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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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계 미투' 최영미 "'괴물' 발표 후회하지 않는다"

최영미 시인. 연합뉴스

“'내가 정말 여, 여류시인이 되었단 말인가/술만 들면 개가 되는 인간들 앞에서/밥이 되었다, 꽃이 되었다/고, 고급 거시기라도 되었단 말인가”

 

최영미 시인의 시 ‘등단 소감’의 한 구절이다. 직설적인 비유는 시인이 등단하던 무렵 문단에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었는지를 보여준다. 그는 시를 쓴 이유를 구체적으로 설명했다. 

 

“등단한 직후 문단 술자리에 나가서 내가 느낀 모멸감을 표현한 시예요. 작가회의 행사 하러 갔는데, 가만히 서 있으면 뒤에서 엉덩이 만지고 술자리에는 무성한 성희롱 언어들…. 처음엔 발끈했는데 나중엔 무뎌지더라고요. 불편했으니까 이런 시를 썼겠죠.”

 

문단 기득권층의 성폭력 행태를 고발하며 ‘미투’ 운동을 확산시킨 최영미가 신간 시집 ‘다시 오지 않는 것들’을 발간에 맞춰 25일 서울 마포구의 한 찻집에서 연 기자간담회에서 밝힌 내용이다.  

진보 성향으로 분류되는 ‘민족문학작가회의’(현 한국작가회의) 행사에서 벌어진 이런 일들이 너무 불쾌해서 1993년 민족문학작가회의 회보에 이 시를 넣었다고 한다. 2000년 에세이집 ‘우연히 내 일기를 엿보게 될 사람에게’에 다시 실었으나 제 자리인 시집에 실은 것은 처음이다.

시집에는 고은 시인의 성추행 의혹을 구체적으로 고발한 ‘괴물’ 외에도 고은을 비판하는 시, 미투 운동과 관련된 시가 등장한다. 

“그가 아무리 자유와 평등을 외쳐도/ 세상의 절반인 여성을 짓밟는다면/ 그의 자유는 공허한 말잔치”(‘거룩한 문학’ 중)

 

“나는 내 명예가 그의 명예보다/ 가볍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바위로 계란 깨기’ 중)

 

최영미는 시에 나오는 ‘그’를 “당연히 저랑 싸우고 있는 원로 시인”이라고 밝히며 “시를 전개하는 과정에서는 꼭 그 한 사람만이 아니라 보편화했다. 어떤 우상 숭배라고 할까”라고 설명했다.

 

계간 ‘황해문화’ 2017년 겨울호에 시 ‘괴물’을 실은 배경과 뒷얘기도 털어놨다. 청탁을 받던 시점은 2017년 9월 중순. 당시 ‘황해문화’ 실무진에서 ‘젠더 전쟁’을 주제로 시 3편을 써달라고 청탁해 ‘괴물’을 포함한 3편을 잡지에 보냈다. 또 ‘괴물’을 써놓고도 원고를 보낼까 망설였는데, 일간지 기자에게서 ‘보내지 못할 이유가 없다’는 조언을 들었다고 한다. 최영미는 고은과의 법적 분쟁 등으로 힘들지만 “‘괴물’을 발표한 일을 후회하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최영미는 자신의 시가 사회적 이슈가 됐지만 가장 좋아하는 것은 연애시이고 사랑이라고 밝혔다. 그는 “나는 연애시 쓰는 것을 좋아한다”며 “사랑을 떠올릴 수 있는 동안은 시를 잃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강구열 기자 river910@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