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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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가 덧씌운 ‘콘크리트’ 185t…20년이 흘렀다

익산 미륵사지 석탑 20년 보수…장엄한 모습 드러내 / 새 모습 찾은 ‘익산 미륵사지 석탑’… 키워드로 본 보수공사 20년/ “국보 다칠라” 일일이 수작업 / 수술용 칼 등으로 긁어 제거 / ‘9층 vs 6층’ 원형 진위 논란 / 해체 도중 ‘사리장엄구’ 발굴 / “문화재 보존기술 대폭 성장”

20년이 흘렀다. 붕괴 위험성이 제기되어 해체 보수를 결정한 게 1999년이었다. 강산이 두 번 바뀔 시간이 걸려서야 ‘익산 미륵사지 석탑’(국보 11호)의 새모습 찾기는 마침표를 찍었다. 

 

30일 전북 익산 미륵사지에서 석탑 보수작업 준공식이 열렸다. 

 

익산 미륵사지 석탑. 국립문화재연구소 제공
30일 전북 익산 미륵사지석탑 준공식 참석자들이 20년간의 보수정비 공사를 끝내고 높이 14.5m, 너비 12.5m 규모로 모습을 드러낸 석탑을 둘러보고 있다. 연합뉴스
전라북도 익산시 미륵사지터에서 30일 열린 서쪽 석탑 보수정비 준공식에서 시민들이 20년간 보수복원 공사를 끝내고 공개된 서쪽 석탑(뒷쪽)을 관람하고 있다. 앞쪽은 1993년에 지어진 동탑. 연합뉴스

 

우리나라 석탑 중 가장 규모가 크고 창건시기가 명확하게 밝혀진 석탑 중 가장 이른 시기에 건립된 것이다. 고대의 탑양식이 목탑에서 석탑으로 변화되는 과정을 충실하게 잘 보여준다는 점 등에서 동양권으로 시야를 넓혀도 비교불가의 가치를 가지는 문화재다. 워낙에 주목도가 높은 유물이라 보수를 위해 큰 공을 들였고, 지역사회, 불교계, 문화재계 등에서 석탑의 보수를 둘러싼 주문과 요구, 논란도 이어졌다.  

 

석탑과 석탑 보수 20년에 얽힌 주요사건, 과정, 특징 등을 키워드로 정리해본다. 

 

#콘크리트

 

콘크리트는 석탑을 인상을 결정하는 요소 중 하나였다. 잘 알려져있다시피 일제강점기에 석탑의 붕괴를 막기 위해 발라 놓은 것이었다. 

 

1910년에 촬영된 사진을 보면 석탑은 위태롭게 서 있다. 약간의 힘만 가해도 무너질 듯하다. 일제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1915년 남쪽, 서쪽 면에 콘크리트를 덧씌웠다. 당시로서는 최신의 재료를 활용한 것이었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석탑의 인상을 망치는 흉물이 되어 갔다. 해체 보수 결정을 내린 이유 중 하나가 되기도 했다. 구조안전진단 결과 콘크리트 노후화와 구조적 불안정이 우려가 됐던 것이다. 

 

일제강점기에 석탑 붕괴를 막기 위해 덧씌운 콘크리트.

석탑 보수작업에서 콘크리트를 떼어낸 것은 중요한 공정 중 하나였다. 기계를 사용하면 수월할 것이나 이로인한 충격 때문에 석탑의 기존 부재들이 손상될 위험이 컸다. 이 때문에 석공들이 정이나 망치 등을 사용해 깨뜨리고, 부재 표면에 붙어 있는 콘크리트는 수술용 칼 같은 도구를 사용해 긁어냈다. 4년 정도 걸린 끝에 떼어낸 콘크리트 양은 약 185t이었다. 

 

#9층(?) 6층(!) 

 

석탑의 보수 범위를 둘러싼 논란이 뜨거웠다. 석탑은 형태가 남아 있던 6층까지 수리하였으나 원래의 형태로 추정되는 9층까지 복원해야 한다는 요구가 적지 않았다. 보수 작업에 나선 김에 보다 완전한(?) 형태로 되살려보자는 의도였지만 7층 이상은 원형을 입증할 수 있는 자료가 전혀 없다. 석탑이 원래 9층이었다는 것조차 확실하지 않았다.

