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신정권 시절 대통령 선거는 사전에 뽑힌 선거인단이 서울시내 장충체육관에 모여 단 한 명의 후보, 바로 박정희 대통령에 대한 ‘찬반’ 여부를 표시하는 요식절차였다. 그래서 지식인들한테 ‘체육관 선거’라는 혹평을 받았다. 박 전 대통령은 물론 뒤를 이은 최규하, 전두환 전 대통령도 체육관 선거로 당선된 ‘체육관 대통령’이다.
대통령 간선제를 택한 유신정권 시절 서울 장충체육관에 선거인단이 모여 대통령 선거를 진행하고 있다. 흔히 ‘체육관 선거’로 불렸다. 세계일보 자료사진 |
1938년생인 A씨는 전북 군산의 한 공장에서 자재관리 담당자로 일하던 1976년 7월 어느날 대여섯명의 동료 앞에서 지난 대통령 선거를 거론하며 “대통령 선거에 혼자 나와서 혼자 당선되는 것이 무슨 선거냐”고 비웃었다.
그는 3개월쯤 지난 1976년 10월에도 ‘불경한’ 발언을 했다. 공장에 자재 등을 납품하는 업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전 중앙정보부장 이후락이 청와대 비서실장으로 있을 당시 돈을 많이 벌어 선거 때 박정희 대통령에게 자금을 댔다”며 “다음 대통령 선거도 틀림없이 박정희가 될 것”이라고 대뜸 말한 것이다.
A씨는 이듬해인 1977년 경기도 이천의 다른 공장으로 전보 발령을 받았다. 그런데 새 직장에 출근한 지 얼마 안돼 낯선 수사기관 요원들이 A씨 앞에 들이닥쳤다. 공안당국에 연행된 A씨는 공포 분위기 속에 집중 조사를 받고 대통령 긴급조치 9호 위반죄로 재판에 넘겨졌다.
1975년 박정희정권이 선포한 대통령 긴급조치 9호는 ‘유언비어를 날조, 유포하거나 사실을 왜곡해 전파하는 행위’를 처벌하도록 했다. 1년 이상 징역형에 자격정지를 부과할 수 있도록 하는 등 형량도 매우 무거웠다.
1977년 7월 서울형사지법(현 서울중앙지법) 1심 재판부는 A씨 혐의를 모두 유죄로 인정해 징역 1년 실형에 자격정지 1년을 선고했다.
하지만 3개월 뒤인 1977년 10월 서울고법 항소심 재판부는 “형량이 너무 무겁다”며 1심을 깨고 징역 1년에 자격정지 1년, 집행유예 2년을 선고해 A씨를 석방했다. 이듬해인 1978년 1월 대법원에서 이 형량이 최종 확정됐다.
2017년 문재인정부 출범 후 검찰은 문무일 검찰총장 지시에 따라 유신정권 시절 긴급조치 피해자들의 구제에 나섰다. 피해자 본인이 사망하거나 재심 청구를 포기한 경우 검사가 직권으로 재심을 청구, 무죄 판결을 받아내도록 했다.
2013년 7월 75세를 일기로 사망한 A씨도 그를 대신해 검사가 2017년 11월 법원에 재심을 청구했다. 서울고법 형사10부는 지난해 6월 재심 개시를 결정한 데 이어 최근 A씨한테 무죄를 선고한 것으로 21일 전해졌다.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이 사건 공소사실은 그 적용 법령인 긴급조치 9호가 당초부터 위헌·무효이므로 범죄가 되지 않는다”며 “유죄를 선고한 원심 판결은 더 이상 유지될 수 없다”고 판시했다.
김태훈 기자 af103@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