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끝에 이르면 낭떠러지나 엄청난 규모의 폭포를 만나 끝없이 추락할 것이라고 믿던 때가 있었다. 과학기술이 발달하지 않은 당시만 해도 세상의 끝은 막연한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지구가 둥글다는 것을 아는 지금이야 그저 옛이야기로 치부한다. 그래도 끝이란 장소에 대한 동경은 여전하다. 분명히 끝이 아님을 알지만 근접하기 어려운 여행지를 ‘세상의 끝’이라 칭하며 의미를 부여한다. 세상의 끝이라는 곳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도 있지만 끝이란 곳은 뭔가 다를 것이란 기대가 있기에 그렇다. ‘끝’에 대한 기대를 품고 여정에 나서지만, 막상 목적지에 도착하면 기대한 만큼의 감동 내지는 결과를 얻기 힘들 수 있다. 그래도 끝에 도착하면 누구에나 똑같이 주어지는 것이 있다. 바로 그 끝에서 뒤돌아서면 다시 시작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끝’이 ‘시작’의 다른 이름이 되는 순간이다.
우리 땅에서 끝 하면 떠오르는 곳이 몇몇 있다. 그중 가장 대표적인 끝이라면 최남단 제주 마라도다. 육지 기준으로 제일 남쪽에 있는 작은 섬에 불과하지만, 마라도에서 보면 대륙으로 뻗어나갈 수 있는 우리 땅의 시작점이 바로 이 작은 섬이다. 우리 영토에서 넓은 태평양과 가장 먼저 맞닿은 곳 역시 바로 마라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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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토 최남단 마라도. |
◆국토의 끝이 아닌 시작 마라도
제주도 여행은 그 자체로도 돌아볼 것이 풍부하지만, 주위의 섬을 둘러보는 매력도 있다. 멀리 제주까지 와서 더 외진 곳으로 떠난다는 기분이 들게 한다.
제주도에 딸린 부속 섬들이 여럿 있지만, 가장 익숙한 섬은 마라도다. 제주보다 더 아래쪽에 있기에 진짜 우리 땅의 끝에 발을 내딛는다는 뭉클함이 마음 한쪽에 자리한다. 그렇다고 북한과 접한 백령도, 일본의 침탈행위가 지속하고 있는 독도처럼 엄숙할 정도의 무게감이 느껴지는 곳은 아니다. 독도, 백령도, 가거도 등 각 방향의 끝에 있는 섬들이 몇 시간 배를 타고 가야 하는 것과 비교하면 마라도는 손에 잡힐 듯한 거리에 있다. 서귀포 모슬포 여객선터미널이나 송악산 선착장에서 여객선을 이용하면 30분이면 도착한다. 섬에 도착하면 누가 말하지 않았는데도, 여행객들은 자연스레 섬 가운데로 줄을 맞춰 걷기 시작한다. 섬을 가로질러 마라도의 ‘핫플레이스’ 자장면 가게들이 몰려 있는 곳으로 향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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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라도에 도착하면 여행객들은 자연스레 섬 가운데로 줄을 맞춰 걷기 시작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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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라도를 찾은 가족이 점프하며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
붐비는 여행객 사이에 끼지 않고, 섬 절벽길을 따라 올라가도 된다. 마라도는 면적 약 0.3㎢에 동서 0.5㎞, 남북 1.3㎞로, 해안선 길이는 4.2㎞에 불과하다. 긴 고구마 모양의 아담한 섬이다. 자장면 한 그릇까지 맛볼 시간을 감안해도 2시간 정도면 충분히 돌아볼 수 있다.
섬 끝자락을 따라가면 아찔한 절벽에 접근하지 못하도록 보호대가 설치돼 있다. 그 너머로 작은 선인장들이 군데군데 눈에 띈다. 제주도에서도 쉽게 보지 못하는 자연 상태의 선인장을 보며 이곳이 최남단이란 것을 다시 확인하게 된다.
