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양호 한진그룹 회장이 8일 숙환으로 별세했다. 사인은 폐질환으로 알려졌으나 ‘갑질 논란’ 등 일가에 끊이지 않은 잡음과 사내 이사 연임 실패 및 수백억 횡령 의혹을 비롯한 여러 악재가 조 회장의 병세를 키웠을 거란 관측이 조심스레 제기된다. 재계 관계자는 “그동안 스트레스와 사내이사직 연임 실패로 건강 문제가 악화된 것 같다”고 안타까워했다.
◆온 가족이 지탄받는 사건 잇따라
그럴 만도 했다. 조 회장의 장녀인 조현아 전 대한한공 부사장이 연루된 이른바 ‘땅콩 회항’사건이 신호탄이었다. 이는 조 전 부사장이 2014년 미국 뉴욕 JFK공항에서 승무원의 마카다미아 서비스를 문제 삼으며 비행기를 게이트로 되돌린 사건이다. 그는 항공법 위반 혐의로 검찰 수사를 받으며 부사장직을 내려놓았다. 지난해엔 조 회장의 차녀인 조현민 전 대한항공 전무가 광고 제작 회의에서 광고대행사 직원에게 욕설과 함께 물컵을 집어던졌다는 ‘물컵 갑질’ 논란에 휩싸였다. 검찰은 조 전 전무에 대해 ‘혐의 없음’ 처분을 내렸지만 국민적 공분을 막기엔 역부족이었다. 장남인 조원태 대한항공 사장은 지난해 ‘대학 부정 편입학’ 의혹을 받았다. 입학 자격이 되지 않는데도 1998년 인하대 경영학과에 편입학했다는 혐의다. 교육부 조사 결과 학사 학위 취득 자격 미달인 점도 드러났다. 이에 교육부는 인하대 조 사장의 입학이 부정하다며 입학과 학사 학위를 취소했으나 인하대는 이에 불복해 현재 행정소송을 진행 중이다.
조 회장의 부인인 이명희 전 일우재단 이사장은 운전기사나 자택에서 일하는 직원들에게 ‘갑질 폭행’을 일삼았다는 비판을 받았다. 운전기사 얼굴에 침을 뱉거나 직원의 허벅지를 발로 차고 물컵, 화분, 밀대 등을 던졌으며 욕설을 한 혐의 등으로 기소돼 재판을 받고 있다.
◆조 회장 본인도 코너에 몰려
조 회장 자신도 맘 편할리가 없었다. 대한항공 납품업체들로부터 기내 면세품을 취급하는 과정에서 총수 일가가 지배한 페이퍼컴퍼니(서류상 회사)를 통해 중개수수료 196억원을 받은 혐의(특경법상 배임)로 기소되는 등 270억원 규모의 횡령·배임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상태였다.
특히 지난달 27일 대한항공 주주총회에서 사내이사 연임에 실패했다. 1999년 4월 아버지 고(故) 조중훈 회장에 이어 대한항공 최고경영자(CEO) 자리에 오른 지 20년 만이다. 오너 일가의 갑질 파동 등에 따른 국민 여론 악화와 적지 않은 주주의 반발이 그를 끌어내렸다는 평가가 많았다. 이에 대해 한진그룹 측은 “국민연금이 절차 논란 속에서 연임을 반대했고, 일부 시민단체에서도 연임 반대를 위해 조 회장을 흔들었다”면서 “대한항공이 14분기 연속 영업흑자를 기록하는 등 안정적인 영업이익을 창출하고 있는 가운데 내려진 안타까운 결과였다”고 말했다.
그가 재판일이었던 8일 별세하며 사건은 ‘공소권 없음’으로 종결될 전망이다.
재계 관계자는 “조 회장은 유명한 워커홀릭인데, 그동안의 스트레스와 더불어 대한항공 사내이사직 연임 실패가 큰 상실감으로 작용했고 건강상의 문제가 악화된 원인이 됐던 것 같다”며 안타까워했다.
조 회장은 1974년 대한항공에 입사한 이후 한진정보통신 사장을 거쳐 1992년 대한항공 사장직을 맡았다. 이어 1999년 대한항공 대표이사 회장, 2003년 한진그룹 회장 자리에 올랐다. 2004년부턴 국제항공운송협회(IATA) 집행위원회 위원을 맡았고, 2014년 평창 동계올림픽 조직위원장을 지낸 바 있다.
나진희 기자 najin@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