 

이 문제를 어떻게 정리할 지는 석탑의 진정성 확보 차원에서 중요한 사안이었다. 추론에 근거한 복원이 석탑의 가치를 떨어뜨리는 결과를 낳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반면교사가 된 게 미륵사지의 동탑이다. 미륵사지에는 두 개의 탑이 서 있는데 보수작업을 거친 것이 서탑이고, 1992년 9층으로 세워진 게 동탑이다. 원형을 간직한 서탑을 참고한 것이기는 하나 두 탑이 같은 형태였는지조차 알 수 없어서 동탑은 ‘20세기 문화재 복원 최악의 사례’로 꼽힌다.

 

최악의 문화재 복원사례로 꼽히기도 하는 미륵사지 동탑.

진정성의 측면에서 또 하나 주목할 것이 부재의 재활용이다. 석탑을 구성하고 있는 기존의 석재들을 다시 쓰는 것이다. 석탑이 세워지고 1000년이 넘는 시간이 흐르면서 기존 석재들은 약화될 수밖에 없었다. 이를 그대로 사용하면 석탑의 안정성을 해칠 수 있는 요인이 된다. 그러나 새로운 부재로 모두 대체하는 것은 진정성을 훼손할 수 있었다. 이에 따라 문화재청 국립문화재연구소는 기존 부재의 균열 충전, 구조보강, 강화처리 등을 통해 다시 쓸 수 있도록 했다. 보수작업 초기 40% 정도로 예상했던 재활용률은 이런 과정을 거쳐 80%까지 높였다는 게 연구소의 설명이다. 

 

이런 과정을 거친 터라 문화재청은 지난달 석탑이 원형에 맞지 않게 보수되었다는 감사원 감사결과에 당혹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정재숙 문화재청장이 이례적으로 직접 나서 감사결과를 반박한 것은 보수작업의 결과에 대한 자신감의 표현으로 보인다. 

 

#선화공주와 사택적덕의 딸

 

삼국유사는 미륵사의 창건 주체를 백제 무왕과 신라 진평왕의 딸로, 그의 부인이 된 선화공주라고 전하고 있다. 한국고대사의 가장 극적인 러브스토리로 꼽을 만한 ‘서동요 설화’의 주인공이다. 삼국유사의 문헌적 특성상 이 기록을 곧이 곧대로 받아들일 수는 없으나 미륵사와 석탑하면 두 사람을 떠올리는 게 자연스러웠다. 

 

미륵사지 석탑 해체 과정에서 발견된 사리장엄구.

그런데 석탑 해체 도중 ‘사리장엄구’가 나오면서 창건 주체가 누구인지를 두고 분분한 이야기가 오갔다. 사리장엄구는 2009년 1월, 석탑 1층에서 발견됐다. 사리를 담은 사리호, 석탑 조성 내력을 밝힌 금제 사리봉안기, 백제 특유의 장식물인 은제 관식 등이 함께 나왔다. 사리장엄구 발견은 석탑 보수과정에서 가장 화제를 모은 일이었을 뿐만 아니라 백제금동대향로 발굴에 버금가는 한국 고고학의 큰 사건으로 기억되고 있다. 

 

특히 관심을 끈 것이 사리봉안기였다. 앞면에 99자, 뒷면에 94자를 새겼는데, 미륵사는 무왕 재위 40년이 639년에 창건되었음을 밝히고 있고, 창건의 주체는 ‘좌평(백제의 관직) 사택적덕의 따님’으로 명시해 놓았다. 

 

설화와는 다른 구체적인 기록이 등장하면서 미륵사와 관련된 선화공주의 위상은 흔들릴 수밖에 없었다.

 

사리봉안기의 해석에 대한 이즈음 학계의 논의는 “선화공주를 버리기에는 아깝다”는 정서가 짙게 배어 있다. 발견 직후 열린 한 학회의 참석자는 “무왕의 왕비가 여러 명이 있었다는 기록도 있는 만큼 미륵사를 발원한 사람이 선화공주가 아니라고 단정하기에 이르다”고 주장했고, 다른 참석자는 “역사적 사실과 설화적 사실은 전혀 다르다. 선화공주 이야기는 봉안기 내용과 관계가 없다”고 말하기도 했다.    

 

익산=강구열 기자 river910@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