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동대문운동장 터에 들어선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가 올해 개관 5주년을 맞았다.
거대한 우주선으로 불시착한 듯한 DDP는 서울을 넘어 한국의 랜드마크, 세계적인 디자인 허브가 됐다.
세계일보는 DDP를 운영하는 서울디자인재단(대표 최경란)과 협업해 ‘서울의 디자인 이야기’를 12회에 걸쳐 연재한다.
건축과 디자인, 패션 등 DDP와 연관된 분야별 디자인의 과거와 현재, 미래를 짚어 본다.
◆너무 많이 만들어내고 너무 많이 버려왔다
올해 1월 초 필리핀으로 불법 수출된 한국산 쓰레기 6500t이 되돌아오게 됐다는 민망한 소식이 들려왔다. 중국의 플라스틱 수입 중단으로 갈 곳을 잃은 쓰레기가 가격이 폭락하고 급기야 산더미처럼 쌓여 뒤처리 방안이 마땅치 않자 이런 사단이 벌어지고 만 것이다.
육중한 컨테이너에 실려 머나먼 외국까지 소풍을 다녀온 쓰레기들은 잠시나마 귀한 대접을 받았다고 할 수 있다. 경북 의성군 벌판에 몇 년 동안 쌓여만 있는 17만t의 쓰레기들은 애물단지 그 자체다.
온 나라가 쓰레기로 몸살을 앓으면서 그동안 우리가 너무 많이 만들어내고 너무 많이 버려온 게 아닌가를 뒤돌아보게 된다. 경제성장이 환경재앙으로 귀결되고 말았으니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인가.
◆세상에 버릴 것은 없다
쓸모없어 버리는 물건을 우리는 쓰레기라고 한다. 사실 쓰레기는 함부로 써서는 안 되는 말이다. 쓰레기는 물건이 제 역할을 다하고 남은 나머지 부분일 뿐 아무 가치가 없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재고로 쌓여있다 폐기되는 공산품, 유행 주기가 짧아지면서 버려지는 수많은 물건들, 유통과정에서 파생되는 막대한 포장재 등도 모두 귀중한 자원이 될 수 있다.
쓸모를 되살리거나 기계적·화학적으로 변화시켜 다시 사용해 자원을 절약하고 폐기물 양도 줄일 수 있다. 수십 년 전부터 시작된 3R(절약·Reduce, 재사용·Reuse, 재활용·Recycle) 운동은 이런 사회문제에 눈뜬 시민들이 세계적 흐름을 만들어낸 것이다. 여기에도 주의할 부분이 있다. 다시 자원을 사용한다고 하면서 오히려 더 많은 에너지를 낭비하는 경우도 많기 때문이다. 따라서 요즘은 자원을 재사용하는 차원의 리사이클을 넘어서 창조적 아이디어와 사회문제 해결의 가치를 더하는 ‘업사이클(upcycle·새활용) 디자인’이 강조되고 있다. 디자인 역사에서 업사이클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지만, 현대 환경오염의 심각성으로 인해 사회적 의미가 매우 커졌다.
◆일상생활 의식주에서의 업사이클
옷은 가장 많이 업사이클 되는 주제로 수선 가게나 리폼 디자인 서비스 등 많은 사례를 주변에서 볼 수 있다. 사철이 뚜렷해 입는 옷의 양과 종류가 많은 우리나라는 옷을 업사이클 하는 다양한 아이디어가 필요하다.
음식도 창의적인 조리법이나 남는 음식의 업사이클로 식비를 줄일 뿐 아니라 토양과 하천 오염도 줄일 수 있다. 예를 들어 간장게장 국물은 그 자체로 생명력을 갖는 음식 소재로 활용할 수 있다. 게장과 간장을 분리해 식탁에 올리면 버려지는 게장의 간장을 줄일 수 있다.
집은 우리 삶에서 가장 비중이 큰 주제다. 오스트리아의 화가이자 환경운동가인 프리덴스라이히 훈데르트바서(1928~2000)는 깨진 도자기나 타일로 건축물의 실내외 표면을 아름답게 만들어 어린이들의 꿈과 상상력을 자극한 생태주의 건축가다. 버려지는 폐기물을 활용한 건축 분야의 업사이클 디자이너였던 것이다. 작은 텃밭이 있는 단독주택이라면 소변을 잘 발효시켜 거름으로도 쓸 수 있다. 지구상 생명체 존재를 가능케 하는 흙과 공기와 물을 독성물질 오염으로부터 벗어나게 할 수 있기에 집의 업사이클은 가장 영향력이 넓고 깊다. 서울시에서만 하루에 발생하는 건축 폐기물이 3만t이 넘는다고 하니 건축 분야의 업사이클 기술과 디자인으로 환경 문제에 효과적으로 대처할 수 있을 것이다.
