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정의 달과 어머니
‘가정의 달’로 불리는 5월이 왔다. 어린이날과 어버이날을 기념하기 위한 식사 자리를 잡으려면 분주히 예약을 해야 한다. 번거롭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그럼에도 평소에 전하기 힘든 감사의 뜻을 전할 기회다. 어린이날은 어린이가 있는 집과 없는 집의 분위기가 확연히 다르다. 어버이날은 어느 가정이든 애틋함으로 가득 찬다. 부모님에 대한 감사의 마음은 시간이 지날수록 커진다. 그 노고에 대한 깨달음이 더해지기 때문이다.
미술사를 전공하며 여성주의를 처음 배웠다. 이런 내용의 작품은 대부분 진보적인 형태를 가지고 있어 받아들이기에 시간이 걸렸다. 학교를 마칠 때까지도 이해하지 못했던 것 같다. 그러던 중 우연히 알게 된 한 작가의 작품과 말이 마음을 울렸다. 윤석남(80)은 모성을 매개체로 삼아 여성의 역사, 여성으로 사는 삶에 대한 작업활동을 펼친다. 모성을 여성의 한계가 아닌 여성만이 가질 수 있는 특징이자 힘이라고 말한다. ‘어머니’의 모습이 담긴 작품을 보자 나의 어머니가 떠올랐다. 공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중산층 가정의 여성, ‘나’를 찾기 위해 붓을 들다
“40세가 되던 해, 1979년 4월25일 (서울 종로구) 인사동에 갔어. 거기 가서 화구를 사고 얼마나 신이 났던지. 그때 기억이 아직도 생생해.”
윤석남 작가가 작가로서의 삶을 시작한 이야기를 들려줄 때 가장 인상 깊었던 건 이 말이었다. 40여년 전 이야기이지만 작가는 처음 화방에 가서 화구를 샀던 날짜를 정확히 기억한다. 그때의 기쁨과 희망, 감동의 크기를 상상해 볼 수 있다.
윤석남은 1939년 만주에서 여섯 남매 중 셋째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을 그곳에서 보내고 해방 소식이 전해지며 한국에 왔다. 6·25전쟁 뒤 아버지가 병으로 세상을 떠나면서 당시 39세의 어머니가 6남매를 홀로 키웠다.
윤석남은 또래 여성들처럼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직장생활을 시작했다. 규모가 꽤 큰 회사에서 타이피스트(타자수)로 일하다 남편을 만났다. 그와 결혼해 시어머니를 모시며 신혼살림을 꾸렸다. 아이를 낳고 키우며 아내와 엄마, 며느리로서의 삶에 충실한 채 10여년이 넘는 시간을 보냈다.
서울 반포에 위치한 중산층의 화목한 가정. 그 테두리 안에 살던 윤석남은 남의 눈에 부러울 것이 없어 보였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가끔 행복을 느끼고 대부분의 시간 동안 우울을 경험했다. 문젯거리가 없는 생활 속에서도 이상하게 마음이 타들어 갔다. 뜨거워진 가슴의 열을 한숨으로 내뱉기 일쑤였다.
이 불씨를 사그라뜨리기 위해 그는 아파트 방 2개를 터서 작업실을 만들었다. 유년 시절 그림에 소질을 보이며 갖게 된 작업에 대한 열망이 항상 마음에 있었기 때문이다. 남편에게 화가로서의 삶을 살겠다고 선언했다. 누구보다 가정을 돌보는 데 충실했던 그를 아는 남편은 그 제안을 곧 받아들였다. 남편의 월급봉투를 통째로 들고 인사동을 찾았다. 화랑에 그림을 보러 간 적은 있었지만, 화방에 그림 그릴 재료를 사러 간 건 처음이었다. 물감과 붓을 고르니 심장이 쿵쾅거렸다.
#회화와 설치를 넘나드는 한국 여성주의 대모의 탄생
중년에 들어서 작가로서의 그림을 처음 그렸다. 그 나이 즈음에 취미를 그림으로 삼은 사람들은 대부분 꽃과 풍경을 그린다. 윤석남은 붓을 드는 동시에 어머니를 그렸다. 고민할 필요도 없이 처음 그려야 하는 대상은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사람, 어머니였다.
윤석남은 만주에서 한국으로 들어오던 기차에서의 기억이 아직도 선명하다. 혼란스러운 기차 속에서 어머니는 여린 팔로 자식들을 끌어안으며 지켜 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어머니는 항상 자식들을 위해 최선을 다했다. 늦은 시간에 일을 마치고 돌아오면 잠든 아이들을 깨워 간식을 먹고 카드놀이를 하자면서 긍정적 낙관을 잃지 않게 했다. 또 도스토옙스키의 ‘죄와 벌’,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을 읽어 주며 깨어 있는 인간의 태도를 알려줬다.
