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영화에 찾아온 기회
1930년대 중후반은 조선영화계가 ‘조선영화’란 상업적 가능성을 마지막으로 타진해 본 시기였다. 무엇보다 조선영화주식회사와 고려영화협회로 대표되는 조선인 제작사와 산하 스튜디오, 이를 운용하는 프로듀서들이 등장하며 비교적 안정적인 제작 기반이 갖추어졌고, 이들을 중심으로 일본영화계와의 협업이 타진되고 실현되는 등 제작과 상영 영역도 조선영화계 범위를 넘어섰다. 이처럼 1930년대 중후반 조선영화 제작 지형이 변화의 양상을 보이게 된 원인은 무엇이었을까. 조선영화계의 인력과 자본들은 무엇에 자극받고 움직이게 됐을까. 또 합작 상대인 일본 영화산업은 어떤 이유로 조선영화를 주목하게 됐을까.
그 배경으로 가장 선명하게 인식되는 것은, 역설적이게도 제국주의 일본의 영화통제 국면이다. 1934년 8월7일 ‘활동사진영화취체규칙’ 공포로 식민지 조선에 대한 일제의 영화통제가 본격적으로 착수됐는데, 그 시행세칙에 외국영화 상영을 제한하는 조항이 포함됐다. 조선의 각 영화상설관은 1934년 말부터 단계적으로 외국영화 상영을 줄여야 했고, 1937년부터는 역으로 매달 반 이상 일본영화를 상영해야 하는 국산영화 강제 상영이 규정된 것이다. 결정적 이유는 조선인 관객들이 일본영화보다 미국영화를 포함한 서구영화를 선호한다는 것이었다. 핵심은 국산영화 범위에 일본영화뿐 아니라 조선영화까지 포함된 점이다. 당국이 서구영화의 상영 비율을 강제로 줄였지만, 영화관 입장에서는 스크린을 일본영화로만 채우는 것이 쉽지 않았고, 자연스럽게 조선영화에도 기회가 왔다. 이에 조선영화계는 조선총독부의 동향을 살피고 일본영화계와의 접점을 모색하며, 일본과 만주까지 수출할 상업영화 제작을 추진하게 된다.
◆2세대 조선영화인의 역할
조선영화가 조선의 영화관을 넘어 일본과 만주 등지로 진출하기 위해서는, 조선영화 자체의 매력이 인식돼야 가능한 일이었다. 이는 성봉영화원이 제작하고 이규환이 연출한 ‘나그네’(1937)가 입증한 바 있다. 일본 개봉명이 ‘다비지(旅路)’였던 이 영화의 전략은, 조선의 향토색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나그네/다비지’는 기획 단계부터 일본 개봉까지 고려해 조선 영화사와 일본 영화사가 합작한 첫 번째 사례로, 각각 성봉영화원(聖峯映畵園)과 신코키네마(新興キネマ)가 나섰다. 합작의 역할 배분은, 조선의 성봉이 각본, 감독, 배우, 로케 비용을 부담하고, 일본의 신코는 카메라 제공 및 촬영, 현상, 녹음 등 기술 지원을 맡았다. 영화는 조선뿐 아니라 일본에서도 관객 동원에 성공하며, 조일 각 영화사의 공동 제작과 조선의 로컬 컬러 묘사가 일본 수출의 지름길이란 공식을 만들어낸다. 그 뒤를 이은 것이 반도영화제작소 제작으로 방한준이 연출하고, 일본의 도와상사(東和商事)가 후반 작업을 지원한 ‘한강’(1938)이었다.
일본영화사와 합작을 주도적으로 추진한 이들은, 일본 영화촬영소에서 공부하고 돌아온 조선영화인들이었다. 조선영화의 초창기를 개척한 이경손, 나운규, 이필우 등을 1세대라 부른다면, 이들은 2세대라고 칭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시작이 ‘나그네’를 성공시킨 이규환(1904~1982)이었다. 그는 당시 영화를 배울 수 있는 가장 현실적 선택지인 일본의 교토 지역을 선택했다. 1930~1931년 사이 이규환은 교토의 데이코쿠키네마(帝?キネマ) 우즈마사(太秦)촬영소에서 도요타 시로(豊田四?)와 스즈키 시게요시(鈴木重吉)의 조감독으로 일했다. 당시 데이코쿠키네마에는 방한준(연출)과 이창용(이후 고려영화협회 대표), 김성춘(조명) 등이 있었고, 같은 교토의 도아키네마(東?キネマ) 교토촬영소에는 박기채(연출)와 양세웅(촬영)이 있었다.
