명과 몸이라는 화두로부터 시작되었다. 여성들에게 몸의 욕망은 잉태로 이어진다. 이 여성들은 생명을 축복으로도, 신비로도 경험하지 못하고 오직 욕망을 참지 못한 대가로 맞는다. 그것은 엄연히 존재하고 있는 모성 이전의 자아에게 죽음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이들은 모성이 됨과 동시에 제 몸의 욕망을 부정하고, 죽은 몸이 되어 삶을 체념한다. 몸을 가진 주체로 태어난 이들은 몸이 주는 기쁨이 공포로 돌아오는 생의 아이러니에 골몰하느라 잉태와 죽음 사이를 오가는 반복강박에 빠져들었다. 그러나 반복을 통해 지옥의 세계를 탐색하는 시간이 더해감에 따라 소설은 또 다른 삶의 가능성을 제시한다. 『아홉번째 파도』를 쓴 후 저자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의 표정을 이해하려고 애쓰는 동안 저는 그를 사랑하게 되었습니다.”(최은미, 「작가의 말」, 『아홉번째 파도』, 문학동네, 2017, 367쪽)
지옥의 형상을 그려내던 저자가 이제 사랑을 이야기한다. 열여덟 편의 단편과 한 편의 장편을 그리는 동안 저자는 그 모든 내러티브의 화자가 되어, 또한 제 이야기의 청자가 되어 여성들의 삶을 이야기하고, 듣고, 다시 이야기하였다. 「전임자의 즐겨찾기」에서부터 「근린」에 이르기까지 이들 여성은 잉태와 죽음 사이에 가로놓인 길을 강박적으로 오가는 동안 그들의 고통은 이전의 고통과 이후의 고통에 차이가 없는, 등가성에 가까운 반복으로 재현되었다. 그러나 「근린」에 이르러 반복을 응시하는 시선은 고통 너머에 있는 세계를 발견한다. 시선은 자신 아닌 다른 여인들의 삶과 욕망을 바라보기 시작하면서, 절대적 타자였던 남성을 제 옆자리에 세우고, 함께 사랑하고 함께 아파하는 관계맺음을 하고 있다. 이 일련의 과정을 거치는 동안 세계는 지옥에서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는 곳으로 변했다. 세계가 조금씩 변해가는 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사랑을 이야기하는 저자는 소설을 쓰는 동안 “이해하려고”(367쪽) 애썼다는 고백을 남긴다. 그의 결론은 이해하려고 애를 쓰니 사랑하게 되더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간 고통을 그러안고 울부짖는 여성적 삶을 그려내고 또 그려내는 반복행위 역시 이해에 다가가기 위한 몸짓이었다고 할 수 있겠다. 이들 여성의 족적을 밟으며 저자는 묻는다. 이 엄마들은 왜 이렇게 죽고 싶어 하는가. 딸들을 왜 이렇게 괴롭히는 것인가. 딸들은 엄마의 삶을 벗어날 수 있는가. 물음은 상대에게 다가가기 위한 몸짓이다. 저자의 물음 속에서 내면으로만 향하던 인물들은 어느새 가슴을 벌려 타인을 향해 돌아선다. 그리고 사랑을 하게 되었다는 작가의 말처럼 인물들 또한 타인에 대한 사랑을 품는다. 이 모든 일은 죽음의 고통을 반복하고, 반복하는 자아를 응시하고, 응시하면서 앓기를 반복하는 사이 일어났다.
이리가레는 어머니와의 분리에서 오는 상처는 어머니와의 관계를 반복적으로 표상하고 재현함으로써, 돌이킬 수 없는 상실을 대신할 수 있다고 말한다. 첫 소설 「울고간다」에서 영희가 선택한 냉장고행은 모성으로의 회귀였다. 그의 행적을 두고 퇴행이 아닌가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원초적인 세계로 돌아간 그들은 그곳에서 내면을 성장시키고, 홀로 설 수 있는 힘을 다진다. 그리하여 『아홉 번째 파도』와 「점등」의 세계가 도래했다. 이들은 다친 자아를, 나아가 다친 타인을 품어 생명을 길러내는 주체적인 모성으로 돌아왔다. 이제 다시 울게 된다 하더라도 그네들은 각자의 울음을 울지 않을 것이다. 그들의 울음은 부둥켜안고서 우는, 함께 우는 울음이 될 것이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