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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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의 벽에 적응하려 ‘무소유’의 삶… ‘가심비’ 따지는 청춘들 [연중기획 - 청년, 미래를 묻다]

경험·체험 중시하는 2030 / 청년 실업률 11.5%… 20년래 최고치 / 취업·연애·결혼 포기한 채 팍팍한 삶 / 도움 없이 내집 마련은 꿈같은 얘기 / 저축해서 부동산·자동차 구매 대신 / 여행비·공연 관람에 아낌없는 지출 / 자동차·주거 공유문화 갈수록 확산 / “집부터 사야지” “내일은 알 수 없어” / 기성세대와 가치관 달라 갈등 겪어 / “경제상황 변화로 소비문화 달라져”
#1. 최근 작은 규모의 의류 브랜드를 론칭한 이동성(25)씨는 수입이 일정치 않다. 다달이 들어오는 수입은 그가 이전에 아르바이트로 벌던 금액보다 적을 때도 있다. 광주에서 올라온 이씨는 서울에서 집을 살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그는 집 살 돈을 모으는 것보다 위스키를 사 먹거나 유명한 가수의 공연을 보러 가는 것이 사람답게 사는 일이라 생각한다.#2. 공무원 시험을 준비 중인 염모(27)씨는 정기적인 수입이 없다. 수험생 과외를 통해 생활비를 벌고 있지만 고정적으로 나가는 생활비를 쓰고 나면 남는 것이 많지 않다. 하지만 그는 밥값을 줄여서라도 카메라와 부속품을 사 모으는 데 돈을 아끼지 않는다. 그는 사진을 찍을 때만큼은 취업의 압박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다고 말한다.



‘3포 세대’를 넘어 ‘5포 세대’, ‘7포 세대’까지 등장하는 등 한국사회 청년들의 삶이 점점 더 팍팍해지고 있다. 심지어 ‘N포 세대’가 등장하면서 요즘 청년들은 모든 것을 포기하고 산다는 자조의 목소리까지 나왔다. 최근엔 ‘N포 세대’도 옛말이 됐다. 청년들이 포기를 하는 대신 아예 처음부터 가질 생각을 하지 않는 데까지 나아갔다는 분석이 나온다.

◆10년간 1포부터 N포까지 확대

청년들은 자신들이 포기한 것들의 가짓수를 하나둘 불리기 시작했다. 최근 10년간 저성장 시대에 청년들이 가장 먼저 포기한 것은 직업이었다. 수백 대 1의 경쟁률을 뚫어야 대기업에 들어갈 수 있는 탓에 수년간 취업만 준비하는 ‘취업준비생’이라는 말도 생겼다. 취업이 어려우니 자연히 돈을 벌기 어려워졌고, 2010년대 초반에는 연애와 결혼, 출산을 포기하게 됐다. ‘3포 세대’의 시작이었다. 이후 집과 인간관계를 포기한다는 ‘5포’, 꿈과 희망을 포기한다는 ‘7포’가 나왔다.

4일 통계청에 따르면 지난해 취업자 증가폭은 9만7000명으로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 이후 최저치를 기록했다. 특히 4월 기준 15~29세 청년실업률은 11.5%로 1999년 통계 작성 이래 가장 높은 수치를 나타냈다. 연애하는 청년들도 줄어들었다. 지난 1월 보건사회연구원 발표에 따르면 국내 20~44세 미혼 인구 중 이성교제를 하는 비율은 남성이 33.3%, 여성이 36.5%로, 10명 중 3명에 그쳤다. 직장이 없는 사람이거나 소득이 낮은 사람은 그만큼 연애도 덜 한다는 경향성도 보여줬다.

이런 상황에서 내 집 마련은 꿈같은 일이다. 대한부동산학회가 지난해 내놓은 연구를 보면 19~39세 청년들의 90% 정도가 주택 구매를 위해 대출이나 부모의 도움을 받아야만 하는 상황이었다. 현실을 잘 모르는 청년들이 가장 선호하는 주택으로 서울 지역 2억~3억원대 아파트로 꼽았지만 실제 서울의 아파트 평균 매매가는 7억원대다.

◆포기 넘어 ‘무소유’로… 가심비 찾는 청년

이상이 현실의 벽에 부딪히는 경험이 계속 누적되면서 청년들은 포기하기 전에 소유하지 않으려 하고 있다. 무소유를 선택한 이들은 전과는 다른 소비 방식을 보이고 있다. 이를 한 번에 알게 해주는 단어가 ‘가심비’다. 가심비는 가격 대비 마음의 만족을 뜻하는 말로, 가격이나 성능보다 ‘나에게 얼마나 만족을 주는지’가 소비의 중요한 기준이 된 세태를 반영한다. 단 한 번 제품을 사용하고 서비스를 받는다고 해도 주관적 만족을 줄 수 있다면 기꺼이 비용을 지불한다.

