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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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속 풀·벌레 마치 살아있는 듯… 자연과의 합일 추구 [김한들의 그림 아로새기기]

⑫ 강릉과 신사임당 ‘초충도’ / 강릉은 휴양지의 전통적 모습 간직 / 경포부터 안목에 이르는 해변 조용 / 신사임당, 조선중기 문인이자 화가 / 율곡 이이·이매창의 어머니로 유명 / 모친 친정 오죽헌서 태어나고 성장 / 결혼후 서울로 왔지만 강릉 못잊어 / 작품 중 풀· 벌레 소재 ‘초충도’ 탁월 / 중국 회화 영향 컸던 시대 분위기 속 / 우리만의 화풍 굳건하게 이루어내

#강릉의 푸른 바다와 까만 대나무

올여름 첫 바다는 강원 강릉시로 정했다. 푸른 바다를 보고 싶을 때는 남해나 동해를 생각한다. 짧은 이동으로 다녀올 수 있는 곳은 아무래도 동해다. 동해에는 속초, 양양, 강릉 등 바다를 낀 관광지가 여럿 있다. 그중 속초와 양양은 근래에 서핑을 하는 사람들이 찾으며 젊은 혈기가 왕성해졌다. 주말이면 서핑 슈트를 입고 해변에 앉아 맥주를 마시는 모습이 쉬이 보인다.

이에 비하면 강릉은 휴양지의 전통적인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사천면 부근은 속초, 양양과 비슷한 분위기이지만 경포부터 안목에 이르는 해변은 조용하다. 가족 단위로 물놀이를 즐기고 연인들이 해변을 둘러싼 소나무 숲을 거닌다. 지난 주말에는 고요하게 휴식을 취하고 싶은 생각에 강릉에 가게 됐다.

여덟 폭 병풍으로 이뤄진 신사임당 초충도의 일부분. 탐스럽게 열린 가지와 함께 나비 날개의 구조를 세밀하게 그려 냈다.

강릉에 가면 가장 먼저 방문하는 곳은 바다다. 푸른 바다가 해변에 닿아 하얀 포말로 부서지는 모습을 보면 마음이 시원하다. 그 모습은 어쩐지 수백 번을 봐도 질리지 않는다. 그곳에만 머무를 순 없으니 발걸음을 옮겨 본다. 보통 이렇게 움직여서 방문하는 곳은 시내 근처에 있는 오죽헌(烏竹軒)이다. 이름 그대로 검은 대나무가 있는 조선 중기의 목조건물로 보물 제165호다. 단층 팔작지붕 양식을 갖췄으며 한국 주택 건축 중에서 오래된 건물로 손꼽힌다. 신사임당과 율곡 이이가 태어난 집이기도 하다.

#신사임당, 강릉에서 서울까지의 삶

신사임당(1504~1551)은 조선 중기의 문인이자 화가다. 율곡 이이와 이매창의 어머니로도 널리 알려졌다. 이이가 쓴 ‘선비행장’(先?行狀)에 그의 삶이 상세히 기록돼 있다. 선비란 세상을 떠난 어머니를 남에게 이르는 말이고, 행장이란 사람이 죽은 뒤 생전 행적을 적은 글이다. 이 글은 ‘율곡전서’(栗谷全書) 권18 ‘행장’편에 수록돼 있다.

신사임당은 1504년 강릉에서 신명화와 용인 이씨의 다섯 딸 가운데 둘째로 태어났다. 용인 이씨의 친정인 오죽헌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어릴 때부터 남다르게 총명하고 여러 방면에서 재능을 보였다고 한다. 그래서 과거에 급제한 적이 있는 외할아버지 이사온이 학문과 시, 그림 등을 자주 가르쳤다. 배우는 모습이 보기 좋아 ‘몽유도원도’로 유명한 안견의 그림을 구해 주기도 했다.

