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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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락가락 해명하다 결국… ‘대기 귀순’ 의혹 불길 청와대로

최초 상황접수 해경, 4분 만에 상황 보고 / 軍 ‘삼척항 내 北어선 정박’ 알고 있으면서 / 경계실패 책임우려 ‘삼척항 인근’ 발표 의심 / 청와대와 사전조율 통해 은폐 의혹 커져 / 합동조사단, 경계실패·허위보고 등 조사
북한 어선이 삼척항 내에 정박한 뒤 우리 주민과 대화하는 모습. KBS 제공

해양경찰청이 지난 15일 아침 북한 어선이 강원도 삼척항에 접안한 채 발견됐다는 신고를 접수한 직후 곧바로 관련 내용을 합동참모본부·해군작전사령부 지휘통제실과 청와대 국정상황실 등에 전파한 것으로 20일 드러났다. 군 당국은 그러나 이른바 ‘대기 귀순’ 사건과 관련해 17일부터 오락가락한 설명으로 일관해 의구심이 증폭되고 있다. 급기야 ‘컨트롤타워’인 청와대로까지 불똥이 튀는 형국이다. 군에 청와대 입김이 작용한 것 아니냐는 관측이 나온다.

국방부는 20일 이순택 감사관을 단장으로 하는 합동조사단을 편성, 북한 어선 관련 경계작전 상황의 사실관계를 규명할 것이라고 밝혔다. 관련 분야 전문가 등 30여명으로 구성된 합동조사단은 동해 일대 해안·해상 경계 작전 관련 부대를 대상으로 1주일가량 조사를 진행할 예정이다.

 

합동조사단은 경계작전 실패 논란과 허위보고·은폐행위 여부 등의 규명에 집중할 것으로 보인다. 해명 내용이 계속 바뀌면서 군 당국이 ‘경계 실패 책임론’을 우려해 사건을 은폐·축소하려 한 것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된 것이 우선 규명돼야 할 부분이다. 합참은 17일 “자체 조사결과 해상·해안 경계작전에는 문제가 없었다”고 했으나 19일엔 “일부 미비점이 있어 그에 상응하는 책임을 묻겠다”고 말을 바꿨다.

북한 어선이 삼척항에 접안한 지난 15일 해경이 작성한 상황보고서. 보고서 우측 전파처에 청와대·총리실·국정원·통일부·합참·해작사 등이 포함돼 있다. 신고시간이 오전 6시50분, 발송일시가 오전 7시9분으로 이들 주요기관은 20여분 만에 핵심 정보를 보고받은 것으로 나타났다. 자유한국당 김정재 의원실 제공

북한 어선의 출항지와 항로, 발견지점 등에 대한 정보를 군이 알고도 제대로 밝히지 않은 점도 의혹이다. 자유한국당 김정재 의원이 이날 해경으로부터 제출받은 자료에 따르면, 동해해양경찰서는 15일 오전 6시54분 ‘삼척항 내 북한 어선이 정박해 있다고 신고’라는 내용의 상황보고서 1보를 해경과 해군 1함대 사령부에 보냈다. 북한 어선 접안이 확인된 것으로 알려진 6시50분으로부터 4분이 지난 시점이다. 해경 상황센터는 오전 7시9분 합참 지휘통제실과 해군작전사령부 지휘통제실, 청와대 국정상황실·위기관리센터 및 총리실, 국정원, 통일부 등에 1보를 보냈다. 이 문서엔 ‘오전 6시50분 삼척항 방파제에 미상의 어선이(4명 승선) 들어와 있는데 신고자가 선원에게 물어보니 북한에서 왔다고 말했다고 신고 접수’라고 기록돼 있다. 사건 발생 20분도 안 돼 북한 어선의 주요 정보가 군 당국에도 입수됐다는 뜻이다.

 

이에 대해 국방부는 합참이 15일 당시 해경에서 정상적으로 상황을 접수했다고 해명했다. 그러면서 “(합참이) 지난 17일 국방부 출입기자단에 ‘15일 6시50분쯤 주민 신고에 의해 북한 선원 4명이 타고 온 2t급의 북한 어선이 삼척항 인근에 있다는 상황을 접수하고 정밀평가를 실시했다’고 설명했다”는 입장을 밝혔다.

