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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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영미의영화산책] 가족사랑

자신을 성범죄자로 신고한 의붓딸을 살해하고 시신을 유기한 사건은 최근 우리 사회를 경악하게 했다. 영화보다 더 끔찍한 사건이 현실에서 일어나곤 한다. 2008년 오스트리아에서 발생한 ‘요제프 프리츨 친딸 감금 성폭행 사건’은 친아버지가 딸이 11살 되던 때부터 강간을 일삼고, 17세가 되자 도주를 우려해 방공호 용도의 지하실에 24년간 감금한 뒤 7명의 아이까지 출산하게 만든 사건이다. 이 사건을 모티프로 아일랜드 작가 에마 도너휴가 쓴 소설 ‘룸’은 2010년 맨부커상을 수상했고, 작가가 직접 각본을 쓴 영화 ‘룸’(감독 레니 에이브러햄슨)이 2015년 개봉해 엄마 역의 브리 라슨에게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안겼다.

영화 ‘룸’은 17세에 강간범에게 납치돼 7년간 좁은 방에 감금된 채 살아가는 조이(브리 라슨)와 아들 잭(제이콥 트렘블레이)의 이야기로 각색됐다. 소설에서도 다섯살배기 아들 잭의 시점으로 어둡고 무거운 사건이 동화적으로 채색됐고, 영화에서도 그 톤은 유지된다. 영화의 전반부는 태어날 때부터 방에 갇혀 TV를 통해서만 세상을 보는 잭과 엄마 조이의 삶의 모습에 초점을 맞춘다. 불행한 상황 속에서도 지극한 모성애를 지닌 조이의 덕분으로 잭은 TV 속 세상을 상상에서만 그리며 살아간다. 그러나 방 바깥에 리얼한 세상이 있다고 아무리 말해도 믿지 않는 잭의 상태를 심각하게 여기게 된 조이가 아들을 위해 탈출을 결심하면서 긴박감을 더해간다. 조이는 잭에게 죽은 척하다가 도망치는 방법을 치밀하게 훈련시키고, 강간납치범인 잭의 아버지는 병사한 것으로 보이는 잭을 자신의 트럭에 싣고 동네 바깥에 버리고자 한다.

후반부는 탈출에 성공한 잭이 조이와 함께 조부모의 집에서 살게 되면서 ‘룸’에서의 상처 치유과정이 그려진다. 영화는 사건 자체보다는 가슴 깊이 박힌 상처를 어떻게 회복해 가는가 하는 심리변화에 초점을 맞춘다. 조이는 잭이 엄마인 자신을 얼마나 사랑하는가를 깨달으며 극단적인 선택에서 놓여나는 힘을 얻는다.

영화 ‘룸’은 충격적인 사건을 모티프로 하고 있지만, 가족 간의 사랑과 애틋한 친밀감이 어떤 상황도 이겨낼 수 있게 한다는 것을 그린다. 윌리엄 워즈워스가 ‘어린이는 어른의 아버지’라고 ‘무지개’에서 노래한 것처럼 영화 ‘룸’은 아이의 순수한 시선으로의 회복이 험난한 세상을 이겨낼 수 있게 한다는 것을 역설적으로 깨닫게 한다.

황영미 숙명여대 교수·영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