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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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꽉’ 막힌 변기 설치법… 女화장실 ‘긴~~~줄’ 만들어 [이슈 속으로]

동일한 면적에 변기 수 맞추려다… 빼곡한 女화장실, 텅텅 빈 男화장실 / 현실 못 따라가는 기준
“물은 혀만 축일 정도로 마셔야 한다.”

평소 뮤지컬 등 공연관람을 즐기는 여성 직장인 이모(31)씨는 공연 인터미션(중간휴식) 때 화장실을 안 가도 되는 노하우라며 최소한의 물만 마실 것을 권했다. 공연장 여자화장실 앞의 긴 줄을 경험해서다. 그는 “주말, 공휴일 등 관람객이 몰릴 때면 20~25분 휴식시간도 촉박할 때가 많다”며 “여자들은 10분씩 줄을 서는데 남자화장실 쪽은 대부분 한산하더라. 여자화장실 칸 수 좀 늘려줬으면 좋겠다”고 아쉬워했다.

4세와 5세 딸을 키우는 ‘워킹맘’ 김모(35)씨는 이번 설연휴 기간 한 고속도로 휴게소를 들렀다가 곤욕을 치렀다. 그는 “‘급하다’는 딸아이들을 데리고 여자화장실에 갔는데 줄이 엄청났다. 아이들은 옆에서 난리인데 줄이 짧아질 기미가 안 보였다”라며 “앞줄에 서 계시던 다른 분들이 ‘먼저 가라’고 배려해 주셔서 다행이었다. 다음 명절 때도 이런 일이 벌어지면 어찌해야 할지 눈앞이 아득하다”고 전했다.

여자화장실 앞 긴 줄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고속도로 휴게소, 공연장, 극장, 경기장 등 방문객이 북적이는 곳이면 ‘만석’이 된 여자화장실을 쉽게 볼 수 있다. 왜 유독 여자화장실 앞에만 길게 줄이 늘어서는 것일까?
◆여자화장실 변기 개수는 남자화장실 변기 개수로 결정된다?

전문가들은 일률적인 공중화장실 대변기 설치기준이 문제라고 지적한다. 여자화장실의 대변기 수가 해당 시설의 종류나 여성 이용자 수 등이 아닌 남자화장실 변기 수에 좌우되는 현행 기준을 고쳐야 한다는 것이다.

15일 ‘공중화장실 등에 관한 법률’(공중화장실법) 제7조와 시행령 별표에 따르면 공중화장실의 여자화장실 대변기 수는 남자화장실의 대·소변기 수의 합 이상이 되도록 설치해야 한다.(남성용 대변기 2개·소변기 3개 이상, 여성용 대변기 5개 이상 최소 기준) 1000명 이상 수용할 수 있는 공연장과 야외공연장, 공원 등에서 여자화장실 대변기 수는 남자화장실 변기 수의 1.5배 이상이 돼야 한다.(남성용 대변기 2개·소변기 3개 이상, 여성용 대변기 8개 이상)

바꿔 말하면 남자화장실 변기 수를 최소 기준으로 맞추면 여자화장실의 대변기도 늘릴 필요가 없다는 이야기다. 예를 들어 1:1 비율을 적용받는 건축물의 남자화장실 변기가 7개라면 여자화장실 대변기도 7개를 설치해야 하지만, 이를 최소 기준인 5개로 감소시키면 여자화장실 대변기도 5개만 설치해도 된다.

◆최소 기준 미달되기도… 적발 쉽지 않아

최소 기준조차 채우지 않는 공중화장실이 적발되기도 했다. 2016년 조사 결과 서울시 지하철 6호선 38개역 중 17곳(45%)과 3호선 34개역 중 15곳(44%)이 여자화장실 변기 수 최소 기준 미달인 것으로 드러났다. 1호선 서울역·동대문역·청량리역과 2호선 교대역·충정로역, 4호선 명동역·동대문역, 5호선 신길역, 7호선 장암역, 8호선 복정역 등도 기준 미달이었다.

공중화장실법의 화장실 설치기준을 위반하면 100만원 이하의 과태료가 부과될 수 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이를 적발하기 쉽지 않고 화장실 보수에 큰 비용이 드는 것과 비교해 과태료가 적어 규제의 실효성이 떨어진다는 지적이 일고 있다. 1개 역사 화장실을 개선하려면 약 2억7000만원이 드는 것으로 알려졌다.
픽처랜드 캡처.
◆해외는 건축물 용도 및 이용자 수 따라 규정

최소 면적과 변기 대수만 정해 놓은 우리나라의 획일적인 공용화장실 설치기준이 주요 선진국과 비교된다는 비판도 크다.

미국은 전문가들로 구성된 국제코드위원회(ICC)에서 ‘국제배관코드’ 권고기준을 마련해 두었다. 건축물을 용도별로 집회시설, 업무시설, 교육시설, 공장 및 산업시설, 상업시설, 숙박시설 등으로 구분해 이용자 수에 따라 변기 설치기준을 제시한 것이다. 이에 따르면 △극장과 공연장은 남성 125명당 1개/여성 65명당 1개 △나이트클럽과 주점은 남성·여성 각 40명당 1개 △레스토랑과 푸드코트는 남성·여성 각 75명당 1개 △게임장은 남성 400명까지 100명당 1개, 이후 250명당 1개/여성 400명까지 50명당 1개, 이후 150명당 1개 등 구체적이다.

영국은 국가표준기구인 영국표준협회(BSI)의 건축 표준인 ‘BS6465’를 바탕으로 각 지역 실정에 맞게 적용한다. 상점 이용객 성별 비율은 원칙적으로 남성 35%, 여성 65%로 하며 신뢰할 만한 기준이 있으면 그에 따른다. 화장실 변기 개수는 남성 500명당 대변기 1개·소변기 2개, 여성 500명까지 100명당 1개 등 방문객 수에 따라 산정한다.

