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일광(日光)광산마을 전경. 마을 근처로 부산울산고속도로가 지난다. 기장=서재민 기자 |
◆열아홉에 고향 떠났던 소녀…낯선 풍경에 며칠을 울다
1944년 광산마을에 온 경상남도 거제 출신 소녀는 정든 고향을 떠나 낯선 산골에서 산다는 두려움 탓에 며칠간 울음을 그치지 않았다. 소녀의 아버지와 오빠들은 광산에서 일했다. 유태(94) 할머니는 열아홉 꽃다운 나이에 징용지 생활을 시작했다.
한국 홍보 전문가 서경덕 성신여대 교수가 2016년 광산마을 앞에 세운 일광광산 안내판. 기장=서재민 기자 |
6·25전쟁 발발로 남편과 마을을 떠났던 유 할머니는 다시 광산으로 돌아왔다. 고통은 있었지만 할머니에게 제2의 고향이나 마찬가지다. 유 할머니를 포함해 징용자를 가족으로 뒀던 주민 일부만이 어두웠던 그 시절을 기억한다.
19살에 경남 거제에서 광산마을로 가족과 왔던 유태(94)할머니(사진 위)가 자기 이름과 아버지 이름을 쓰고 있다. 기장=서재민 기자 |
산기슭 구리물이 광산마을 시작으로 알려졌다. 산에 오른 일본인이 흘러나온 붉은 물을 보고서 구리 채굴을 위해 이곳에 달려든 후, 광산마을이 생겼다고 한다. 관리는 일본인, 노동은 한국인 몫이었다. 일광광산이 ‘조선 5대 구리광’이라는 그럴 듯한 포장 이면에는 한국인 징용자들의 눈물과 고통이 스며 있는 셈이다.
징용자가 캔 구리는 좌천역까지 옮겨진 뒤, 인천으로 향하는 열차에 실려 일제의 한반도 병참기지화 디딤돌이 됐다. 남자가 굴에서 구리를 캐면 여자들이 수레에 실었다. 서경덕 성신여대 교수는 누리꾼과 힘을 합쳐 2016년 마을 입구에 세운 안내판에서 “일제는 자원 약탈을 목적으로 한 광산개발에 인력을 강제로 동원했다”고 밝혔다.
마을 뒷산에 선 비석. 최원순 이장은 “(일제강점기에) 안전을 비는 차원에서 만든 것으로 안다”며 “징용자 넋을 기리고자 매년 정월 대보름에 여기서 제사를 지낸다”고 말했다. 기장=서재민 기자 |
20여㎡(약 7평) 남짓한 사택 한 채에 예닐곱으로 구성된 징용자 가족이 산 것으로 알려졌다. 닭장 같은 집터는 보존 여부 논쟁에 휘말린 인천 미쓰비시 중공업의 줄사택을 떠오르게 한다.
마을 뒷산에 오르면 세운 시기조차 추정할 수 없는 석탑 하나를 볼 수 있다. 갱도에서 가져온 광석으로 만들어 누렇게 녹이 슬었다. 최원순 이장은 “(일제강점기에) 안전을 비는 차원에서 만든 것으로 안다”며 “징용자 넋을 기리고자 매년 정월 대보름에 제사를 지낸다”고 말했다.
폐쇄된 일광광산 입구 중 한 곳. 산업통상자원부 산하 한국광해관리공단이 광물질 피해를 막고자 지난 2016년 수질 정화시설을 만들었지만, 갱도에서 나오는 물을 항상 지켜볼 수만은 없다. 기장=서재민 기자 |
광산마을이 일제강점기의 아픈 역사를 되새기자는 ‘다크 투어리즘’ 대상으로 주목받지만 그보다 주거환경 개선이 시급해 보인다.
목재로 만든 가옥 일부가 썩고 인근 ‘부산울산고속도로’ 소음이 심하다는 민원도 있다. 지난해 9월 두 차례에 걸쳐 고속도로 소음도를 측정한 기장군이 기준치(58㏈)를 넘지 않았다고 밝혔지만, 가옥 특성을 반영하지 않은 결과라는 주민 반발이 거센 것으로 전해졌다.
폐갱에서 나오는 물도 문제다. 산업통상자원부 산하 한국광해관리공단이 광물질 피해를 막고자 2016년 여러 갱도 입구에 수질 정화시설을 만들었지만 흐르는 물을 항상 지켜볼 수만은 없다. 광산마을을 찾은 지난달 20일에도 정화시설에서는 붉은 물이 발견됐다.
기장=김동환 기자 kimcharr@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