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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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맥주는 배달되는데 생맥주는 왜 안 돼요?” 황당한 ‘치맥논리’

직장인 박모(32)씨는 얼마 전 배달 애플리케이션(이하 앱)으로 ‘치맥(치킨과 맥주)’을 즐기려다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평소 자주 시키던 치킨집이 생맥주 대신 병맥주를 팔기 시작한 것.

 

박씨는 “1L에 5000~6000원으로 1병(500mL)에 4000원인 병맥주보다 상대적으로 저렴하기도 하고 신선한 느낌이라 생맥주를 자주 시켰다”며 “가게 사장님께 병맥주로 바꾼 이유를 묻자 ‘생맥주 배달’이 불법이란 얘길 들으셨다더라. 그런데 다른 치킨집에선 다 생맥주를 팔더라. 뭐가 맞는지 모르겠다”고 의아해했다.

◆땜질식 규제에 업체들은 ‘혼란’...생맥 배달은 불법, 병맥 단독배달도 불법

 

결론부터 말하자면 치킨집에서 병맥주나 캔맥주를 배달하는 것은 합법이지만 생맥주는 불법이다. 주세법 제15조에 따라 생맥주를 페트병에 담아 판매하는 것은 주류를 가공하거나 조작한 경우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적발 시 3개월 이내의 판매 정지 처분을 받을 수 있다.

 

그렇다면 치킨 없이 병맥주만 배달한다면? 이 또한 위법 소지가 있다. 이처럼 같은 술 배달이라도 상황에 따라 합법과 불법의 경계를 넘나드는 이유는 모호한 주세법과 국세청 고시 때문이다. 국세청이 주류 배달 문제가 불거질 때마다 땜질식 규제를 해왔기 때문이다.

 

애초 음식점에서 주류 배달을 하는 것은 불법이었다.  하지만 ‘치맥’을 합법화하라는 여론이 거세지자 2016년 7월 국세청은 국세청 고시를 통해 ‘음식점에서 전화 등을 통해 음식과 함께 주문 받은 주류를 배달하는 것은 통신판매로 보지 아니한다’며 이를 허용했다.  내친김에 슈퍼마켓 등 소매점에서도 직접 얼굴을 보고 판매(대면 판매) 후 배달도 가능하도록 했다. 통신판매가 가능한 주류의 종류(전통주 등)와 판매 경로가 엄격히 제한돼 있던 과거에 비해 어느 정도 족쇄를 풀어준 셈이다.

 

그러자 병맥주나 와인만 배송하는 업체, 페트병에 담아 수제맥주를 배달하는 업체 등이 생겨났다. 국세청은 부랴부랴 ‘주류 배달 규정 악용’을 막겠다며 2017년 6월 국세청 고시를 개정했다. ‘음식과 함께 주문 받은 주류를’이란 문구를 ‘주문 받은 음식에 부수하여 함께 주류를’로 고친 것이다. 음식이 주, 주류는 종이므로 이를 어기면 규제하겠다는 의도다.

 

◆A는 되고 B는 안 되고… 

 

이 때문에 여러 혼란스러운 상황이 생겼다.

 

① 병맥주 배달은 되지만 생맥주 배달은 안 됨

앞서 언급했듯 생맥주를 페트병에 담아 배달하는 건 주류를 가공하거나 조작한 경우에 해당해 적발될 수 있다. 수제맥주를 배달하려면 캔이나 병에 담은 형태여야 한다.

 

② ‘치맥’은 되지만 ‘맥치’는 안 됨

술이 주가 되어선 안 된다. ‘음식에 부수하여’라는 규정 때문이다. 다만 음식과 술의 비율은 명확히 정해져 있지 않다. 규제기관이 법을 자의적으로 해석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오는 부분이다.

 

국세청 관계자는 이에 대해 “이전에 ‘음식과 함께’라고 하자 술을 팔기 위해 음식을 보태는 주객전도 현상이 있었다. 이를 규제하기 위해 ‘부수하여’라고 표현한 것”이라며 “이를 비율로 정해버리면 논란이 생긴다. 음식이 종류에 따라 가격과 양이 다양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국세청은 적법 여부를 구체적인 사례에 따라 판단한다고 밝혔다.

 

③ 음식점은 전화나 인터넷으로 술 배달을 시켜도 되지만 마트나 편의점은 안 됨

마트 등 소매점은 대면 판매가 원칙이기 때문이다. 슈퍼마켓 등은 미성년자가 아닐 경우 직접 매장을 방문해 술을 구매한 후 배달 가능하다.

 

치킨집은 술 배달이 되는데 치킨, 떡꼬치 등의 조리 시설을 갖춘 편의점은 왜 안 될까. 국세청 관계자는 “주류를 배달하려면 식품위생법에 따라 일반음식점, 유흥음식점, 단란주점으로 등록돼있어야 한다”며 “편의점은 휴게음식점이다. 원칙적으로 휴게음식점은 주류를 취급할 수 없다”고 했다.

 

◆규제 하나에 울고 웃는 사업자들... “정부가 판로 열어줘야”

 

주류 판매 업체들은 ‘규제에 대한 규제’라며 반감을 드러냈다. 실제 고시 내용에 맞춰 주류 배달 서비스를 하던 몇몇 업체는 국세청의 고시 개정으로 사업을 접거나 큰 손해를 봐야 했다. 업계에선 과도한 규제 때문에 사업하기 쉽지 않다는 불만이 끊이지 않는 상황이다.

 

김진만 한국수제맥주협회 과장은 21일 “협회 측은 온라인 판매나 배달을 허용해달라고 정부에 계속 요구하고 있다. 전체가 안 된다면 소규모 수제맥주 업체에만이라도 제한을 풀어줬으면 한다”며 “작은 업체들은 유통판로가 대기업처럼 넓지 않다. 온라인이 아니면 유통 시스템을 갖추는데 굉장히 힘든 부분이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일본의 한 유명 수제맥주 회사 같은 경우 온라인 판매 비중이 전체 매출의 80%”라며 “이번에 주세가 종량세로 개편되며 수제맥주 업체들의 숨통이 트였지만 이것만으론 부족하다. 시장을 키우려면 추가 지원이 필요하고 그중 하나가 온라인 판매라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국세청 “정부가 술 소비 권장은 못해... 규제 명확히 할 필요성 있다”

 

반면 국세청은 정부가 술 판매를 제한할 수밖에 없다는 입장이다. 21일 국세청 한 관계자는 세계일보에 “국민들에게 정부가 담배를 자주 피우라고 권장할 수 있는가? 이처럼 국가가 건강에 유해한 술을 많이 드시라고 권장할 순 없다”며 “유독 우리 사회는 술에 관대한 문화가 있는데 술과 담배는 사실상 몸에 좋지 않은 점에서 똑같다. 정부가 국민들이 술을 즐겨마실 수 있도록 배달을 허용하고 판매처를 늘리도록 규제를 푸는 건 고민이 필요한 문제”라고 지적했다.

 

다만 이 관계자도 현 규제 내용이 명확지 않아 혼란이 있는 점은 인정한다고 했다. 그는 “‘부수’라는 정도의 개념을 어떤 방식으로 명확하게 할 수 있을지 내부에서도 논의가 계속되고 있다”며 “성급히 고시 등을 개정하면 이전과 마찬가지로 또 다른 부수적인 문제가 생겨날 여지가 있어 부작용을 최소화하기 위해 신중한 입장”이라고 했다.

 

나진희 기자 najin@segye.com, 사진=세계일보D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