절벽길을 따라 언덕에 오르면 등대와 성당이 어우러진 아담한 마라도에서 가장 아기자기한 풍경을 마주한다. 고개를 반대로 돌리면 초원지대와 바다 건너로 제주 송악산, 산방산 풍경이 펼쳐진다.
마라도에 있는 대부분 시설은 앞에 ‘국토 최남단’이란 수식어를 달고 있다. 우리 국토 최남단에 있는 등대와 성당이 초원 위에 서있고, 그 너머로는 바다만이 펼쳐져 있다. 1915년 처음 불을 밝힌 마라도 등대 앞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팔미도 등대와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케이프 포인트 희망봉 등대 등 각 대륙의 끝에 있는 등대 모형들이 서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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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서귀포 마라도에 있는 독특한 외관의 성당 이름은 ‘마라도 뽀르지웅꿀라’다. 이탈리아의 프란치스코 성인이 직접 벽돌을 쌓아 만든 작은 성당인 ‘뽀르지웅꿀라’에서 이름을 가져왔다. |
등대보다 눈길이 가는 건 독특한 모양의 성당이다. 2000년 문을 연 이 성당의 정식 명칭은 ‘마라도 뽀르지웅꿀라’다. 이탈리아의 프란치스코 성인이 직접 벽돌을 쌓아 만든 작은 성당인 ‘뽀르지웅꿀라’에서 이름을 가져왔다. 아담한 섬 마라도에 있는 성당에 작다는 의미의 이름을 붙인 것은 탁월한 작명인 듯싶다. 성당은 만화 ‘스머프’에 나오는 버섯집, 거북이가 들판을 걸어가는 형태, 달팽이가 목을 빼고 있는 모습 등 보는 이에 따라 달리 보이겠지만, 독특하다는 것만은 부인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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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라도 성당의 내부 모습. |
외관도 독특하지만, 내부도 꼭 한 번 들어가 봐야 한다. 다른 성당과 달리 내부는 방이다. 작은 책상, 그 위에 성경이 놓여 있다. 채광창으로 들어오는 햇빛이 비추는 바닥에는 방석이 깔려 누구든 앉아 잠시 쉼을 즐길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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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라도의 ‘대한민국최남단’ 비석 |
성당을 지나 절벽길을 따라 걸으면 마라도를 상징하는 ‘대한민국최남단’ 비석이 있다. 우리나라 영토의 남쪽 끝이자, 북으로 향하는 시작점인 셈이다.
자장면 가게부터 편의점, 카페 등 상점들을 지나면 최남단 학교 마라분교다. 가파초등학교 마라분교는 2016년 2월 학생이 졸업한 뒤 개교 후 58년 만에 휴교에 들어갔다. 무인도였던 마라도는 1800년대 후반부터 사람들이 건너와 살았고, 현재 거주하는 인구는 50여명 정도다. 섬 전체가 원시림이었지만, 경작지를 마련하기 위해 화전을 일궈 지금처럼 들판이 펼쳐지게 됐다. 걸어서 섬 한 바퀴를 돌고, 해산물이 든 자장면 한 그릇으로 배를 채운 뒤 국토 최남단에서 북쪽으로 여정이 다시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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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방이 트인 군산오름에선 산방산과 송악산, 섶섬, 문섬, 범섬의 모습을 볼 수 있다. |
◆제주의 숨은 그림 찾기