방한준(1905~1950?) 역시 같은 시기 우즈마사 촬영소의 현상실에서 일했고, 대부분의 조선영화인이 교토 영화촬영소에서 경험을 쌓은 것에 비해, 이후 도쿄로 옮겨 쇼치쿠키네마(松竹キネマ) 가마타(浦田)촬영소에서 일했다. 이후 조선으로 돌아온 방한준은 첫 연출작으로 ‘살수차’(1935)를 고른다. 교토 촬영소에서 같이 근무하던 조명기사 김성춘이 제작한 영화였다. 방한준의 두 번째 작품 ‘한강’의 촬영 역시, 교토에서 함께 있었던 양세웅(1906~1950?)이 맡았다. 그는 1927년경부터 도아키네마에서 활동하다, 1932년 도카쓰키네마(東活キネマ)에서 조선인 최초로 촬영기사가 됐던 인물이다. 조선으로 돌아온 양세웅은 2세대 영화인 박기채와 신경균의 데뷔작 ‘춘풍’(1935)과 ‘순정해협’(1936) 촬영을 차례로 맡았다. 이처럼 1930년대 중후반의 조선영화는 새로운 인력들이 가담해 제작 기반이 한층 두터워졌다.
◆조선인 뱃사공들 삶과 애환을 그린 ‘한강’
영화 ‘한강’은 한강에서 목조 돛단배로 화물을 운송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배경은 서울에서 배로 45일 정도 걸리는 강원도의 작은 마을이다. 나이 든 뱃사공 명삼(윤봉춘)은 아들 재수(이금룡)와 딸 상순(구자연)과 같이 살고 있다. 어느 여름날 명삼의 배가 서울로 운송을 떠난 후 화물주 아들 원식(김일해)이 마을에 온다. 그는 주막집 딸 봉희(현순영)를 첩으로 삼으려 눈독을 들이지만, 그녀는 재수와 연인 사이였다. 어느 날 재수와 봉희가 강변에 있을 때 술 취한 원식이 나타나 시비가 붙고, 둘은 주먹다짐을 하게 된다.
화가 난 원식은 명삼에게 더 이상 일을 주지 않겠다고 엄포한다. 그러나 그의 아버지로부터 화물을 모두 보내라고 전보가 와, 다시 명삼에게 일을 주게 된다. 짐을 옮기던 명삼이 부상을 당해, 재수는 원식에게 자신을 써 달라고 간청한다. 그는 상대도 않은 채, 젊은 사공 성근(최운봉)에게 명삼의 배로 짐을 옮기게 한다. 하지만 한 명의 사공이 더 필요하게 되어, 결국 재수도 배를 타고 처음으로 서울까지 가게 된다. 성근과 재수는 온갖 난관을 극복하며 서울로 향한다. 이렇게 새로운 세대의 뱃사공이 탄생한다.
‘한강’은 강원도에서 충청북도까지 4개월에 달하는 로케이션 촬영을 거쳤다. 1937년 9월경 촬영을 마쳤지만 영화사는 재정난에 빠졌고, 결국 일본 도와상사(東和商事)의 후원으로 완성됐다. 유럽예술영화의 수입배급사였던 도와상사는, 1937년 ‘나그네/다비지’에 이은 ‘한강’으로 일본 예술영화 시장에서 조선영화의 가능성을 점친 것으로 보인다. 영화는 1938년 5월 경성에서 먼저 개봉했고, 일본에서는 1939년 7월 도쿄의 히비야(日比谷)영화극장에서 공개됐다. 그리 성공적인 흥행은 아니었지만 “자연스러운 로컬색” 묘사와 “체코영화를 생각나게 하는 소박한” 스타일이 인상적이라고 평가받았다. 흥미롭게도 이후 오사카의 아사히회관(朝日會館) 상영에서는 조선인 관객들이 몰려 성황을 이뤘다고 기록된다.
“극영화라고 하면서도 영화의 반 이상은 조선 그 자체의 실제 풍경을 넣은” “반실사풍의 작품”이라는 당시 ‘한강’에 대한 평가에서 엿볼 수 있듯이, 방한준은 극영화와 기록영화의 사이에서 사실주의적인 작법을 선보이며 조선영화의 예술적 지향과 상업적 판로를 동시에 만족시켰다. ‘로컬 컬러’란 화두는 조선영화의 양식적 지향이자 생존 전략이었던 셈이다.
하지만 그 결과는 어떠했을까. ‘한강’ 이후 도와상사의 조선영화 배급 사례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처럼, 일본 시장에서 조선영화는 일본영화와 독일, 프랑스 등 유럽영화의 틈바구니에서 예술영화로 인정받기 힘들었고, 큰 상업적 성공을 불러오지도 못했다. 무엇보다 제국이 원하는 이데올로기 역시 좀처럼 만족시키지 못했다. 조선영화인들은 조선의 향토색을 묘사하는 예술영화로 검열을 피해 갔지만, 이제 일제는 상업적인 극영화에도 국책선전영화로서의 역할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1930년대 후반, 조선의 민간영화사들이 주체가 돼 ‘조선영화’란 상업적 가능성을 타진해 본 시간은 그리 길게 지속되지 못했다. 1940년을 전후한 일제의 전시체제 속에서 조선영화는 또다시 요동치기 때문이다.
정종화 한국영상자료원 선임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