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이 인류를 묶는 유일한 공통분모입니다. 모든 사람이 동의·수긍할 수 있고, 심지어 따를 수 있는 게 과학입니다. 사회가 건강해져서 위기나 독재, 유행 등에 휘둘리지 않으려면 ‘과학 중심 철학 사회’가 돼야 합니다.”
교육부 미래교육위원회의 ‘나우미래’ 영상 시리즈 10회 주인공인 박종화(52·사진) UNIST(울산과학기술원) 생명과학부 교수는 이 같이 강조했다. 자신을 “노화를 정복하고 싶은 게놈 연구자”로 소개한 박 교수는 7700년 전 고대 아시아인의 게놈을 세계 최초로 분석하는 등 게놈 분야의 세계적 권위자로 인정받는 인물이다. 그는 바이오벤처기업 ㈜클리노믹스의 CSO(최고 전략 책임자)이기도 하다.
‘나와 우리의 미래, 지금(Now) 그리고 미래’라는 뜻의 나우미래는 교육부 미래교육위가 지난달부터 유튜브 채널 교육부TV에 순차적으로 올리고 있는 영상 시리즈다. 미래교육위는 위원들의 살아온 이야기를 들려주는 이 시리즈를 통해 앞으로 맞이할 미래와 미래가 필요로 하는 인재, 꿈과 희망 등을 함께 생각해보자고 제안한다. 유튜브에서 ‘교육부 나우미래’를 검색하면 재생목록을 볼 수 있다.
◆“英은 엘리트 교육·美는 기업가 정신 강조”
박 교수는 1986년 서울대에 입학했으나 두 달만에 자퇴했다고 한다. 그는 “대학이라는 곳이 사람들이 연구를 하면서 즐기고 그런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라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라며 “점수에 계속 연연하면서 스트레스를 받으며 사는 게 잘 안 맞았고 삶의 의미를 못 느꼈다”고 털어놨다. 이후 1년 가량 영어 공부를 하고 군 복무를 마친 뒤, 박 교수는 영국 애버딘대 동물학과에 지원해 합격했다.
영국에서의 대학 생활은 다소 충격적이었다. 박 교수는 “시험을 4학년 맨 마지막에 치르는데, 4년 동안 배운 걸 문제로 내더라”고 설명했다. 평가 방식이 철저히 절대평가였던 점도 인상깊었다. 그는 “어떤 때는 100명 중에 A(학점) 받는 사람이 20명일 수도 있고, 어떤 때는 한 명도 없을 수도 있다”며 “상대적으로 누가 더 잘했냐가 아니라 ‘맞냐 아니냐’가 중요하다는 사실 중심적 사고”라고 했다.
박 교수는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그는 “네이처라는 잡지에서 어떤 글을 보고 저자에게 편지를 하나 썼는데, 그 사람이 자기 연구실로 오라고 해서 가보니 아론 치카노베르라는 노벨상 수상자였다”며 “세계 최초로 RNA 구조를 밝힌 사람”이라고 덧붙였다.
박 교수는 이후 미국 하버드로 건너가서 DNA와 노화 극복 등을 연구했다. 그곳에서는 ‘주식’이 박 교수에게 충격을 안겼다.
그는 “연구실에 가보니 학생이고 지도교수고 전부 다 주식을 하더라”며 “자기들이 기술을 개발하고 연구도 해주는 회사의 주식을 1만, 2만 주씩 갖고 있었다”고 부연했다. 논문을 쓰기 전에 특허를 내는데 열을 올리는 점도 인상적이었다고 한다.
박 교수는 “결국 우리가 하는 일, 즉 과학이 국민 또는 대중을 위해 쓰여야 민주화가 된다는 것”이라며 “그게 미국이 영국과 다른 점”이라고 설명했다. 박 교수는 “영국은 엘리트 교육 시스템이고, 고상하면서도 깊이 들어가는 전문가적인 철학을 갖고 있는데 미국은 모든 게 시장 중심이고 대중적”이라며 “미국에서는 또 회사를 만들고 투자를 하는 게 굉장히 자연스러운 일인데, 그게 미국의 저력”이라고 평가했다. 그 영향으로 박 교수는 1998년 처음으로 창업에 도전했다. 당시 한 동료 학생의 제안으로 함께 회사를 만들었지만 곧 망했다고 한다.
◆“뭘 해도 ‘괜찮다’는 우리 사회가 됐으면…”
박 교수는 “우리 사회의 신뢰가 무너지고 서로에 대한 존경이 무너진 가장 큰 이유는 과거 일제강점기나 한국전쟁 등으로 혼란기를 겪으면서 ‘정직하거나 본질에 충실하면 엄청난 고통을 당한다’는 걸 경험했기 때문”이라며 “사회 전체가 겪은 트라우마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라고 진단했다. 그는 트라우마 치료를 위해 “국민들에게 ‘괜찮다(It's alright)’는 말을 해주고 싶다”고 했다.
이어 박 교수는 성적 지상주의가 팽배한 우리 사회를 지적하며 “괜찮다는 말은 (원하던) 학교에 못 들어가도, 대학에 재수해도 괜찮고 있는 그대로 존중해주겠다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지금 한국에는 포용이 없는 게 제일 큰 문제”라며 “우리 말에서 존댓말을 없애든지 어린이들한테도 존댓말을 쓰든지 해서라도 언어 통일을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또 “위계를 없애서 사회에 소통의 창을 열고 콘텐츠를 과학으로 채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가 말한 과학 중심 철학 사회란 개념도 이런 맥락에서 나온 것이다. 박 교수는 “문제가 생기면 사실을 기반으로 논리적으로 논쟁하고 결정을 내려야 한다”고 전했다.
자신의 인생을 되돌아봤을 때 가장 좋은 선택은 서울대를 자퇴하고 영국으로 유학을 떠난 것이었다고 박 교수는 덧붙였다. 그는 “핵심은 뭐냐면 100% 저 스스로, 독립적으로 내린 결정이라는 것”이라며 “우리나라는 사회적 분위기도 그렇고 약간 ‘자의 반 타의 반’ 결정을 내리는 경우가 많다”고 꼬집었다. 박 교수는 “철학적인 문제”라며 “과학 철학에서 나온 비판적 사고가 있어야 독립적 결정을 할 수 있다”고 부연했다. 그는 이어 “과학 철학의 요점은 모든 게 팩트 기반의 사실과 논리, 합리성에 기반하는 것”이라며 “이렇게(과학 철학에 따라) 보면 교수든 5살짜리 아이든 둘이 똑같다고 할 수 있다”고 말했다.
김주영 기자 bueno@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