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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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에 없지만 어딘가는 있을 것 같은 세상

김초엽 과학소설 ‘우리가 빛의 속도로…’ / 과학도 출신 26세의 젊은 작가 / ‘관내분실’ ‘스펙트럼’ 등 7편 실어 / 난해한 과학적 지식 쉽게 풀어 / 흥미롭게 이야기 이끌어 나가

‘과학소설’이란 과학적 논리를 바탕으로 기술이 작용하는 미래 세상의 다양한 양상을 표현하는 소설의 한 범주를 일컫는다.

흔히 ‘공상’ 과학소설이라는 명칭을 쓰기도 하지만 판타지가 아니라 논리적인 바탕에 기반을 둔다는 의미에서 과학소설이다. 이즈음 국내 작단에도 과학소설을 집필하는 작가들이 늘어나면서 독자들의 호응을 얻고 있는 가운데 연전에는 ‘한국과학소설작가연대’라는 단체도 결성됐다. 이러한 환경에서 2회 한국과학문학상 공모에서 대상과 가작을 동시에 휩쓸며 등장한 김초엽(26)은 이른바 본격문단에도 신선한 울림을 주는 작품들을 연달아 선보여 주목 대상으로 떠올랐다. 그가 이번에 SF소설 7편을 모아 첫 소설집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허블)을 펴냈다.

난해한 과학 지식을 쉽게 풀어서 소설에 활용하는 SF작가 김초엽. 그는 유토피아에서 순례를 떠나는 자신의 소설 속 인물을 통해 “사랑은 그 사람과 함께 세계에 맞서는 일이기도 하다”고 설파한다.

김초엽의 작품들은 과학 지식을 난해하지 않게 풀어서 이야기의 배경으로 삼으면서 이른바 순문학의 여운에 뒤지지 않는 후광을 거느리는 미덕을 지니고 있다. 표제작으로 세운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은 과학적 배경이 아니더라도 인간이 숙명으로 안고 살아가는 이별과 죽음의 의미를 되새기게 하는 작품이다.

중심 화자 ‘안나’는 먼 우주여행을 견디기 위한 동면 기술 ‘딥프리징’을 연구하는 성원이다. 그녀의 남편과 아들은 자원도 풍부하고 살기 좋은 제3행성으로 먼저 떠났고, 자신은 연구를 마치면 합류할 예정이었다. 최종 연구 발표를 하는 날 그 행성으로 마지막 우주선이 떠난다는 소식을 접하고 달려가지만 놓치고 만다. 늙은 그녀는 ‘기다리는 사람들을 위한 우주정거장’에서 더 이상 운행하지 않는 우주선을 속절없이 기다린다.

“우리가 빛의 속도로도 갈 수조차 없다면, 같은 우주라는 개념이 대체 무슨 의미가 있나? … 우리는 점점 더 우주에 존재하는 외로움의 총합을 늘려갈 뿐인 게 아닌가.” 그녀는 ‘슬렌포니아행’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은 채 우주로 투신한다. 다시는 만날 수 없는 이별이란, 죽음의 다른 표현일 터이다. 우리는 역설적으로 죽은 사람이, 이 소설의 안나씨 남편과 아들처럼 개척지 우주로 갔다고 자위할 수도 있지 않을까.

‘엄마가 실종되었다’는 문장으로 이어지는 ‘관내분실’도 같은 빛깔이다. 고인들의 기억과 행동 패턴을 마인드 업로딩을 통해 저장하는 기술이 발달된 세상에서 도서관은 책이나 다른 자료들을 보관한 곳이 아니라 사람들을 추모하는 ‘마인드 도서관’ 기능을 한다.

고인의 인덱스를 찾아 한 사람의 일생에 이르는 깊이 있는 정보 모음을 재생하면 죽은 사람과 가상의 대화를 나누는 느낌을 얻게 된다. 이 소설에서는 ‘지민’의 엄마 인덱스가 사라지면서 도서관에 남아있긴 하되 찾을 수 없는 ‘관내 실종’ 상태에 엄마가 놓인다는 설정이다.

어렵사리 엄마의 마인드 자료를 찾아내 생전에 불화했던 엄마와 대면한 딸의 이야기가 따스하다. ‘스펙트럼’은 외계의 생명체에 대한 이야기로 생의 유구한 이어짐을 긍정케 하는 철학적 함의가 돋보인다. 외계에서 만났다는 이방인 ‘루이’는 할머니를 정성스럽게 돌봐주었다. 그 종족은 몇 년 살지 못하는 숙명인데, 새로 태어난 루이들도 한결같이 할머니를 챙겨주었다. 그들은 ‘색채 언어’로 기록된 할머니에 대한 정보를 접하고 육체의 한 살이를 뛰어넘는 신뢰와 애정을 보여준 것이다. 노을의 붉은빛이 ‘루이’들에겐 ‘말을 걸어오는 풍경’인 셈이다. 우주 공간에서 표류하다 구조된 할머니가 지구로 돌아와 애써 공부해 해독한 색채 언어 기록에 따르면 루이들에게 그녀는 ‘놀랍고 아름다운 생물’이었다.

차별받는 소수자의 삶을 ‘신인류’라는 개념과 더불어 녹여낸 ‘순례자는 왜 돌아오지 않는가’도 과학소설의 외피를 입고 있지만 고통스러운 지구의 현실을 풍자한 단편으로 읽힌다. 이밖에도 ‘감정의 물성’ ‘공생 가설’ ‘나의 우주 영웅에 관하여’ 등이 실린 이 소설집은 과학소설이라는 선입견을 넘어선다.

포스텍에서 화학을 전공하고 바이오센서를 만드는 과학도 출신 김초엽은 “자신이 속해 있는 45억년 역사의 지구라는 공간이 우주 속에서 정말 작은 공간임을 깨닫는 것 같은 ‘경외감’이야말로 과학소설의 중요한 평가기준”이라며 “추상적인 질문들을 구체적으로 표현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흔쾌히 첫 번째 독자가 되어주는 시 쓰는 어머니와 최고의 음악가이자 바리스타인 아버지에게 특별한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는 그녀는 “먼 미래에도 누군가는 외롭고 고독하며 닿기를 갈망할 것”이라고 썼다.

 

글·사진=조용호 문학전문기자 jhoy@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