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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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롭게 부활하는 ‘은밀한 공간’… 천년 古都에 ‘제2 유물보고’

국립경주박물관 ‘영남권수장고’ 개관 / 작년 신라왕실 보물창고 ‘천존고’ 문열어 / 박물관은 문화재 연구·전시가 주임무 / 수장고는 소장품 모여 ‘미지 영역’ 남아 / 깨지고 녹슨 유물 ‘생명 연장의 꿈’ 실현 / 말갑옷 10년 보존처리… 연내 복원 매듭 / 많게는 매년 수만점 유물 새로 들어와 / 국립박물관 수장률 100% 넘긴 곳 많아 / 공주·대구 적정선의 2배 등 포화상태 / 발굴 유물 가장 많은 영남권역에 ‘숨통’ / 지역 5.8 강진 겪어… 건물은 내진 설계
국립경주박물관에 세워진 영남권수장고 전경. 최소 60만점의 유물을 보관할 수 있는 영남권수장고에는 영남권의 국립박물관에서 선별된 유물들이 모이게 된다.
국립고궁박물관 소장품 5만여점의 거처인 수장고는 구조가 특이하다. 출입문에 들어서고도 지하 4층 깊이로 약 300m를 걸어야 유물을 볼 수 있다. 박물관 사정에 밝은 사람들의 말을 빌리면 이런 구조는 박물관에서 수장고가 가지는 의미를 공간적, 형태적으로 상징화한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지하로 길게 이어지는 복도는 외부와 완전히 단절된, 아무나 들어올 수 없는 은밀한 공간 속으로 걸어 들어가고 있음을 상기시킨다는 것이다. 박물관의 자존심이자 존립의 토대인 소장품이 모인 수장고가 이런 특징을 가지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문화재를 연구, 전시해 널리 알리는 게 사명인 박물관이지만 수장고만은 여전히 미지의 영역으로 남아 있다. 다중으로 설치된 육중한 철문, 관장도 맘대로 드나들 수 없는 출입시스템, 유물의 재질, 상태에 따른 온·습도와 조명 관리 등은 수장고 운영의 특징이다.


국립경주박물관이 지난달 ‘영남권수장고’를 개관했다.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의 ‘천존고’(天尊庫·신라의 왕실 보물창고인 천존고의 이름을 땄다)는 문을 연 지 이즈음 1년이 됐다. 한국을 대표하는 고도(古都)이자 땅만 파면 유물이 나온다는 경주. 오랜 세월을 견딘 유물들이 그만큼의 시간을 살아낼 기운을 얻고, 새롭게 부활하기도 하는 ‘은밀한 공간’ 수장고의 면모를 확인하기에 경주만 한 곳이 있을까.

◆영남의 유물, 경주로 모인다

지방의 한 발굴기관 수장고는 몇 년 전부터 유물로 가득 찼다. 진열대에 놓인 유물 중에는 10여년 전 발굴돼 보고서 정리까지 마무리된 것들도 있다. 상황을 설명하는 관계자의 표정은 밝지 않았다.

“국가로 귀속되는 발굴 유물은 지역 박물관으로 이전돼야 하는데 사정이 그렇질 못합니다. 인력이 부족하고, 관리비용도 만만찮으니 부담스러운 게 사실이에요.”

출토품은 발굴기관에서 임시로 보관하다 문화재청이 지정한 국가귀속처로 옮겨야 한다. 시설, 인력 등을 제대로 갖춘 곳에 유물을 두기 위해서다. 국가귀속처는 지역의 국공립박물관을 중심으로 선정되는데, 사정이 좋지 않기는 마찬가지다. 많게는 해마다 수만 점의 유물이 새로 들어오다 보니 수장고가 포화상태에 이른 것이다. 2017년 6월을 기준으로 전국 14곳 국립박물관 중 수장률이 100%를 넘긴 곳이 9곳이나 된다. 공주박물관(181.2%), 대구박물관(172.1%)은 적정선을 2배 가까이 넘어섰다.

 

수장고를 확장해야 한다는 아우성에 ‘권역별 수장고’가 등장했다. 유물을 권역별로 모으는 거점이다. 호남권에서는 2013년 개관한 나주박물관이 이런 역할을 맡았고, 공주박물관은 충청권의 거점이 될 수장고를 내년에 열 예정이다. 전국 권역 중 발굴 유물이 가장 많은 영남권의 수장고가 경주에 세워진 것이다.

