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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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 정권, 'KAL기 폭파범 김현희' 대선 前 국내 송환에 명운 걸어

 

‘대한항공(KAL) 858기 폭파사건’ 범인으로 지목된 김현희(사진 가운데)가 1987년 12월15일 압송되고 있다.  온라인 커뮤니티

 

1987년 11월 발생한 일명 ‘대한항공(KAL) 858기 폭파사건’을 전두환 정권이 대선에 정략적으로 활용하려 한 정황이 외교부가 공개한 30년 전 외교문서(1987~1988)를 통해 31일 확인됐다. 국내 국가안전기획부(안기부)는 사건 직후 북한 공작원 김현희에 의한 폭탄 테러로 수사를 마무리 지었으나 피해자 유족 등이 여러 의혹을 제기하며 재수사를 요구해 왔다. 

 

외교부는 이날 88서울올림픽대회 개최, 대한항공 858기 폭파사건, 등의 내용이 포함된 1602권(약 25만여쪽) 분량의 1988년 외교문서를 해제했다.

 

외교부는 1994년부터 26차에 걸쳐 총 2만6600여권(약 370만쪽)의 외교문서를 공개해왔다. 공개된 외교문서 원문은 외교사료관 내 ‘외교문서열람실’에서 열람할 수 있다.

 

‘KAL 858기 폭파사건’은 1987년 11월28일 이라크 바그다드 국제공항에서 승객 115명을 태우고 이륙한 대한항공 보잉707 기종의 KE858편 비행기가 아랍에미리트(UAE)의 아부다비 국제공항을 거쳐 서울 김포공항으로 도착하기 전 중간 기착지인 방콕 돈므앙(Don Mueang) 국제공항을 향하던 도중 인도양 상공에서 사라진 사건을 말한다.

 

당시 경유지였던 아부다비 국제공항에서 내린 일본인 남녀 승객 2명은 걸프항공 GF003편으로 다음날 바레인공항에 도착했다.

 

이후 KAL858기가 공중 폭발을 일으킨 후 실종됐단 소식이 전해졌다. 당시 조사에 착수한 바레인 경찰당국은 두 사람이 위조여권을 사용했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로마로 출국하려던 이들을 12월1일 검거했다.

 

검거된 남성의 신원은 김승일(하치야 신이치·60)과 김현희(하치야 마유미·25)였다. 이들은 부녀지간으로 위장하고 있었으며 검거 후 담배갑에 숨겨뒀던 맹독성 독극물인 청산가리를 깨물어 극단적 선택을 했다. 

 

이 과정에서 김승일은 사망했지만 김현희는 살아남았다.

 

대한항공의 보잉707 기종의 KE858편 비행기. 온라인 커뮤니티

 

이날 외교부가 공개한 문건에는 전두환 정권이 ‘KAL 858기 폭파사건’을 1987년 대선을 위해 정략적으로 활용한 정황이 담겨 있었다.

 

문건에 따르면 정부는 범인으로 지목된 김현희가 붙잡혀있던 바레인에 박수길 당시 외교부 차관보를 특사로 파견했다. 태국과 미얀마 일대에서 수색이 이뤄졌으나 기체 잔해는 발견되지 않은 시점이었다. 

 

당시 특사로 바레인에 파견된 박 차관보와 바레인 측 논의 내용을 담은 1987년 12월10일 문건 전문을 보면, 전두환 정권이 KAL 858기 폭파사건 범인 김현희를 당시 있었던 대선(1987년 12월16일) 전에 국내로 데려오기 위해 적극적으로 노력했음을 알 수 있다.

 

바레인 정부가 김현희의 신병 인도에 대한 결정을 미루자 미국이 개입했을 수 있다고 박 차관보가 의심하는 내용도 담겼다. 박 차관보는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주바레인 미국대사관 쪽이 제공한 언론인 제보를 12월8일 윗선에 보고했다. 여기에는 “바레인 외무장관은 하치야 신이치(김승일)와 마유미(김현희)가 바레인에서 음독자살을 기도하며 사용했던 앰플 독약물이 반드시 북괴제조라고 단언하기에 충분한 증거가 있다고 할 수 없다.

 

마유미가 KAL사건에 연루됐다는 결정적인 증거가 없다”는 내용이 포함됐다. 미국 정부가 KAL 858기 실종을 단순 북한 측 테러로 규정짓는 데 의구심을 보였다는 것이다. 

