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메뉴 보기 검색

“원포인트 남북회담 우선… 文정부 중재 타이밍 잡아야” [세계초대석]

이종석 전 통일부 장관/北·美회담결렬 불구 의제 간명화 성과 / 본질적인 측면 타협 이룰 가능성 높여 / 양측 모두 회담 재개에 대한 의지 가져 / 긴장 고조 없이 안정적으로 상황 관리 / 트럼프, 자국내 여론·조야 비판 의식 / 비판세력 돌파할 만큼의 성과는 못내 / 金 열차행보 새강행군 기록으로 선전 / 아날로그식 감성으로 인민들에 어필
“베트남에서 열린 하노이 북·미 정상회담은 실패한 것치고는 점수가 있었다. 결렬 이후 우리의 안보 상황을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것만 해도 지난 1년간의 큰 변화다.”

이종석 전 통일부 장관이 4일 경기 성남시 세종연구소 연구실에서 세계일보와 인터뷰를 갖고 2차 북·미 정상회담 결렬 후 남북에게 당부의 말을 하고 있다.
성남=이재문 기자
이종석 전 통일부 장관은 제2차 북·미 정상회담에 대해 “결과 자체도 중요하지만 결렬 이후 상황이 안정적으로 관리되는 것은 다행”이라고 밝혔다. 북한은 과거 회담이 결렬되면 상대방과 가시 돋친 말을 주고받아 긴장이 고조됐지만 이번에는 이례적으로 각자 입장만 밝힌 채 신사적으로 헤어진 점에 주목한 것이다. 이 전 장관은 “앞으로 우리 정부의 중재 역할이 또다시 중요하게 됐다”며 향후 북·미 관계에 한국 정부의 능동적인 움직임을 주문했다. 이번 인터뷰는 북·미 정상회담과 베트남 방문을 끝낸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평양으로 향한 4일 경기 성남시 세종연구소의 연구실에서 이뤄졌다.

―하노이 정상회담을 어떻게 평가하는가.

“북·미가 서로의 패를 확실히 알았다는 것은 긍정적이다. 하지만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김 위원장이 직접 대면했으면서도 결론을 내지 못한 데 대해선 좌절감도 느낄 것이다. 이를 극복하려고 하겠지만, 다른 길을 가야 하는 게 아닌가 하는 유혹 등 여러 근본적인 생각도 할 것 같다. 다행인 점은 회담 결렬 이후 양쪽 모두 자연스럽게 상황관리를 하며 절제된 모습을 보여줬다는 것이다. 그동안 북·미나 남북 회담에서 전혀 보지 못했던 새로운 모습이다. 트럼프 대통령만 하더라도 회담 결렬 직후 기자회견에서 ‘추가 대북제재 여부’를 묻는 말에, 의미심장한 답변을 내놨다. 자신이 김 위원장과 가까워졌고 북한 주민을 생각해야 하기 때문에 추가 제재는 할 수 없다고 한 것이다. 북한 노동신문도 김 위원장의 말을 인용해 이번 결과를 긍정 평가했다.”

―내용에서 긍정적으로 평가할 부분은.

“실망 속에서도 희망을 찾아본다면 의제 간명화에 도달했다는 게 성과다. 양측이 합의에 이르지 못했으나 서로가 생각하는 비핵화가 무엇인지는 파악했다. 또 연락사무소 설치 등에는 공감대를 확인한 것으로 보여, 앞으로 본질적인 측면에서 타협을 이룰 가능성을 높여 놨다. 예를 들자면 집을 짓는 도중에 집이 허물어졌다고 치면, 과거엔 만남이 실패하면 다 불타버리고 끝나버렸지만 이번엔 그렇지 않았다.”

―트럼프 대통령이 ‘합의문에 서명할 수도 있었다’고 했는데.

“당사자의 말이니 맞는 말일 것이다. 그럼에도 대북제재 해제를 결정했을 경우 미국 조야의 후폭풍을 염려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미국에서 가장 대북제재 완화에 관심이 있는 사람은 트럼프 대통령으로 보이지만, 임기 초반과 달리 정치 환경을 고려한 행보를 하는 듯하다. 이전엔 소신에 따라 협상을 진행했지만 선거가 다가올수록 자신에게 비판적인 여론을 살피는 것 같다. 언론과 민주당 반대를 돌파해야 하는데 이번 회담에서는 이를 위한 성과를 얻지 못한 것으로 보였다.”

―북한에 당부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김 위원장 입장에서는 억울할 수 있지만 한 번 더 만날 수 있는 상황을 만들어야 한다. 트럼프 대통령 입장에서는 미국의 조야가 문제다. 미국 언론과 민주당이 합의안에 만족할 수 있어야 한다. 김 위원장은 자신을 지지하는 트럼프 대통령이 미국 내 상황을 돌파할 수 있도록 양보해야 한다. 둘은 이제 한배를 탔다. 이제는 트럼프 대통령이 미국 내부를 설득할 힘을 실어줘야 한다. 김 위원장은 자신이 생각하는 수준보다 더 높은 수준을 (미국에 내어)줄 수밖에 없다.”

―한국 정부는 어떤 역할을 해야 하나.

