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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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물의 늪에서 날 꺼낸 건… 진실한 ‘공감’이었습니다 [밀착취재]

“약물중독 탈출, 우린 함께 이겨 나가요”/ 회복 모임 ‘NA’… 서로의 처지 이해/ 의지 약해질 땐 격려하며 응원도

“A씨는 제가 처음부터 지켜봐 왔는데 벌써 4년이라니, 감회가 새롭네요.”

 

지난 14일 오후 7시쯤 서울 강남구 학동역 부근 한 교회 건물 지하 1층에서 열린 NA(Narcotics Anonymous·익명의 약물중독자들) 모임에서 중독자 B씨는 이렇게 말하며 중독자 A씨를 힘껏 껴안았다. 곁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다른 중독자 10여명이 환호하며 박수를 쳤다. 모두 제 일처럼 기뻐하는 얼굴이었다.

 

A씨가 단약(약물 중단)한 지 4년 되는 날이었다. 이날 그는 ‘4년 단약’을 기념하는 열쇠고리를 받았다. 단약 기간에 따라 회원들에게 주어지는 열쇠고리 색깔이 다르다. A씨가 받은 검은색 열쇠고리 뒷면엔 ‘단약 및 평정 유지’라고 적혀 있었다.

 

A씨는 “이 모임을 찾기 전, 병원에선 중독 회복을 위해 그저 일하라거나 운동이나 규칙적인 생활을 하라는 게 전부였다. 그것만으론 크게 효과를 보지 못했다”며 “NA 모임에 참여해 회복을 바라는 다른 중독자를 만나면서 큰 도움을 받았다. 약물중독은 다른 중독자와의 관계 속에서 제대로 회복 가능하다”고 말했다.

 

NA 모임에서 활동 중인 한 중독자가 14일 오후 서울 강남구 학동역 부근 한 건물 지하에서 진행된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단약(약물 중단) 계기와 회복 과정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하상윤 기자

약물중독자들은 처벌 이후 어떻게 회복하는가. 기자는 이 질문의 답에 대한 힌트를 얻고자 NA 모임을 찾았다. NA는 약물중독 증세의 회복을 바라는 중독자들이 모인 순수 민간단체다. 최근 강남 유명 클럽 ‘버닝썬’ 논란으로 마약범죄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높아지면서 사정당국은 마약류 사범에 대한 집중단속에 나섰고, 그 결과 최근 2개월 만에 마약류 사범 1600여명을 검거했다. 그들은 조만간 법적 절차를 거쳐 형사처벌을 받게 된다. 그러나 처벌은 치유를 보장하지 않는다. 약물중독은 범죄 이전에 병이다.

 

회복하지 못한 이들은 다시 약물을 찾는다. 법무부 자료에 따르면 지난해 기준 마약사범 재범률은 36.6%였다. 향정신성의약품(필로폰, 엑스터시 등)의 경우 40.8%였다.

 

NA 모임의 중독자들은 다른 중독자와 주고받는 지지 속에서 회복하고자 하는 의지를 다지고 있었다. 이날 1시간여 진행된 모임에서 이들은 서로의 이야기를 경청하는 모습이었다. 그 과정에서 웃거나 손뼉을 쳤고, 눈물을 보이다 손을 잡거나 서로를 껴안았다. 그들이 나눈 이야기도 가지각색이었다. 누군가는 약을 중단하면서 살이 쪄 걱정이란 고민을 얘기했고, 다른 누군가는 장기간 단약 중인 중독자 친구에 대한 질투심을 고백했다. 어떤 이는 자신을 걱정하는 부모님에 대한 마음을 말했고, 다른 이는 예전 일로 경찰 수사를 받고 있다고 털어놨다.

 

◆‘회복’ 위해 ‘용서’를 구하다

 

“원한, 두려움, 죄책감이 사라졌어요.”

 

이날 4년간 단약한 기념으로 열쇠고리를 받은 A씨는 모임이 끝나고 진행한 개별 인터뷰에서 “예전에는 남 탓을 하면서 약을 한 것 같다”며 그간 변화한 자신의 상태에 대해 말했다. 그는 10여년 전 유학 중 마약을 처음 접했고, 얼마 안 가 중독됐다. 대마, 엑스터시, 필로폰, 코카인 등 어지간한 약물은 다 해봤다. 한국에 돌아와서도 약물을 찾았고 그러다 4년 전 형사처벌을 받았다.

 

그렇게 3개월 동안 구치소에서 복역하던 중 그는 처음 자신이 한 행동에 두려움을 느꼈다고 했다. A씨는 “정신 나간 짓을 했단 걸 깨달았다”고 말했다. 약에 취한 사이 그는 8억원 정도 빚을 졌다. 그 과정에서 도박을 했고 사기를 쳤다. 친한 친구 부친의 장례식 조의금에도 손을 댔다. 같이 약을 했던 지인이 우울증으로 스스로 목숨을 끊은 일도 있었다. 구치소를 나와 병원에 입원했고 의사로부터 NA 모임 참석을 권유받았다.