중국도 ‘도시공공화장실설계표기준’에 규정된 상가 변기 설치기준을 보면 500인 이하 남성용 1개·여성용 2개, 501~1000인 남성 2개·여성 4개 등 방문 인원당 변기 수를 규정하며 남성과 여성의 비율을 1:2로 유지하고 있다.

◆전문가 “세부적 기준 마련해야… 최소 기준 삭제도 우려돼”

전문가는 일괄적인 현행 화장실 변기 설치기준을 세분화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정재환 국회입법조사처 정치행정조사실 안전행정팀 입법조사관보는 “일괄적으로 화장실 변기 수를 늘리자는 것이 아니라 세부적 기준을 마련해야 한다는 것이다. 해외처럼 건물의 용도와 이용자 수 등에 따라 남녀 비율을 구체적으로 구분할 필요가 있다”며 “예컨대 남성이 많이 이용하는 화장실은 남성용 변기 수를 늘리고 여성이 많이 가는 곳은 여성용을 늘리는 식”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올해 9월 삭제 예정인 최소 의무 설치 대수 규정을 놓고도 우려를 나타냈다. 현행법상 남자화장실 소변기 3개·대변기 2개, 여자화장실 대변기 5개(1:1.5일 경우 8개)인 최소 개수 규정이 삭제되면 더 적은 수의 변기가 설치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정 조사관보는 “이 규정이 삭제되면 1:1, 1:1.5 등 비율만 남는다. 아무리 큰 마트라도 남자 변기 1개에 여자 변기 2개만 설치해도 법적으로 문제가 안 된다”며 “화장실 면적을 줄이기 위해 남자 변기와 여자 변기를 모두 줄일 가능성이 있다. 규정 삭제 전 깊이 있는 논의와 재검토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용일 행정안전부 생활공간정책과 과장은 “사실 시행규칙상으론 이용 대상, 규모, 이용자의 성별 비율 등 여러 여건을 고려해 시장, 군수, 구청장이 인정하는 시설에 대해선 적용을 안 받는 예외기준이 있다. 여학교 같은 경우는 기존 1:1 혹은 1:1.5 비율을 지키지 않아도 된다”고 설명했다. 이 과장은 이어 “다만 시설 용도나 이용자 수에 따른 화장실 수를 개량적으로 규정한 법이나 제도를 두진 않았다. 어떻게 보면 이 또한 규제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라며 “시민들이 불편을 겪는 점에 대해선 공감한다. 조만간 공중화장실 실태 조사나 외국 사례 등을 통한 가이드라인 마련에 착수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한 신축학교에서 공간이 빽빽한 여자화장실과 공간이 여유로운 남자화장실의 모습이 대조적이다.
온라인 커뮤니티 캡처

◆빼곡한 女화장실, 텅텅 빈 男화장실

지난해 11월 온라인커뮤니티에 올라와 뭇매를 맞은 한 신축학교의 화장실은 공중화장실법의 허점을 그대로 노출했다. 여자화장실은 대변기 5개가 꽉 차 있는 반면 남자화장실은 소변기 2개 옆으로 텅 비어 있다. 한눈에 봐도 소변기 2개는 더 설치할 수 있을 듯싶다.

자신을 현직 교사라 밝힌 해당 사진 게시자는 “학교가 최근 리모델링을 했는데 새로 만든 화장실이 저렇다. 왜 그러냐고 물어보니 ‘법이 그렇다’는 답을 들었다”며 “법령을 찾아보니 실제 ‘공중화장실법’에 ‘여자화장실 대변기 수는 남자화장실 대소변기 수의 합 이상만큼 설치해야 한다’는 내용이 있었다”고 설명했다. 이미 여자화장실에 변기가 5개 있으니 남자화장실 대·소변기는 5개 이상 설치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누리꾼들은 ‘탁상행정의 전형’이라고 쓴소리를 했다.

기준이 된 ‘공중화장실 등의 이용에 관한 법률’(공중화장실법)은 2001년 당시 한나라당 소속이던 심재철 의원이 대표 발의해 2004년에 제정된 것이다. 심 의원은 “여자들의 화장실 평균 이용시간은 남자들의 약 3배라고 하므로 여자화장실의 대변기 수가 남자화장실의 소변기와 대변기 수의 합 이상이 되도록 해야 한다”고 법안 발의 이유를 밝힌 바 있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그 취지가 무색해진 화장실들이 더러 발견된다. 일반적인 공중화장실 최소 면적 기준은 33㎡ 이상(공원 등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장소 또는 시설은 46㎡)이다. 법률상 기준 면적만 넘으면 공간 설계는 자유롭게 할 수 있다.

그런데 법률을 기계적으로 해석해 남녀화장실 면적을 동일하게 잡고 변기 수만 맞추려다 보니 문제가 생긴다. 공간을 많이 차지하는 여자화장실 대변기 수에 맞춰 남자화장실 변기 수까지 줄어들게 되는 것이다.

이용일 행정안전부 생활공간정책과 과장은 “(남자화장실과 여자화장실을 같은 면적으로 해야 한다는) 그런 규정은 없다. 일정 규모 이상 변기 수 비율만 돼 있다”며 “그런 부분들은 지자체에서 건물의 여건 등을 토대로 융통성 있게 조정이 가능하도록 재량을 부여한 만큼 건물주가 지자체와 협의해 충분히 합리적인 설계를 할 수 있는 부분”이라고 말했다.

나진희 기자 najin@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