 

고개 숙인 국방장관 정경두 국방부 장관이 20일 오전 서울 용산구 국방부 청사에서 북한 어선이 강원도 삼척항에 접안한 사건과 관련, 대국민 사과문을 발표한 뒤 허리를 굽혀 인사하고 있다. 서상배 선임기자

청와대도 진화에 나섰다. 고민정 대변인은 “최초 해경으로부터 (15일) 보고를 받았다”고 밝힌 뒤 경계실패에 대한 책임소재를 감추기 위해 사실관계를 은폐하려 했다는 지적에 대해 “사실이 아니다”고 선을 그었다. 또 “국방부가 ‘삼척항 인근’이라는 표현을 썼다고 해서 말을 바꿨다고 보는 것은 틀린 말”이라고 반박했다.

하지만 해경 보고서는 발견장소를 ‘삼척항 방파제’ ‘삼척항 내’라고 기록하고 있다. 또 지난 17일 군의 발표가 청와대와 사전조율을 거쳤고 당시 브리핑 현장에 청와대 국가안보실 소속 행정관도 있었던 것으로 알려지면서 국방부의 움직임에 청와대가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도 제기된다.

군은 북한 어선이 표류했다고 설명했으나 기관을 가동해 삼척항으로 들어왔다고 정정했다. 해안 감시레이더로 최초 포착했을 때 해상의 파고(1.5∼2m)가 선박 높이(1.3m)보다 높았고 해류 속도로 떠내려가서 의심 선박으로 인식하지 못했다고 설명했으나, 실제 파고가 0.4∼0.9m였다는 주장도 나온다.

 

지난 15일 북한 선원 4명을 태운 북한 어선이 정박했던 곳으로 추정되는 삼척항 부두 맨 끝의 모습. 연합뉴스

◆文대통령 “경계·보고 제대로 못해…철저 점검”

 

정부와 여당이 20일 북한 어선이 아무런 제지 없이 동해 삼척항에 입항한 것과 관련해 사과를 하는 등 바짝 몸을 낮췄다. 야당은 정경두 국방부 장관의 사퇴 또는 해임을 촉구하고 국회 국정조사를 추진키로 하는 등 한껏 공세를 폈다.

 

문재인 대통령은 이날 오후 청와대에서 열린 제4차 반부패정책협의회에 앞서 진행한 차담회에서 정경두 국방부 장관이 문 대통령과 다른 국무위원들에게 이번 사태와 관련해 사과하자 “우선은 북쪽에서 우리쪽까지 그냥 오는 과정에 제대로 (목선을) 포착하거나 경계하지 못한 부분, 또 이쪽으로 도착하고 난 이후에 그에 대해서 제대로 보고하고 국민께 제대로 알리지 못한 부분, 이 두 가지 대응에 대해서 문제점들이 없는지 철저하게 점검해주기 바란다”고 지적했다고 고민정 청와대 대변인이 전했다. 경계태세의 문제와 함께 보고 및 공보체계 두 가지에 대한 대책을 주문한 것으로 해석된다. 특히 문 대통령의 평소 직설적인 표현을 자제하는 발언 스타일을 고려하면 국방부의 안일한 대응을 사실상 질타한 것으로 보인다.

 

총리도 “죄송” 이낙연 국무총리(오른쪽 두 번째)가 20일 세종시 정부세종청사에서 열린 국정현안점검조정회의에서 모두발언하고 있다. 세종=연합뉴스

이낙연 국무총리는 이날 정부세종청사에서 열린 국정현안점검조정회의에서 “지금까지 드러난 것만으로도 국민들께 큰 심려를 드렸다. 그 점에 대해 깊게 사과드린다”고 사과했다. 정 장관도 이날 서울 국방부청사에서 사과문을 발표하고 “지난 15일 발생한 북한 어선 상황을 군은 엄중하게 인식하고 있으며, 국민 여러분께 깊은 사과의 말씀을 드린다”고 고개를 숙였다.

 

더불어민주당 이인영 원내대표도 이날 정책조정회의에서 “북한 어선이 북방한계선(NLL)을 넘어 우리나라에 정박하기까지 우리 군이 아무런 대응을 하지 않은 것에는 어떠한 변명의 여지가 없다”고 말했다.

 

야당은 현 정권의 책임을 물으며 문재인 대통령의 사과와 인사조치를 촉구했다. 자유한국당 나경원 원내대표는 이날 의원총회에서 “정경두 국방부 장관이 당연히 책임지고 그 자리에서 사퇴해야 하는 게 마땅하다”며 국정조사를 통해 실체를 명확하게 파악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바른미래당 오신환 원내대표도 당 회의에서 “문재인 대통령은 국방부 장관을 즉각 해임하고, 이 사건의 은폐·조작과 관련된 책임자 전원을 처벌해야 한다”며 “더 심각한 건 군 당국이 거짓 브리핑으로 사실을 조작하려 했던 것으로 국정조사와 장관 해임건의안을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박수찬·김달중·이현미 기자 psc@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