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해예송에서 논쟁의 초점은 인조의 계비인 장렬왕후 조씨(1624~1688) 즉 조대비의 상복을 입는 기간을 얼마로 하느냐는 것이었다. 장렬왕후는 15세인 1638년 44세인 인조의 계비로 들어왔기 때문에 나이는 어렸지만 왕실의 최고 어른이었다. 조대비의 상복에 대해 송시열과 송준길 등으로 대표되는 서인 측은 1년복을 주장했다. 효종이 차남이고, 장남인 소현세자가 사망했을 때 조대비가 이미 장자(長子)에 해당하는 상복(喪服)인 3년복을 입었으므로, 1년복이 타당하다는 것이었다. 그 근거로는 ‘주자가례’를 들었다. ‘주자가례’에는 ‘왕자례 사서동(王者禮士庶同)’이라 하여, ‘왕의 예법은 사대부나 서민의 예법과 같다’고 명시했고, 이를 적용하면 1년복이 맞다는 것이다. 허목, 윤휴 등 남인은 적극적인 반박 논리를 폈다. 무엇보다 효종이 왕인 점을 강조하면서, ‘고례(古禮)’에 근거해 ‘왕자례 사서부동(王者禮士庶不同)’이라는 논리를 내세웠다. 왕의 예법은 사대부나 서민과는 다르기 때문에 효종이 차남이라는 가계적 혈통보다는 왕위를 계승한 왕이라는 점이 우선임을 강조한 것이다. 이에 조대비가 왕이 사망한 경우 입는 3년복을 입어야 함을 강력히 주장했다. 남인들의 주장에는 왕권 강화 사상이 내재돼 있었고, 서인의 주장에는 신권 강화의 논리가 있었다. 그러나 현종은 서인 측 손을 들어 주었다. 인조반정 이후 36년 가까이 서인이 정국을 주도했고, 현종은 즉위한 지 얼마 되지 않는 상황이라 왕이라도 서인들의 논리를 무시하는 것은 정치적으로 큰 부담이 됐기 때문이다. 결국 기해예송은 ‘경국대전’과 ‘국조오례의’를 근거로 하여 1년복을 입는 것으로 결정되면서 서인 측 승리로 마무리됐다.
신병주 건국대 교수·사학 |
양 파의 의견이 팽팽히 대립하는 가운데 두 번째 예송인 갑인예송의 승리자는 남인이었다. 갑인예송 직후 승하한 현종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14세의 숙종은 ‘송시열이 예를 잘못 해석했다’고 하면서 서인의 최고 정치가이자 사상가인 송시열에게 큰 모욕을 안겨 주었다. 갑인예송의 승리로 50년 가까이 야당이었던 남인은 비로소 정치 주도권을 잡는 여당이 되는 감격을 맛보았다. 현종 대에 전개됐던 예송논쟁은 예에 대한 해석의 차이에서 출발했지만, 결국에는 서인과 남인 간 권력 쟁탈의 양상을 띠게 됐다. 360년 전 기해년에 벌여졌던 예송논쟁이 낯설지만은 않은 까닭은 국익과 민생보다는 정파 간 이익을 우선시하는 현재의 정치 현실과도 닮아 있기 때문은 아닐까?
신병주 건국대 교수·사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