 

A씨는 “NA가 제시하는 12단계 프로그램을 거치면서 나를 돌아보고 과거의 묵은 감정을 정리하기 시작했다”며 “자연스레 약물에 대한 충동이 잦아들었다”고 설명했다. 12단계 프로그램이란 중독자가 회복하기 위해 밟아나가야 할 과정을 명시한 것이다. 자신의 현 상태에 대해 인정하기, 자기 잘못을 이야기하기, 그간 자신이 손해를 끼친 상대에게 보상하기 등이 그 내용이다. A씨는 이 과정을 거치며 어렸을 때 본인이 때렸던 친구부터 그간 사기 피해를 준 이들까지 30여명을 만나 용서를 구했다. 그는 “17년간 거리를 두고 지냈던 부모님께도 세족식을 해드리면서 죄송한 마음을 전했다”고 했다.

 

2011년부터 NA 모임에 나오고 있다는 중독자 C씨는 12단계 중 자기 잘못을 이야기하고 보상하는 단계를 이행하기 위해 오는 주말 지방에 계신 어머니를 만날 예정이라고 했다. 그는 20여년 전 고등학교 졸업 이후 우연히 한 남성에게서 필로폰을 건네받아 중독됐다. 2008년 단약하기까지 총 7차례 형사처벌을 받았다. 그중 2000년에 받은 처벌은 당시 C씨의 방에서 주사기를 발견한 어머니의 신고 때문이었다. C씨는 “시간이 지나 약을 끊으면서 관계는 좋아졌지만, 지금까지도 어려웠던 때 얘기를 직접 하고 잘못을 시인하진 못했다”며 “중독은 단지 드러난 증상일 뿐 그 이면에 숨은 제 결점을 마주해야 완전히 회복할 수 있단 걸 알게 됐다. 이번에 어머니를 만나 더 완전한 회복의 계기를 만들 것”이라고 밝혔다.

 

◆중독자의 전화 한 통

 

이들의 회복 과정을 지탱한 건 무엇보다 서로의 처지를 이해하는 다른 중독자와의 교류였다. C씨는 “NA 모임 멤버들의 사사로운 얘기를 듣는 거 자체로 치료를 받는 것 같다”며 “이제 이 모임을 떠나서는 회복할 수 없다는 생각까지 든다. 또 하나의 가족을 만난 느낌”이라고 말했다.

 

NA 모임에 나온 지 이제 두 달이 됐다는 중독자 D씨는 NA 모임에 참여 중인 다른 중독자의 전화 한 통이 자신을 ‘회복의 길’로 들어서게 했다고 밝혔다. 고등학교 2학년 때부터 부탄가스를 흡입하기 시작한 그는 군 복무 중 휴가를 나와 가스를 흡입하다 전신의 28%가량 화상을 입는 사고를 겪기도 했다. D씨는 교도소에서 1년6개월을 살고 지난 3월 출소했다. 그는 당시 가벼운 마음으로 NA 홈페이지에 기재된 연락처로 전화했다 받지 않아 포기한 터였는데, 그날 밤늦게 부재중 전화를 확인하고 걸려온 중독자 A씨의 전화 덕에 여태까지 NA 모임에 빠지지 않고 나올 수 있었다고 했다.

 

중독자 E씨는 지난해 1월 치료감호소에 수용돼 중독자 모임을 갖다 올해 4월 출소한 뒤 NA 모임에 참석 중이다. E씨는 “그간 정신병원도 여러 곳 가봤는데 거긴 그냥 약만 주고 결국 수면유도제로 잠을 재우는 게 전부였던 것 같았다”며 “제 경우에 병원은 큰 도움이 되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는 고등학교 1학년 때 접착제 흡입을 시작으로 약물에 손을 대 20년 가까이 중독 상태로 지내왔다. 수감과 출소를 반복하며 시간을 흘려보낸 E씨는 회복 중인 다른 중독자들을 만나면서 자신도 다른 삶을 살 수 있다는 확신을 갖게 됐다고 했다. 그는 “같은 처지인 중독자들에게 단약을 결심한 이후 제 경험을 매주 터놓고 얘기하니 후련한 기분이 들고 스트레스 또한 사라졌다”며 “스트레스는 갈망을 불러 중독자에게 약물을 찾게 한다. 이제 저는 그런 갈망을 느끼지 않는다. 그 정도로 제 마음에 단단한 뭔가가 자리를 잡았단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김승환·유지혜 기자 hwan@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