“문재인 대통령의 중재 필요성과 폭이 넓어졌다. 이 측면이라면 남북 정상회담을 먼저 갖고 이후 한·미 정상회담을 하는 게 논리적인 수순으로 보인다. 김 위원장이 나름대로 이번 회담 결과를 정리하고 추스르고, 대안을 적립하는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우리 정부는 이때 중재를 위한 접촉의 타이밍을 잡아야 한다. 원포인트로 판문점에서 비핵화 문제에 대해 남북이 이야기 나누는 게 먼저다. 단순히 김 위원장의 생각을 듣는 게 아니라, 한국 정부 나름의 복안과 창의적 아이디어가 필요하다. 중재자는 중개인이 아니다. 단순히 말을 옮기는 게 아니라 상황을 진전시킬 수 있는 요소를 만들어 내야 한다는 것이다. 창조적 역할을 해야 한다.”

―회담 결렬 과정에 관한 주장이 엇갈리는데.

“리용호 북한 외무상이 주장하는 영변 비핵화 방안이 협상장에서 제대로 나왔는지는 모르겠다. 중요한 것은 결렬 직후 리 외무상이 공식적으로 이야기했기 때문에, 이제 이 문제는 북한의 공식 입장이자 최소한의 제안이 됐다는 게 중요하다. 그의 발언은 김 위원장의 의지이기도 하다. 미국은 대북제재 완화에 대해 어떤 의지와 생각을 가졌는지 밝혀야 한다. 어디에 서로의 접점이 있는지 찾아야 한다.”

―북한의 영변 핵시설 폐기안의 의미는.

“영변 핵폐기가 영변 전체를 통째로 들어내고 미국 기술자가 같이 가서 철거하자는 것인데 여기에 담긴 함의는 크다. 향후 모든 북한 핵폐기 과정에서 미국이 검증과 공동 작업을 할 수 있다고 시사한 것이다. 북한은 영변 핵폐기가 비핵화의 모든 게 아니라 비핵화의 첫 공정이라고 밝혔다. 이것이 잘 되면 그다음 단계부터는 빠르게 진행될 수 있다. 북한이 영변으로 모든 제재를 풀어달라고 한 게 아니라, 영변에 대한 상응 조치를 받으면 그것을 계기로 몇 가지 패키지를 만들어 단계적으로 해 나가자는 것이다.”

―북한은 왜 제재완화에 그렇게 매달렸을까.

“중국과의 경제협력을 열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야 현재 경제발전 전략수행에 도움이 되고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의 평양 방문 여건이 조성될 수 있다. 과거의 경험에서 살펴보자. 2005년 9·19 공동성명 이후 BDA(방코델타아시아) 제재 사건이 있었다. 미국의 여러 제재 속에서도 북한이 계속 버티다가 결국 금융제재에서 격렬하게 반응했다. 미국 당국자들로서는 금융제재가 북한 변화를 견인할 본질적인 것이라는 생각이 있다. 미국은 지금 그 많은 제재를 견뎠던 북한이 민생분야 제재에서 비명을 지르고 있다고 판단해서 이 분야 제재완화에 특히 거부감을 느끼는 것 같다.”

―이번에 김 위원장의 새로운 모습이 있었나.

“국제사회를 들여다보고 있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김 위원장은 리 외무상이나 최선희 외무성 부상을 통해 사실상 자신의 입장과 심경을 밝혔다. 국제사회라는 공기 속에서 자신이 숨 쉬고 있다는 것이다. 아버지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그 공간 자체가 달랐다. 그래서 예측이 어려운 돌발적 상황이 많았다. 반면 김정은 위원장은 국제사회의 관행 속에서 숨을 쉬고자 하는 의지를 보여줬다.”

―김 위원장은 특별열차로만 베트남을 왕복해 주목받았는데.

“김일성 주석은 항공기를 이용해서 베트남을 방문했다. 김정일은 건강악화 이후 2011년 야전열차에서 숙식을 하며 현지지도를 했다. 그해 5월 일정으로 중국을 여행했는데 거리가 5000㎞였다. 이를 통해 김정일은 중국식 개방에 대한 의지와 지도자가 인민을 위해 강행군을 하고 있다는 메시지를 보냈다. 건강이 좋지 않은 상태에서 특히 최장 30시간, 2000㎞를 중국 지린성 창춘에서 장쑤성 양저우까지 쉬지 않고 달리기도 했다. 이번 김 위원장의 베트남행 이후 북한 매체 보도를 보면 좋은 성과를 갖고 오라는 말보다 자신들의 지도자가 얼마나 고생을 할 것인가, ‘그리운 장군님’ 등에 대한 이야기만 나온다. 북한식으로 보면 이 아날로그식 감성으로 인민들에게 어필하려고 하는 것이다. 이번 베트남 방문은 앞으로 북한의 강행군의 새로운 기록으로 선전될 것이다.”

―회담 결렬로 북한의 강경파가 득세할 것이라는 분석도 있다.

“이번 결과는 북한 권력 핵심부에서 함께 공유하는 실망이지, 원망으로 가지는 않을 것이다. 김 위원장이 군부를 완전히 장악했기 때문에 강경파 득세는 불가능하다. 이미 무기공장에서 농기계를 만들고 이를 치하하는 내용이 신년사 등에 나온다. 병영국가에서 무기공장에서 농기계를 만든다는 것은 군부를 장악하지 않고는 불가능한 일이다. 아마 우리나라에서도 불가능할 것이다. 북한에서 김 위원장의 권력체계는 아주 공고해 보인다.”

대담=박종현 외교안보부장
정리=조병욱 기자 brightw@segye.com

이종석 전 통일부 장관은… △경기 남양주(1958년) △성균관대 정치외교학과 석·박사 △통일부 정책자문위원 △국방부 국방정책자문위원 △남북정상회담 대통령 특별수행원(2000년) △세종연구소 북한연구센터장 △국가안전보장회의(NSC) 사무차장 △제32대 통일부 장관 △세종연구소 수석연구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