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부모가 손주 양육을 도맡아 하는 ‘황혼육아’에 의존하는 이들이 적지 않습니다.
30일 통계청에 따르면 부부 2명 중 1명은 부모님에게 육아 도움을 받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문제는 5060대 의지와는 무관하게 황혼육아에 내몰리는 경우가 많다는 점입니다.
전문가들은 성인 자녀와 노부모를 동시에 부양하는 가구가 손자 육아까지 떠맡을 가능성이 높고, 이로 인해 경제적 문제가 생겨 빈곤층으로 전락할 수도 있다고 우려하고 있습니다.
◆“부부 절반, 부모님에게 육아 도움 받는다”…황혼육아 내몰리는 5060대
입시에 성공하려면 엄마의 정보력, 아빠의 무관심, 할아버지의 재력이 필요하다는 말이 있는데요. 최근 ‘할머니의 운전 실력’이 추가됐습니다. 할머니·할아버지가 손주의 육아를 넘어 교육에도 적극 참여하는 세태를 풍자한 말입니다.
학부모 모임과 학원 일정 관리, 숙제까지 조부모 손길이 닿고 있는 상황입니다. ‘학조부모’, ‘할머니 치맛바람’이라는 말도 유행하는 시대입니다.
우리나라 가정 10가구 중 4가구는 맞벌이입니다. 전체 부부 가구 중 비율은 1990년 15%에서 2010년 37%로 급증했고, 2013년엔 41.4%까지 높아졌는데요.
2017년 맞벌이 가구는 545만6000가구로 절반 가량(44.6%)을 차지했습니다.
맞벌이 부부뿐 아니라 한부모 가정 증가도 황혼육아 부담을 가중시키고 있다는 지적입니다. 통계청에 따르면 2017년 이혼 건수는 10만6000건였는데요. 우리나라 이혼율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9위, 아시아 국가 중 1위입니다.
미래에셋은퇴연구소가 발간한 '2018 미래에셋 은퇴라이프 트렌드 조사' 보고서를 보면 노부모와 성인 자녀를 부양하는 5060대 '더블케어'(자녀 양육, 부모 간병 동시에 해야 하는 상황) 691가구 중 손주 양육에도 참여하고 있는 이른바 '트리플케어' 상태에 놓인 가구는 39가구였습니다.
손주가 있는 가구의 절반 이상은 황혼 육아를 경험하는데요. 젊은층이 맞벌이를 지속하려면 어린 자녀를 다른 사람에게 부탁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처럼 황혼육아는 늘어나고 있으나 경제적 보상은 미미한 수준입니다.
트리플케어 중인 5060대 10가구 중 3가구(28.2%)만이 손주를 돌보면서 자녀에게 정기적으로 양육수고비를 받았는데요. 매월 약 55만원 정도에 그치고 있습니다.
양육수고비를 일체 받지 않는 경우도 43.6%에 달했습니다. 손주를 돌보는데 드는 시간과 비용, 체력의 소진을 고려할 경우 상당한 강도의 노동인데 무상으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손주 보느라 체력적으로 힘들지만 자녀에게 수고비 받고 싶진 않아요”
조부모가 양육비 받는 것 자체를 꺼리는 경우도 더러 있습니다.
육아정책연구소가 2015년 황혼 육아를 하는 조부모 500명 중 자녀 양육비를 받지 않는 112명을 대상으로 이유를 조사한 결과, 대다수는 '자녀가 경제적으로 빨리 안정됐으면 해서'(52.7%)라고 답했는데요.
조부모는 손주를 돌보며 제일 힘든 건 '체력적 한계'(55.6%)라고 답했습니다. 스트레스로 심장 등 신체적 질환이나 우울증이 발생하는 경우도 있었는데요.
