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선쿠션으로 얼굴은 반짝반짝. 립크레용으로 입술은 촉촉” 어린이 대상의 한 화장품 브랜드가 유튜브에 올린 홍보영상의 문구다. TV프로그램을 통해 얼굴이 알려진 A(4)양이 등장하더니 자신의 손보다 크기가 큰 파운데이션을 들고 화장을 시작한다. 이어 붉은색 립크레용을 쥐고 입술에 바른다. 화장을 마친 A양은 화면을 바라보며 묻는다. “○○이 이뻐?” 15초 분량의 이 영상은 어린이가 화장을 하면 예뻐질 수 있다고 말한다. 백화점에 단독 매장도 있는 이 브랜드는 선쿠션, 립크레용, 스티커네일, 마스크백 등 30여종의 어린이용 화장품을 판매하고 있다.
#2. 서울 영등포구의 한 대형쇼핑몰에 위치한 키즈카페는 주말이면 여자아이들로 발디딜 틈이 없다. 이 키즈카페에 있는 어린이 전용 뷰티숍을 이용하기 위해서다. 이곳에서 어린이들은 얼굴 팩부터 네일, 족욕 등의 서비스를 받는다. 이용료는 키즈카페 이용료 외에도 추가요금을 내야 하지만 주말이면 예약이 찰 정도로 인기다.
최근 화장을 하는 어린이와 청소년이 늘면서 이들을 대상으로 하는 ‘어덜키즈’(adult+kids·어린이가 어른을 모방하는 현상) 시장이 부상하고 있다. 과거의 어덜키즈족이 어른을 흉내 내는 수준에 그쳤다면, 이제는 어덜키즈족을 겨냥한 맞춤형 제품이 출시될 만큼 성장했다. 하지만 화장 열풍이 중고생을 거쳐 초등학생과 미취학 아동에게까지 확산하면서 지나친 상업주의가 어린이의 화장을 부추긴다는 비판이 높다. 특히 어릴수록 피부가 연해 피부 트러블 등 부작용 위험에 노출될 수 있고, ‘인체에 무해하다’고 검증된 제품을 이용하지 않을 경우 건강 위험은 더 커질 수 있다는 우려도 많다. 하지만 어린이와 청소년용 화장품 관리 실태는 허술한 것으로 알려져 애꿎은 학부모들의 고충만 키운다는 지적이 적지 않다.
◆어린이 놀이문화로 정착하는 화장
10일 녹색소비자연대에 따르면 2017년 초·중·고 여학생 3087명을 대상으로 진행한 설문조사에서 초등학교 여학생의 42.7%가 ‘색조화장을 해본 적 있다’고 답했다. 이들 중 ‘색조화장을 주 1회 이상 한다’고 응답한 비율은 50.5%로 절반을 넘었다. 중학생과 고등학생은 73.8%와 76.1%가 색조화장을 경험했다고 답했고, 81.3%와 73.4%는 주 1회 이상 색조화장을 하는 것으로 파악됐다.
초등학생과 미취학 여자아이들을 겨냥한 화장품 시장도 급성장하고 있다. 어린이를 겨냥한 제품의 종류와 제품을 접할 수 있는 경로가 다양해지면서다. 온라인 쇼핑몰 11번가의 지난해 어린이 화장품 거래액은 전년 대비 338% 증가했다. 11번가의 어린이 화장품은 2016년 1월 기준으로 12종이 인기리에 판매됐는데 지난해 말에는 117종으로 늘어났다. 슈슈코스메틱, 봉봉프랜즈, 뿌띠슈, 컬러비 등 관련 브랜드만 수십 가지다.
특히 학교 근처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는 화장품 매장들은 어린이들이 화장에 쉽게 접근하게 한다. 문제는 어린이들이 이런 공간에서 또래와 보내는 시간이 늘면서 화장이 ‘놀이문화’로 정착된다는 점이다.
8세 딸을 둔 이모(36)씨는 “어린이집에서 뷰티숍에 다녀온 친구 얘기를 듣고 가고 싶다고 조르는 통에 애를 먹었다”며 “또래 사이에선 화장을 경험하는 게 놀이처럼 여겨지는 것 같다”고 말했다. 7살 된 딸을 키우는 정모(39)씨는 “애들 사이에서 화장이 유행하다 보니 어린이날 선물로 화장품을 사 달라고 하더라”며 “다른 애들도 한다는데 우리 애만 뒤처질 수 있겠다는 생각에 사주게 된다”고 토로했다.