 

수사를 담당했던 바렌인 정부도 미국 측과 비슷한 의견을 내놓았다. 바레인 외무장관은 9일 박 차관보와 만난 자리에서 “(마유미의 한국) 인도문제 해결에 적극적으로 협조하겠다”라며 “국제여론의 비난을 받지 않기 위해 마유미의 신원확인 등 보다 구체적인 증거를 한국 쪽이 문서로 제출해 주는 것이 필요하다”고 요구했다.

 

10일까지 바레인 당국 실무자 선에서 “KAL기 잔해가 발견되지 못한 상황에서 김현희의 인도는 성급하다는 이야기도 없지 않다”는 이야기도 나왔다.

 

이 와중에 박 차관보는 바레인 내무장관에게 “한국이 대통령 선거로 인해 극히 바쁜 와중에 방문해 조속히 귀국해야 할 것으로 이해한다”고 선거를 의식한 발언을 했다.

 

박 차관보는 “마유미의 인도가 선거 이후가 되도록 미국이 바레인 측에 작용했을 가능성도 완전히 배제할 수 없으니 마유미 인도문제와 관련해 미국 측에 너무 소상한 정보를 주지 않는 것이 좋을 것으로 사료된다”라고 보고했다.

 

박 차관보는 “KAL기 잔해도 발견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에서 (김현희) 인도가 성급하다는 이야기도 없지 않다”라며 “늦어도 (대선 전날인) 15일까지 도착하기 위해서는 12일까지는 바레인 측으로부터 인도 통보를 받아야 한다”고 전했다.

 

‘늦어도 15일까지 도착’이라고 시점을 못 박은 것은 대선(12월16일)을 염두에 둔 날짜로 보인다. 해당 사건을 정치적으로 활용하려는 한 정부의 의도를 짐작할 수 있다.

 

박 차관보는 바레인이 애초에 합의한 김현희의 이송일(12월13일 오후8시)을 5시간 앞두고 이송 일정이 연기되자 “커다란 충격”이라며 “너무나 많은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면서 바레인 정부를 압박한 정황도 드러났다. 결국 하루 뒤(14일) 김현희의 이송이 승인돼 김현희는 전두환 정부 계획대로 대선 전날인 12월15일 한국에 도착했다.

 

이후 사건 수사를 담당한 안기부는 이듬해인 1988년 1월15일 KAL 858기 폭파 사건을 ‘88 서울 올림픽’ 방해를 위한 북한의 소행으로 확인했다고 발표했다. 

 

또한 김현희로부터 “북한 조선노동당 대외정보조사부의 공작원으로서 지령을 받고 KAL 858기를 폭파했다”는 자백을 받아냈다고 했다. 김현희는 1990년 3월27일 대법원에서 사형 선고를 받았다가 같은 해 4월 사면됐다.

 

그러나 KAL 858기 유족들은 언론 인터뷰 등을 통해 김현희의 자백만으로 수사가 끝난 ‘KAL 폭파사건’에 대해 의문을 제기했다. 물증도 없고, 기체는 물론이고 시신과 유품도 찾아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당시 안기부는 유족에게 사건이 발생한 바다에 식인상어가 많아서 시신을 찾을 수 없으며 물살이 급해서 기체도 찾을 수 없다는 식으로 답변했다. 2006년 8월과 2007년 10월 두 차례에 걸쳐 국가정보원 과거사건 진실규명을 위한 발전위원회가 이 사건을 재조사했고 “조작이 아니다”라는 결과를 발표했다. 

 

KAL 858기 가족회와 KAL 858기 사건 진상규명대책본부는 지난해 7월27일 전두환 전 대통령 자택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사건의 진상 규명을 요구했다. 연합뉴스

 

유족들은 사건 두 차례의 정부 수사에도 끊임없는 의문을 제기하며 재수사를 요청해왔다. 

 

KAL 858기 가족회와 KAL 858기 사건 진상규명대책본부는 지난해 7월27일 전 전 대통령 자택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김현희는 전두환 정권이 주도한 군사정부의 정권 연장을 위해 이용됐던 도구이자 권력의 주구에 지나지 않았다”며 사건의 주범이 전 전 대통령이라고 주장했다.

 

또 11월20일 사고 31주기를 맞아 서울 중구 프레스센터에서 사고 현지 전면 재수색과 철저한 진상 규명을 요구했다.

 

지난달 20일 정부 관계자에 따르면 국무총리실과 국토교통부, 기획재정부 등 관계 부처는 KAL 858기 폭파사건의 추가수색 여부를 논의하고 있다.

 

장혜원 온라인 뉴스 기자 hodujang@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