◆업사이클 안 되는 것이 없다
일상의 의식주에서뿐만 아니라 우리 사회의 모든 영역이 업사이클 대상이 될 수 있다. 비무장지대(DMZ)를 생태 교육 및 관광 지역으로 업사이클 하면 분단과 대치의 땅이 생명과 평화가 깃든 녹색 공감의 장이 된다. 이념 대결의 흉물로 비극의 상징이었던 철조망으로 상징 기념물을 만들었다고 하는데, 아이로니컬하지만 긍정적인 의미를 부여하고 싶다.
2017년 9월 서울 성동구에 문을 연 서울새활용플라자에는 청년들이 중심이 돼 사회문제 해결에 나선 업사이클 기업들이 많이 입주해 있다. LED(발광다이오드) 불량품을 사용해 전기가 없는 저개발 국가나 재난 지역에서 아이들이 책을 읽게 해주는 제품, 아프리카의 수인성 질병을 막기 위한 물 소독기를 개발하는 활동도 하고 있다. 버려지는 스펀지로 스탬프 도장을 만들어 치매 노인을 돕는 예술치료 활동 키트도 나왔다.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들의 순백 목련 상징을 새겨넣은 친환경 핸드백을 젊은 층이 자부심을 갖고 애장할 수 있게 한 기업도 있다. 업사이클이 자원 순환뿐만 아니라 사회문제를 해결하는 의미 있는 영향력을 미치고 있음을 보여준다.
◆곳곳에 살아있는 환경학교를 만들자
골프장도 업사이클 주제가 될 수 있다. 티 박스에서 50m 정도는 잔디를 심지 않아도 되고 모래 벙커를 더 크게 만들어 배치를 잘한다면 잔디를 심기 위해 제초제와 물을 뿌려대는 낭비를 줄여 환경에 큰 도움이 되고 인기 있는 친환경 골프장이 될 것이다.
서울 난지도의 하늘공원과 노을공원은 98m 쓰레기 산으로 만들어진 쉼터다. 난지도 땅속까지 투명한 엘리베이터를 설치한다면 그 속을 오르내릴 때 우리는 어떤 모습을 보게 될까. 토목공사 비용이 많이 들고 어렵다면 작은 구경의 투명관만이라도 심고 그 속으로 내시경을 넣어주면 된다. 실시간으로 쓰레기 산 깊숙한 내부를 전국 학교에 생중계해 쓰레기 문제의 실상을 생생하게 느끼게 해주는 환경학교로 활용할 수 있다.
◆없어져야 될 말, 업사이클
몇 년 전 겨울방학 어린이 디자인 체험교실에서 있었던 에피소드가 생각난다. ‘의식주 모든 삶에서 반으로 줄이자’라는 메시지를 위해 1/2이라는 글씨를 크게 그려넣은 티셔츠를 보여주며 수업하고 마지막에 질문이 있느냐고 묻자 초등학교 1학년 남학생이 물었다. “1/1을 줄이면 안 되나요?” 깜짝 놀라 “분모와 분자가 무엇인지 아느냐”고 묻자, “알아요, 하지만 쓰레기는 하나도 버리지 않고 싶어요”라고 했다. 미래의 아이들이 모두 이런 마음으로 살아갔으면 하는 생각을 하며 벅찬 감동으로 수업을 마쳤다.
‘업사이클’, ‘업사이클 디자인’이란 말을 들을 때마다 부활의 경이로움보다는, 대량생산·대량소비 사회에서 덧없이 버려지는 물건을 뒷수습하는 번거로운 일을 처음부터 없도록 만드는 게 우선이라 생각한다. 업사이클은 헌 옷이나 오래된 가죽점퍼로 보기 좋은 지갑이나 멋진 가방을 만드는 등 좁은 의미의 디자인 차원을 넘는 엄청난 뜻이 들어 있다. 불요불급한 물건을 만들지 않고 아끼고 줄이는 절제된 삶의 성찰이 우선돼야 한다.
◆모든 것이 나
‘나는 미처 몰랐네, 그대가 나였다는 것을. 달이 나이고 해가 나이거늘. 정녕 그대는 나일세.’ 무위당 장일순은 업사이클에 대한 복잡하고 어지러운 단상을 이 한 구절로 명쾌하게 정리해준다. 모든 사물이 배제돼야 할 존재가 아닌 나 자신이라는 세계관이다. 나와 상대를 일체로 보는 입장이 돼야 마땅하다는 무위당의 일갈은 우리가 아무 생각 없이 버리는 물건도 그냥 지나칠 수 없게 한다. 그것들이, 모든 것들이 결국 나라는 것이다. 페트병이 곧 나, 헌 가죽점퍼와 청바지가 곧 나, 김밥 싼 알루미늄이 곧 나, 휴전선의 철조망까지도 곧 나라는 생각이 들 때 업사이클 하는 일이 즐겁고 정의롭게 된다. 업사이클 디자이너와 시민들이 모두 가슴에 심어야 할 의식이다.
잘못한 것이 없는데 버려져 혐오의 대상이 된 그 모든 것들에 새 생명을 줄 수 있다면 얼마나 대단한 일인가. 그것이 진정한 업사이클의 시작이다.
윤호섭 국민대 시각디자인학과 명예교수 (국내 1호 환경 디자이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