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고령 현역 화가’. 태경(台徑) 김병기(103) 화백에게 붙는 수식어다. 한국 현대 미술사는 그를 빼놓고 말할 수 없다. 단순히 최고령이 아닌 현역인 점이 중요하다.
서울 종로구 가나아트센터에서 김 화백의 국내 7번째 개인전이 열리고 있다. 전시 제목은 ‘여기, 지금’(Here and Now). 2016년 탄생 100주년 기념전을 연 뒤 그린 신작 등 19점을 다음 달 12일까지 선보인다.
지난 11일 센터 뒤편 북한산 끝자락에 있는 자택 겸 작업실에서 만난 김 화백은 만감이 교차하는 모습이었다. 그는 “그림을 몇 점 내놓고 전람회를 하는 심정이 ‘황홀한 약함’ 속에 있다”고 말문을 열었다.
◆추상미술 1세대… 영감 원천은 ‘여기, 지금’
“황홀을 붙이는 건 약함을 숨기는 것도 있어요. 백 살이 넘어 새 그림으로 전람회를 하는 일은 세계 역사상 없습니다. 축복이라 생각하고 자부심이 있어요. 강하고 약한 것이 내게 모두 있죠.”
그의 말은 과언이 아니다. 기네스북 웹사이트에 세계 최고령 화가를 검색하면 나오는 미국인 켄 발드는 지난달 99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영감의 원천은 전시명대로다. 김 화백은 “지금 여기서 영감을 받는다”고 했다. 지난해 그린 ‘다섯개의 감의 공간’은 집 앞뜰 감나무에서 영감을 얻었다.
평양이 고향인 그는 한국의 추상미술 1세대다. 17세 때 일본으로 유학을 가 추상미술과 초현실주의에 눈을 떴다. 1940∼1960년대 격변의 시기, 온전히 그림에 집중할 수 없었다. 서울대와 서울예술고에서 후학을 양성하고 한국미술협회 이사장 등을 맡으며 현대미술의 이론적 기틀을 닦았다.
“그림만 그릴 수 있는 세월이 아니었어. (한국 현대미술) 틀을 만드는 데 20년간 정열을 기울였어. 다 작가 외적인 일이지. (1965년 제8회 상파울루비엔날레에 커미셔너와 심사위원으로 참여한 뒤) 작품을 하려고 미국에 간 거야. 억지로 떨어졌어. 그때 미국에 가지 않았으면 오늘의 나는 없어요. 미국에서 형상성이 있는 구상을 하기 시작했지. 추상과 오브제를 거치고 수공업적이고 원초적인 선으로 (작품 활동을) 하는 겁니다.”
◆“초현실주의 이해 빈약… 단색화 나라 아냐”
김 화백은 “한국이 추상에 대한 개념은 좀 발달했는데 초현실주의에 대한 개념은 빈약하다”며 미술사 강의에 나섰다. 목소리가 쩌렁쩌렁했고 기억은 정확했다.
“1924년 프랑스 파리에서 앙드레 브르통이 주동이 돼 모든 걸 부정하는 다다(다다이즘)를 계승하며 예술 양식은 긍정하는 주장이 일어났어요. 그게 초현실주의야. 추상은 외부적인 거고 초현실은 정신 내부에 속하는 거예요. 추상과 초현실주의가 결부돼야 현대미술을 이해할 수 있어요. 나는 추상과 초현실주의를 마음속에 비교적 많이 내포하고 있습니다. 초현실주의는 르네 마그리트, 살바도르 달리에서 끝났어. 강의처럼 돼 미안합니다. 용서하세요.(웃음)”
그림을 개념적으로 그리면 안 된다는 게 김 화백의 지론이다. 1953년 ‘피카소와의 결별’이란 글을 발표해 파블로 피카소를 비판한 이유다. 그는 “당신이 한국을 제대로 봤더라면 당신이 알고 있는 그런 공식으로는 그릴 수 없을 것”이라고 일갈했다. 피카소는 1951년 로봇 병사들이 여성과 아이들에게 총칼을 겨누는 ‘한국에서의 학살’을 그려 파장을 일으켰다.
“피카소를 지금도 존경해요. 뭐가 잘못됐느냐, 개념적으로 그렸어. 내가 본 학살은 그런 게 아니었어.”
김 화백은 6·25전쟁 당시 국방부 종군화가단 부단장을 하며 전쟁의 참상을 목격했다. 최근 한국의 단색화 열풍에 대해서도 쓴소리를 아끼지 않았다.
“우리는 단색화의 나라가 아니야. 상당히 컬러풀한 나라야. 컬러풀이란 게 울긋불긋한 것만이 아냐. 식물성 염료로 만든 치마저고리 같은 고상한 색들 있잖아요. 다른 나라에는 없어. 앞으로 아주 컬러풀한 그림을 그리겠어. 그래서 지금 노란색부터 나오는 거야.”
강렬한 터치의 검은 선이 특징인 다른 작품들과 달리 최신작 ‘산의 동쪽-서사시’는 보는 이를 압도하는 샛노란 색이 두드러지는 연유를 비로소 이해할 수 있었다.
◆“세계서 문화 수준 높아… 젊은이들 긍지를”
김 화백은 “그림 몇 장으로 (사람들이 갤러리 등을) 방문해주는 나라, 한국은 전 세계에서 민도(문화 수준)가 가장 높다”며 한국 찬양론을 설파했다. 그는 “젊은이들이 긍지를 가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미국에 갈 때 나무가 없었어요. 폐허였어. (지금은) 나무가 가득 있고 빌딩이 올라가 있어. 사람이 땅을 딛고 사는 게 중요한데 빌딩이란 박스에 들어가 있는 삶이 과연 이상적인가. 땅을 밟고 살 수는 없어요. 인구가 많아 땅이 없어. 이런 근본적인 문제를 연구해야 해요. 우리는 상당한 고비를 겪고 이만큼 됐어요. 우리나라를 만들어 가는 건 여러분 마음에 달려 있습니다. 나는 덤으로 사는 사람이야. (젊은이들이) 어떻게 해 나가는지 똑똑히 보고 있어.”
전날 밤늦게까지 개막식을 치른 김 화백은 약 1시간30분간 거의 혼자 얘기하며 물 한 모금 마시지 않았다. 웃을 때는 영락없는 소년이었다.
박진영 기자 jyp@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