윤석남에게 가장 중요한 건 그런 어머니였다. 어머니를 모델로 삼아 2년간 그림을 그렸다. 이 작품들로 1982년 문예진흥원미술회관(현 아르코미술관)에서 첫 개인전을 열었다. 그 뒤 약 10년 동안은 여성 작가인 김인순, 김진숙과 함께 ‘시월모임’을 결성해 동인으로 활동했다. 한국 사회의 불평등에 대항한 집단적인 목소리를 내는 여성 미술가들의 움직임에 동참하기 시작했다. 윤석남이 이 시기에 발표한 작품들은 노동하는 여성의 이미지로 민중미술로서도 중요하게 읽힌다.
1983년에는 미국 뉴욕으로 유학을 떠났다. 학교에서 그림을 배우며 동시대 뉴욕 화단에서 일어나는 페미니즘 미술, 포스트모더니즘 미술, 설치미술의 새로운 국면들을 체화했다. 첫 개인전 이후 벽에 걸어야 하는 평면작업에 답답함을 느끼던 작가의 작업세계가 새로운 형태로 변화하는 극적인 체험이었다. 그는 이 체험을 ‘작품이 벽에서 이렇게 튀어나올 수도 있구나’라는 깨달음을 얻은 것이었다고 회상한다.
귀국 후 나무를 이용해 입체감 있는 작업을 하기 시작했다. 버려진 나무를 주워 그 위에 먹으로 여성을 새기고 색을 입혔다. 이런 시도는 곧 설치작품으로도 연결돼 발전했다. 윤석남의 설치작품은 국제적으로 높이 평가받는다. 2016년 영국 런던의 세계적인 현대 미술관인 테이트에서 ‘금지구역Ⅰ’(1995)을 소장했다. 워싱턴의 국립박물관인 스미스소니언, 내셔널 포트레이트 갤러리에서는 ‘어머니 Ⅲ’(1993, 2018년 재제작)를 전시 중이다. 윤석남은 한국 여성주의 대모로 불리며 회화와 설치를 넘나드는 활발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
#여든이 다 되어서야 그린 ‘나’의 모습
제12회 광주비엔날레가 열리며 주요 미술 행사가 응집했던 지난해 가을, 그중 가장 감명 깊었던 건 서울의 한 갤러리에서 열린 윤석남의 개인전 ‘윤석남’이었다. 그는 이 전시에서 대표작 ‘핑크룸 V’(2018)와 수년간 배워온 채색화 신작을 선보여 작품성을 느끼게 했다. 그는 “나를 주제로 삼아 선보이는 첫 전시”라고 말했다.
작가는 40여년간 수많은 전시를 열었다. ‘윤석남’전 이전의 전시는 대부분 어머니를 통해 여성의 강인함을 상징하는 내용이었다. 이를 위해 이매창, 허난설헌 등 역사적 여성은 물론 자신의 어머니와 할머니 등을 내세웠다. 정작 자신은 화면 뒤로 물러나 있었다. 여든이 다 되어서 작가는 화면 앞에 섰다. 진짜 ‘나’의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
‘자화상’(2017)은 윤석남이 자신을 그린 최근 작품 중에서도 눈길을 끄는 작품이다. 정면을 응시하는 작가의 눈에서 강직하고 당당한 기운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읽던 책과 안경을 내려놓은 채 앞을 바라보는 작가의 휘날리는 파마 커트가 자유롭다. 눈에서 뿜어지는 기운이 화난 사람처럼 보이기도 한다. 부드러운 미소를 가진 실제 모습과 비교해 이렇게 표현한 이유를 물으니 거울을 보면 화난 사람 같을 때가 있다고 답했다. 그것이 아마도 자신만 볼 수 있는 내면의 모습이 아닐까라는 설명을 덧붙였다.
한국 여성주의 미술의 대모로 일컬어지니 최근 몇 년간 두드러지게 보이는 페미니즘 운동에 대한 질문을 받기도 한다. 혼란 속 길잡이가 될 만한 훌륭한 이야기가 많은데 그중 가장 짧으면서도 임팩트 있는 대답은 “그냥 자기 자신으로 살면 돼요”란 말이다.
윤석남은 모성의 의미를 소극적으로 받아들이지 않기를 바란다. 희생으로서 편협하게 해석하면 오히려 반여성적인 의미가 될 수 있다며 경계한다. 그에 따르면 모성은 아이를 낳고 키우는 범주의 것이 아니라 물질문명으로 파괴되고 있는 세상을 복원하고, 사랑하고 보듬는 힘이다. 모순적인 우주의 삶 자체를 보듬을 수 있는 힘 말이다.
이번 어버이날에는 어머니에게 위대한 힘을 가진 사람에 대한 존경심을 담아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어머니가 어느 때보다 기뻐하시는 눈치였다.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과 수원시립아이파크미술관에서 윤석남 작품을 포함한 전시가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주말에는 부모님과 전시를 보러 가볼까 한다.
김한들 큐레이터, 국민대 미술관·박물관학 겸임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