미국 하버드대학교 보건대학원 연구팀이 4년간 일주일에 9시간 이상 손주를 돌본 60세 전후 노인 1만여 명을 조사한 결과, 동년배 다른 노인에 비해 심장병 발병률이 55%나 높은 것으로 조사됐습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손주를 돌보는 조부모 10명 중 7명은 '여건만 된다면 손주 돌보기를 안 했으면 한다'고 답했습니다.
전문가들은 수명 연장과 취업난, 만혼 등으로 트리플케어가 보편화할 공산이 크다고 말합니다. 이로 인해 5060대가 경제적으로 어려운 팍팍한 노후생활을 할 수 있다고 입을 모으고 있는데요.
황혼 육아 부담을 덜기 위해 사회 전반 제도 개선 및 관련 정책 활성화가 필요하다는 제언도 나오고 있습니다.
◆해외처럼 조부모 양육수당 지원해야 vs 황혼육아 문화 조장, 도덕적 해이 우려
정부나 광역자치단체 가운데 조부모에게 양육비를 지원하는 사업은 사실상 없는데요. 최근 국회에서 조부모에 대한 양육비 지원 논의가 이루어지곤 있습니다.
무소속 이용호 의원은 지난해 11월27일 손자녀를 돌보는 조부모에게 양육수당을 지급하기 위한 ‘아이돌봄 지원법 일부개정법률안’을 대표발의했습니다.
이용호 의원은 “‘할마’(할머니+엄마), ‘할빠’(할아버지+아빠)라는 신조어가 등장할 정도로 조부모가 아이 양육을 도맡는 경우가 많아졌다”며 “아이돌봄은 국가의 당연한 책무인데도 ‘가족이니까 당연하다’는 사회적 분위기 때문에 이들 ‘할마’, ‘할빠’는 아무런 지원도 받지 못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라고 발의 취지를 밝혔습니다.
현행법은 여성가족부와 지자체가 민간위탁 방식으로 맞벌이 부모 등 아이를 양육하기 어려운 가정에 아이돌봄 서비스를 제공하고, 일부 금액을 지원하도록 하고 있는데요.
다만 최근 잇따르는 아동학대 사건 등으로 상당수 가정이 낯선 돌보미에게 아이를 맡기는 것에 불안감을 느끼거나, 친인척 양육을 선호해 조부모의 도움을 받고 있는 실정입니다.
설령 아이돌봄서비스를 이용하려고 해도 아이돌보미 수급 부족으로 즉시 이용하지 못하고, 기약 없이 대기하고 있는 가정이 많은 상황입니다.
해외 일부 국가는 조부모 양육을 직간접적으로 지원하고 있습니다.
호주의 경우 조부모가 전문대학에서 영유아 교육코스 3단계 이상을 수료하고 자격증을 취득한 후 손자녀의 주양육자로 활동하면 주당 최대 50시간까지 양육수당을 지급합니다.
독일은 일하는 조부모를 위해 급하게 손주를 돌봐야 할 사유가 생기면 최대 10일간의 유급휴가를 줍니다. 영국도 자녀의 육아휴직제도를 조부모가 같이 쓸 수 있도록 '3대를 잇는 가족 공동 육아휴직 지원체계'를 구축한다는 계획입니다.
미국 조지아주는 조부모들이 필요로 하는 공동체 서비스에 대한 정보나 육아 스트레스로 인한 정신건강 상담서비스를 제공합니다.
일각에서는 수당 등 황혼육아에 대한 경제적 지원이 되레 황혼육아 문화를 조장하고, 도덕적 해이를 불러올 수 있다는 우려도 제기되고 있습니다.
황혼육아 지원을 보편적인 보육정책으로 확대하는 건 신중을 기해야 한다는 것인데요.
현재 우린 지금도 기관을 이용하지 않을 때 양육수당이라는 명목으로 부모에게 지급하고 있는데, 조부모 양육수당을 또 지급하는 건 중복지원 논란이 있을 수 있으며 혈연관계 특성상 부정수급이나 재정누수가 우려되는 만큼 자격제한을 둬야 한다는 지적입니다.
김현주 기자 hjk@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