신사임당은 1522년 이원수와 결혼했다. 이원수는 조선 건국 초기부터 이어진 유력 가문 출신이었다. 결혼 이후에도 한동안 강릉에서 살았다. 아버지의 죽음과 함께 시댁이 있는 서울로 올라와 생활했다. 지금의 종로구 수송동과 삼청동 일대에서 오랜 시간을 살았는데 언제나 강릉을 그리워했다. 그리움이 커서 어느 때는 밤을 꼬박 새워 눈물지었다고 한다. 아마 예술가로 교육하고 후원해 준 친정은 단순한 가족의 의미보다 더 큰 존재였을 것이다.

이원수는 한동안 한강의 수운을 담당하는 관리로 일했다. 이때 아들을 데리고 업무를 위해 평안도에 가게 됐다. 신사임당은 그사이 병이 나서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가족들은 이를 두고두고 안타까워했다.

깨진 건지, 아니면 쥐들이 파먹은 건지 알 수 없는 수박의 붉은빛 속살은 탐스럽다.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강원 강릉시 오죽헌 건너편에 자리한 경포생태저류지에 노란 유채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는 모습. 필자가 2017년 5월에 찍은 사진이다. 김한들 제공

#위대한 문인이자 화가로서의 삶

신사임당은 시(詩), 서(書), 화(畵)가 모두 뛰어났던 조선을 대표하는 예인(藝人)으로 꼽힌다. ‘선비행장’에 담긴 몇몇 시만 봐도 섬세한 감정 표현에 뛰어났다. 글씨는 ‘신사임당 초서병충’과 ‘산수도’가 유명하다. 차분한 분위기가 돌며 짜임이 단정한 것이 특징이다. 이 특징을 담은 서체를 쓴 이들을 ‘사임당 서파’라 부르기도 한다.

신사임당은 어린 시절부터 그림에 남다른 재능을 보였다. 일곱 살 때부터 안견의 ‘적벽도’, ‘청산백운도’ 등을 보고 산수도(山水圖)를 그렸다. 언젠가 그린 풀벌레 그림은 여름 볕에 말리려 내놓자 닭이 산 풀벌레인 줄 알고 달려들었다는 일화가 있다. 포도 그림은 흉내를 낼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

이러한 작품 중에서도 초충도(草蟲圖)가 가장 뛰어난 것으로 일컬어진다. 최근에는 이런 인식이 역사적, 사회적 맥락에서 강요된 것이라는 의견도 있다. 그가 산수화도 잘 그렸지만 초충도에 뛰어났다고 해 ‘어머니’란 이미지에 부합하게 했다는 것이다. 산수화는 집 밖으로 나가 그리는 그림이고 초충도는 집 안에 머물며 그리는 그림이란 이미지가 있다. 그의 초충도를 따라잡을 사람이 없었던 것은 분명하다.

초충도는 풀과 벌레를 소재로 한 그림이다. 그것이 가지는 생명력을 이상으로 삼고 화폭에 담아낸다. 중국의 화조도에서 전래한 것으로 알려졌다. 청동기시대 벌레 문양을 비롯해 삼국시대와 고려시대 도자기 문양 등에서 우리 고유의 기원을 찾을 수 있다. 수묵으로 산수화를 주로 그리던 시기, 신사임당이 등장하며 눈부신 발전을 거뒀다.

신사임당의 초충도는 미술사적으로 중요한 의미가 있다. 중국 회화의 영향이 컸던 시대 분위기 속에서 우리만의 화풍을 굳건히 이뤄 냈기 때문이다. 초충도란 장르를 받아들였지만 그림을 모방하지는 않았다. 식물과 벌레를 자신만의 방식으로 배치해 자연스러운 분위기를 자아냈다. 자연과의 조화를 추구하는 우리 민족의 미의식을 반영했다.

