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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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일호의미술여행] 풍요의 소망 담은 인류 최초의 여인상

입력 : 2019-02-08 21:39:38
수정 : 2019-03-25 18: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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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시작이다. 음력 정월 초하룻날인 설을 보내고 많은 사람이 일상으로 복귀했다. 1월 한 달을 정신없이 보냈지만, 그동안 소원했던 친지나 형제와의 반갑고 따뜻한 만남과 재충전을 거친 후 새로운 시작을 위해 마음을 다지고 있다.

 

미술의 시작은 언제부터였을까. 인류 최초의 여인상이라고 말하는 ‘빌렌도르프의 비너스’(사진)에서 그 예를 볼 수 있다. 오스트리아 빌렌도르프 지방에서 발견됐고, 기원전 20000년쯤 작품으로 추정되는 9.7㎝의 아주 작은 여인상이다. 뚱뚱하고 익살스럽게 생긴 이 여인상에는 눈도 코도 입도 없다. 얼굴 형태도 구분이 없고, 손발의 흔적도 찾아볼 수 없다. 다만 가슴과 배 부분만이 계란 형태로 부풀려 강조될 뿐이다. 이것은 아름다움이나 감상을 위해서가 아니라, 풍요와 다산으로 자손이 번성하기를 바라는 믿음과 바람을 표현하기 위해서 만들어졌다.

 

동굴 벽화의 이미지도 마찬가지였다. 동굴 속 들소 그림이 현실의 들소와 똑같은 힘을 갖는다고 보았고, 들소 그림을 향해 돌과 창을 던지면서 위협적인 야수에 대한 두려움을 없애려 했으며, 사냥에 나갔을 때 그 동물이 쉽게 굴복하기를 빌었다. 이렇게 원시시대 사람은 현실 세계와 미술작품의 세계를 분리된 것으로 보지 않고 연속된 것으로 보았다.

 

이미지가 현실의 대상과 똑같은 힘을 갖는다는 생각은 지금 우리에게도 아직 남아 있다. 누군가의 사진을 바닥에 놓고 날카로운 바늘로 찌른다고 상상해 볼 때, 대부분의 사람이 섬뜩함을 느끼게 될 것이다. 사진 속 이미지가 현실의 그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무언지 모를 믿음에 이끌려 섬뜩한 기분에 사로잡히게 된다. 우리가 아직도 이미지를 현실의 대체물로 생각하는 원시적 심성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발달된 지적인 능력으로 그것을 어느 정도 극복하고 있지만, 원시시대 사람은 그 믿음에 보다 강하게 매달렸으며, ‘빌렌도르프의 비너스’를 그런 믿음과 바람을 담아서 표현했다.

 

새로운 시작인 지금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잘되리라는 믿음일 것이다. 살아가는 데 있어 믿음이 중요한 것은 예술이나 일상생활이나 마찬가지일 것 같다. 믿음과 바람의 간절함이 미술작품의 표현으로 나타났듯이 우리의 새로운 시작도 믿음과 바람에서 출발해 보자. 믿는 만큼 현실의 힘도 나타나지 않을까.

 

박일호 이화여대 교수·미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