가심비를 중시하는 청년들은 그래서 경험과 체험을 찾는다. 기성세대가 다년간 저축해 부동산이나 자동차 등 유형의 재산을 구입했다면, 청년세대는 현재의 다양한 경험을 통해 주관적인 만족도를 높이길 원한다. 여행 경비를 마련하거나 공연이나 전시 등 문화생활을 위한 지출을 망설이지 않는 것도 기성세대와 확연히 다른 청년들의 소비 특성이다.

물론 아예 소유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연예인이나 캐릭터를 상품화한 ‘굿즈’는 청년들이 대표적으로 소유하는 아이템이다. 남들은 “저걸 왜 사는지 모르겠다”고 하더라도 자신이 만족감을 느낀다면 사 모은다.

모바일 커머스 티몬에 따르면 2017년 11월에서 12월까지 생활필수품의 매출은 감소한 반면 아이돌 굿즈, 여행 상품 등은 전년 대비 3배 이상 늘었다. 업체는 이러한 경향이 미래를 준비하기보다 현재를 즐기는 데 중점을 둔 태도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소유보다 공유하기

경제력이 부족한 청년들이 소유의 대안으로 선택한 것은 ‘공유’다. 공유경제는 기술의 진보와 함께 어려운 경제형편에서 개인의 만족을 극대화하려는 청년들의 특성이 더해져 크게 확산하고 있다.

대표적인 예가 자동차다. 국내 차량등록 대수 중 20∼30대가 차지하는 비율을 보면 2014년 22.2%에서 지난해 19.9%로 감소했다. 대신 공유차량처럼 단기 대여나 장기 대여 이용자는 꾸준히 늘고 있다. 이용자의 87%가 20~30대인 국내 차량공유서비스의 경우 등록회원이 6년 만에 650만명을 넘어섰다.

주거를 공유하는 문화도 늘고 있다. 국내 셰어하우스 대부분은 30~40평대의 아파트나 단독주택에서 각자의 방을 가지고 주방이나 거실 등은 공용으로 이용하는 방식이다. 쾌적한 주거 환경, 한두 달치 월세에 불과한 보증금뿐 아니라 임대계약 단위가 짧아 선택에 부담이 덜하다는 점 등이 장점으로 꼽힌다. 사는 집 외에도 창업비용을 줄여주는 사무공간, 주방 등 공유할 수 있는 공간도 다양해지는 추세다.

◆다른 가치관으로 기성세대와 갈등도

하지만 공유에 익숙하지 않은 기성세대는 소유를 ‘포기’한 젊은이들이 낯설다. ‘얼마나 많이 가졌는지가 성공의 척도’였던 기성세대에게는 우선순위가 분명했다. 내 명의의 아파트와 자동차를 가지는 것이 당장 생활에 필수적이지 않은 물건을 사거나 취미생활을 즐기거나 여행을 가는 것보다 중요하다 여긴다. 이 때문에 세대 갈등이 불거지기도 한다.

20대와 30대의 미혼 자녀를 둔 A(55·여)씨는 “아무리 경제가 어려워졌다고 해도 사람이 살아가는 데 필수적으로 갖춰야 하는 것이 있다”며 “집을 사고 가정을 꾸리려는 생각이 자꾸만 사라지는 것 같다”며 안타까움을 드러냈다. 반면 회사원 B(31·여)씨는 “여전히 과거 기준으로만 잘 살기 바라는 부모님을 설득하기가 어렵다”며 “내일 죽을지도 모르니 하루하루 행복하게 살고 싶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청년들의 ‘포기’가 사회경제적 변화에 따른 것이라면서도 청년들의 적극적인 적응방식이라고 분석한다.

정용수 한국소비자협회 소비자연구원장은 “청년들의 N포는 경제 상황이 변하면서 삶의 방식이나 소비문화도 자연히 변화한 것”이라며 “치열한 경쟁과 취업난이 이어지는 구조에서 최대한의 심리적 만족을 얻기 위한 선택”이라고 설명했다.

최지혜 서울대 소비트렌드분석센터 연구위원은 “경제적 어려움을 타개하기 위한 노력도 있지만 서로 공유하고 소통하려는 욕구가 나타나는 것”이라며 “공유경제 플랫폼과 데이터 같은 새로운 기술환경 위에서 이루어지는 적극적인 소비행위로 봐야 한다”고 말했다.

 

김청윤·이종민 기자 pro-verb@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