◆“피부 장벽 약해 피부 트러블 유발할 수도”
어린이나 청소년의 화장은 피부 건강에도 유해하다. 어린이의 경우 피부 장벽이 약하기 때문에 과도한 화장은 자극이 될 수 있다. 청소년 시기에는 호르몬 변화로 피지 분비가 왕성해져 화장이 모공을 막고 피부 트러블을 유발할 수 있다. 좁쌀만한 종기나 여드름, 피부가 붉어지는 현상 등은 화장을 잘못했을 때 생기는 부작용이다.
어린이 화장으로 인한 부작용 사례도 심심찮게 들려온다. 최근 국내에서는 어린이용 매니큐어를 발랐다가 손톱이 빠지고 염증이 생기는 사례가 있었다. 지난해 영국에서는 어린이 화장품을 쓴 아이의 피부에 물집과 발진이 생겨 논란이 되기도 했다.
어린이용 화장품 시장이 급성장하는 상황인데도 어린이 화장품에 대한 관리는 별도로 이뤄지지 않고 있다. 지난해 식품의약품안전처는 어린이를 대상으로 하는 화장품을 ‘어린이용 제품류’로 구분하고 성분과 표시 기준을 강화하려 했지만 ‘어린이용 화장품을 구분하면 어린이의 화장을 부추길 수 있다’는 시민단체의 반발에 철회했다. 대신 식약처는 어린이를 대상으로 하는 화장품에 대한 관리를 강화하는 ‘어린이 화장품 보존제 함량 표시제’를 도입하기로 했다.
김주덕 성신여대 교수(뷰티생활산업국제대학)는 “어린이용이라고 나온 화장품 가운데 색조 화장품의 경우 어른들이 쓰는 것과 성분상의 차이가 거의 없다”며 “최근 나온 색조 화장품들은 밀착감을 높아 깨끗이 지우지 않으면 색소침착이나 알레르기를 유발할 수 있다”고 말했다.
◆화장 다음은 성형?…“과도한 외모지상주의 부추겨”
어린이들의 화장 열풍은 지난해 미투 운동과 함께 일어난 ‘탈코르셋 운동’에 역행하는 측면도 있다. 탈코르셋 운동은 여성 억압의 상징으로 여겨지는 ‘코르셋’에서 벗어나자는 취지로, 여성을 상징하는 메이크업, 하이힐, 긴 머리 등에서 자유로워지는 것을 말한다. 하지만 최근의 화장 열풍은 아이들로 하여금 ‘예뻐야 한다’는 인식을 끊임없이 주입시킨다는 지적이 높다.
김주덕 교수는 “어린이 스스로가 화장에 관심을 갖는 것도 이유이겠지만, 화장품 회사들이 어린이를 고객으로 보고 마케팅을 펼치면서 화장을 부추기는 측면이 있다”며 “이런 외부 요인으로 화장을 시작한 어린이들은 나이가 들수록 미적 기준도 높아져 성형과 같은 더 강력한 수단을 찾을 수 있다”고 우려했다.
외신들도 한국 어린이와 청소년의 화장 열풍이 이례적이라는 반응이다. 미국 워싱턴포스트(WP)는 지난달 한국 어린이의 화장 열풍을 집중 조명하면서 “‘K-뷰티’로 시장을 선점한 한국 화장품 업계가 새로운 고객으로 어린이들에게 주목한다”고 분석했다. 그러면서 “화장 열풍이 어린이들에게 외모에 대한 가치를 주입할 우려가 있다”고 지적했다. 미국 경제지 쿼츠도 한국의 외모지상주의를 언급하며 “어린이들이 너무 어린 나이에 화장을 시작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다만 어린이들의 화장 열풍을 흑백논리에서 판단하기보다 원인을 짚어봐야 한다는 목소리도 있다. 김중백 경희대 교수(사회학)는 “아이들이 화장을 왜 하는지 살펴보면 화장하는 것 외의 놀이문화나 또래문화가 부재하기 때문”이라며 “화장을 하라고 권장하긴 어렵지만, 마냥 부정적으로 보는 것은 세대갈등만 조장할 수 있다”고 말했다.
김 교수는 과도한 게임을 막기 위해 도입했던 ‘셧다운제’를 예로 들며 “기성세대의 관점에서 아이들과 생각이 다른 것을 틀리다고 판단하기보다 적정 수준의 긍정적인 방향으로 유도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제언했다.
권구성 기자 ks@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