영남권수장고는 지하 1층, 지상 2층, 수장면적 6029㎡(1827평) 규모로 최소 60만점을 수용할 수 있다. 경주·진주·김해·대구박물관의 유물 중에서 가치가 상대적으로 떨어지고, 전시활용도가 낮은 것들이 선별돼 이곳으로 모인다. 15만점가량이 이미 영남권수장고에 자리를 잡았다. 순차적으로 유물 이전이 마무리되면 영남권 각 박물관의 수장률은 70∼80%선으로 떨어질 것으로 보인다.

내부 진열대 모습. 건물과 진열대는 강화된 내진 설계를 한 것이 특징이다.

◆“진도 6 이상의 지진에도 문제없다”

유물의 안전한 보존, 관리가 수장고의 목적이고, 이를 위한 시설, 기능을 갖춘다. 영남권수장고도 다를 게 없는데, 지진에 대비한 설계가 유별나다. 2016년 9월 경주 지역에서 발생한 규모 5.8의 강진을 겪은 것에서 비롯된 특징이다. 경주박물관 이재열 학예연구관의 말이다.

“이런 경험들이 없었으니까 지진이 올 수 있다는 걸 실감하질 못했죠. 강진 이후 지진이 언제든 발생할 수 있다는 위기 의식이 생겼고, 대비를 해야 한다는 것도 확실히 깨달은 겁니다.”

사실 당시 경주박물관의 유물 피해는 없었다. 강진이 발생하기 한 달 전 그보다 약한 규모의 지진이 있어 미리 고정 작업을 해 둔 덕분이었다. 이때의 경험으로 각인된 지진의 위험성에 대비한 설계들이 건축 중이던 영남권수장고에 적극적으로 반영됐다.

건물은 진도 6까지는 충분히 견딜 수 있다고 한다. 진열대에는 ‘면진’(Vibration Isolation) 장치가 적용됐다. 공간 활용률, 유물 관리의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 이동식으로 만든 진열대가 넘어지는 걸 막고, 이동을 위해 깔아둔 레일에서 벗어나는 걸 방지하는 장치를 개발했다. 진열대의 유물이 진동으로 떨어지는 것에 대비한 장치도 적용했다. 이 연구관은 “지진시험센터에서 모의 테스트를 한 결과 진도 6.8까지 안전하다는 것을 확인했다”고 전했다.

◆신라의 말갑옷, 새로운 1000년을 준비하다

길게는 1000년 넘게 땅속에서 시간을 보낸 유물이 깨지고, 녹슬고, 약해져 있는 건 당연하다. 그래서 발굴된 유물은 수장고로 거처를 옮긴 뒤 보존처리를 거치는 경우가 많다. 새로운 시간을 맞기 위한 절차라는 점에서 수장고는 ‘생명 연장의 꿈’이 실현되는 터전이다.

2009년 6월, 신라 지배층의 공동묘지인 ‘쪽샘지구’의 한 고분에서 출토된 마갑(馬甲·말에 씌운 갑옷)은 천존고에서 10년 동안 보존처리를 받고 있다. 마갑을 출토지에서 수장고로 옮기는 것부터가 난이도가 높은 작업이었다. 수많은 미늘을 연결했던 가죽끈이 사라져 섣부르게 옮기려 했다간 형태가 훼손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경주문화재연구소는 고민 끝에 우레탄을 마갑에 씌워 고정한 뒤 통째로 떠냈다. 보존처리에 참여한 직원이 “우레탄을 다시 떼어내는 일이 가장 힘들었다”고 말할 정도로 번거로운 일이었으나 형태를 유지하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보존처리 못지않게 당대의 사용 방식을 밝히는 것도 중요하다. 경주문화재연구소는 신라 당대의 마갑 사용 방식을 밝히기 위한 연구를 지난해 시작했다. 토종마가 지금 흔히 보는 말보다 작은 점을 고려해 몸 높이 약 130㎝인 제주 한라마를 선정, 착용 방식 등을 확인했다. 경주문화재연구소 김동하 학예연구사는 “마갑 복제품을 말에 실제 입혀보는 작업을 거쳤다”며 “마갑 복원은 이르면 올해 안에는 마무리될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경주=강구열 기자 river910@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