신사임당과 율곡 이이가 태어난 강원 강릉시의 오죽헌 전경. 보물 제165호다. 강릉 오죽헌·시립박물관 제공

#풀, 꽃, 과일, 날아다니는 것과 기어 다니는 것

신사임당의 초충도로 가장 널리 알려진 건 그가 그렸다고 전해지는 여덟 폭 병풍이다. 모두 종이 바탕에 수묵 담채로 그렸다. 각 폭에는 가지와 방아깨비, 수박과 들쥐, 오이와 개구리, 어숭이와 개구리, 맨드라미와 쇠똥벌레, 원추리와 개구리 등이 그려졌다. 그중에서 가지와 방아깨비, 수박과 들쥐가 있는 그림을 좋아한다. 여기에 등장하는 생물과 색채가 나머지 여섯 폭에 비해 다양해 더욱더 활기차서다.

가지와 방아깨비 그림은 화폭 중앙의 가지 두 줄기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펼친다. 가지란 열매를 맺은 줄기를 따라 뒤편의 꽃도 하늘을 향해 자라난다. 양옆으로는 방아깨비와 나비가 각각 땅과 하늘에서 움직이고 있다. 초와 충이 이루는 수직과 수평의 조화가 안정적이다. 자연의 조화 속에 모든 것은 아름답고 여유롭다.

수박과 들쥐 그림에서 초와 충은 화면 전면에 동등한 위치에서 등장한다. 무엇인가 중심을 이루는 앞의 그림과는 다른 모습이다. 수박과 그것을 파먹는 들쥐의 모습이 주인공인 것 같지만 널리 뻗어 나간 수박의 줄기와 나비의 화려한 날개가 눈길을 빼앗는다. 환한 색과 빠른 움직임이 역동적이며 생기를 풍긴다.

다양한 구성 속에 공통으로 부드럽게 그려낸 것이 아름답다. 몰골법으로 윤곽선 없이 색채를 사용해 만든 결과물이다. 그 안에서 붓을 섬세하게 움직여 방아깨비의 다리, 나비의 날개, 수풀의 방향 등을 묘사해 냈다. 또 붓을 여러 번 움직이고 덧칠해 음영을 드러냈다.

신사임당은 이렇게 화폭 위에 다양한 존재를 나타냈다. 여덟 폭을 눈앞에 두고 초를 살펴보면 열매를 맺는 수박과 가지, 잡초인 패랭이꽃, 양달개비꽃 등이 보인다. 충을 살펴보면 땅에 기어다니는 방아깨비, 개미, 들쥐 등이 있고 날아다니는 나비, 벌 등이 있다. 풀, 꽃, 과일, 날아다니는 것과 기어다니는 것에 구분을 두지 않고 모두 나타낸 것이 인상 깊다. 자연 안에서 차별을 없애고 더불어 살아가는 순리를 표현하고자 했음이 보인다.

신사임당이 초충도에서 추구한 건 결국 자연과의 합일이었다. 자연은 항상 자기만의 질서를 가지고 흘러간다. 질서가 어지럽혀지고 혼란이 일어나는 세상과는 다르다. 신사임당이 초충도를 통해 불완전한 현실을 극복했다고 작품을 읽어 내기도 하는 이유다.

신사임당의 정신을 따르듯 오죽헌 앞에는 자연이 있다. 정문으로 나와 횡단보도를 건너면 바로 경포생태저류지가 있다. 산책로와 습지 사이에서는 작은 생명들이 쉬지 않고 움직인다. 언젠가는 멸종위기 야생 동식물로 지정된 큰고니가 찾은 적도 있다. 강릉시에서 신사임당의 초충도를 고려하고 조성한 건 아니겠지만 의미가 이어진다. 유채꽃이 활짝 피는 5월에 특히 아름다운 풍경을 보여줬던 기억이 있다. 내년 봄에 다시 와서 초충도를 생각하며 유채꽃밭 한가운데를 걷고 싶다.

김한들 큐레이터, 국민대 미술관·박물관학 겸임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