제주 여행중 오름에 올라 주위의 풍경을 내려다보는 것은 많은 이들의 ‘위시리스트’ 중 하나다. 다만 산에 오르는 것 때문에 꺼리는 이들이라면 서귀포의 군산오름이 제격이다. 오름 정상 부근까지 차가 올라간다. 길이 좁아 조심히 운전해야하지만, 정상 부근에 작은 주차공간도 있다. 5분 정도 계단을 오르면 북으로는 한라산, 남으로는 서귀포 일대가 시원하게 펼쳐진다. 서쪽으로 산방산과 송악산, 가파도, 마라도가 동쪽으로는 섶섬, 문섬, 범섬이 떠있다. 일몰이나 일출 언제든 만족할 수 있다. 일몰 때면 한라산 정상 백록담이 지는 햇빛을 받아 붉게 물드는 장엄한 풍경을 마주할 수 있다. 일출 때면 범섬 부근이 붉게 물들며, 송악산이 빛을 받는 모습이 실시간으로 눈에 들어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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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산오름에 오르면 북으로는 한라산, 남으로는 서귀포 일대가 시원하게 펼쳐진다. |
사방이 탁 트인 풍경을 볼 수 있는 군산오름을 내려오는 길에는 안덕계곡을 만난다. 큰 길에 있는 주차장에 차를 세운 뒤 5분만 내려가면 된다. 주위를 감싼 소음은 사라지고, 정적이 주위를 감싸 딴 세상에 온 듯하다. 밝은 햇살마저 울창한 수풀과 기괴한 형태의 바위들에 가려 어둠이 내려앉았다. 적막함에 혼자 찾으면 무서움이 느껴질 정도의 분위기다. 오롯이 제주에서만 느낄 수 있는 날 것 그대로의 모습이다. 추사 김정희가 귀양살이를 할 때 이 부근에서 유배 생활을 하던 권진응을 부러워했다는 얘기가 전해질 정도로 독특한 풍광으로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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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덕계곡에선 화산섬 제주의 분위기를 오롯이 느낄 수 있다. |
제주의 독특함은 자연 풍광뿐 아니라 특이한 건축물에서도 만날 수 있다. ‘아래 벌판’이라는 뜻을 가진 모슬포 ‘알뜨르’의 들판 곳곳에 흉물스런 콘크리트 건축물이 있다. 일제 강점기때 비행장이 있던 자리다. 현재 제주국제공항이 일제 때 정뜨르비행장에서 시작됐는데, 알뜨르비행장도 당시 지어진 군사시설이다. 일제는 패색이 짙어지자, 자살특공대인 가미카제를 위한 조종 훈련을 했는데, 그 장소 중 한 곳이 알뜨르다. 밭 군데군데 비행기가 한대씩 들어갈 수 있을 정도 규모의 격납고 20여기가 세워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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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성이시돌목장에는 곡선 형태의 텐트 모양 지붕이 바닥까지 내려와 있고, 그 안에 벽을 세운 독특한 건축물 테쉬폰이 있다. 목장에 덩그러니 홀로 서있는 테쉬폰의 모습이 이국적인 풍경을 그리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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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쉬폰은 1960년대 외국인 신부가 주민들을 위해 지은 주택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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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애리 자연생활공원은 붉디붉은 동백이 한창이다. |
제주에서만 볼 수 있는 이색 건축물로는 ‘테쉬폰’도 있다. 제주 한림읍에 있는 테쉬폰은 이라크 바그다드 인근의 테쉬폰이라는 지역에 세운 아치형 궁전이 기원이다. 곡선 형태의 텐트 모양 지붕이 바닥까지 내려와 있고, 그 안에 벽을 세운 독특한 형태다. 1960년대 외국인 신부가 바람이 강한 제주에 적합해 가난한 주민들을 위해 지은 주택이다. 이런 내용을 모르고 형태만 보면, 큰 드럼통을 반을 나눠 눕혀놓은 것처럼 생각할 수도 있다. 목장에 덩그러니 홀로 서있는 건축물의 모습이 이국적인 풍경 그 자체다. 휴애리 자연생활공원은 붉디붉은 동백이 한창이다. 뭍 지역보다 동백이 피는 시기가 빠르다. 새빨간 동백이 아닌 분홍빛 동백이 공원을 뒤덮고 있다. 공원 한 켠에선 흑돼지와 거위들의 공연이 펼쳐지고 있다.
서귀포=글·사진 이귀전 기자 frei5922@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