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사가들은 흔히 에두아르 마네(1832~83)를 가리켜 ‘최초의 모더니스트(현대화가)’라고 부른다. 일반인들의 눈에는 마네가 인상파 화가인 모네, 혹은 입체파 화가인 피카소처럼 쉽게 눈에 띄는 화풍을 갖고 있지 않고, 그냥 이전 화가들의 그림과 크게 다른 점이 보이지 않기 때문에 그렇다. 등장인물들이 19세기의 옷을 입고, 현대적인 환경에 있다는 것 외에는 17, 18세기의 여느 그림 속 인물들과 크게 달라 보이지 않는데 왜 학자들은 마네를 특별하게 취급할까? 그가 1873년에 그린 ‘철도’라는 작품에서 단서를 찾아볼 수 있다.
‘철도’ 혹은 ‘생라자르역’이라고 불리는 이 그림은 수수께끼 같은 그림이다. 마네는 이 그림을 그리기 10년 전에 이미 ‘풀밭 위의 점심식사’, ‘올랭피아’ 같은 선언적인 작품으로 프랑스 화단에 충격을 주었다. 서양미술사에 잘 알려진 주제를 현대적인 시각으로 풀어내는 바람에 비판과 조롱을 받은 마네는 ‘철도’에서 평범해 보이는 젊은 여성과 어린 여자아이를 등장시켰다. 티치아노나 라파엘 같은 르네상스 거장들의 그림에 바탕을 두었던 ‘올랭피아’, ‘풀밭 위의 점심식사’ 같은 작품과 달리, ‘철도’는 과거의 어떤 그림도 연상시키지 않는다.
그뿐 아니다. 무릎 위에 갓 태어난 듯한 강아지와 책을 올려놓고 있는 이 여성과 등을 돌리고 서 있는 아이는 그 정체를 알 수 없다. 사람들은 이 여성이 아이의 엄마인지, 이모인지, 아니면 아이를 봐주는 보모인지 궁금해했지만, 그림에서는 아무런 단서를 찾을 수 없다. 게다가 화면 구성까지 어설퍼 보인다. 젊은 여성이 화면의 왼쪽으로 많이 치우쳐 있으니 여자아이가 중심인물일 것 같은데, 아이는 정작 등을 돌리고 있다. 그림의 제목은 철도이고, 당시 가장 크고 붐비던 생라자르역을 그렸지만, 기차는 보이지도 않고, 보기 흉한 검은 철창이 보는 사람의 시선을 가리고 있다. 마네는 무슨 생각으로 이 작품을 그렸을까?
사실은 이 그림이 가진 어정쩡한 구도, 정체를 알 수 없는 등장인물이야말로 마네가 현대화가, 즉 모더니스트임을 보여주는 요소들이다. 마네는 당시에는 존재하지도 않았던 ‘스냅샷’을 그림으로 표현한 것이다. 스냅샷이란 예술적인 표현이나 보도용 사진으로 사용할 의도 없이 일상의 모습을 대충 찍은 사진을 말한다. 미리 계획하지 않고 찍은 사진이라서 구도랄 것도 없고, 초점도 잘 맞지 않는 사진들이 대부분이고, 사진 속 장면에 특별한 의미나 주제가 없다. 그야말로 아무 생각 없이 눈앞에 있는 것을 찍은 사진이다.
하지만 스냅샷 사진과 마네의 이 그림에는 큰 차이가 있다. 스냅샷은 카메라로 손쉽게 찍으면 그만이지만 마네는 가로 114㎝, 세로 93㎝의 캔버스에 오랜 시간을 들여서 그려야 했기 때문이다. 당시 사람들은 마네가 불완전한 구도와 주제를 알 수 없는 장면을 정성껏 그린 이유를 이해하지 못했다. ‘올랭피아’와 ‘풀밭 위의 점심식사’는 논쟁거리라도 되었지만, 대중과 비평가들의 눈에 ‘철도’는 그냥 “못 그린” 그림이었을 뿐이다.
그러나 마네의 ‘철도’는 시대를 앞선 그림이었다. 마네가 ‘철도’에서 보여주려고 했던 현대세계의 모습은 1870년대 관객에게는 전달이 되지 않았지만, 마네보다 100년 늦게 태어난 미국의 대표적인 스냅샷 사진작가 개리 위노그랜드(1928∼84)가 사진으로 보여주었을 때는 대중도 마네가 보여주었던 ‘현대성(모더니티)’이 무엇인지 깨달았다. 길거리를 지나다가 마주치게 되는 장면을 가감 없이 사진에 담은 위노그랜드는 “내게는 사진 속 장면이 무슨 스토리를 담고 있는지 설명해야 할 의무는 없다. 잘 묘사할 의무만 있을 뿐”이라고 했다.
그는 사진으로 하여금 정해진 스토리를 전달하게 하는 것은 거짓말을 하는 것과 같다고 했다. 특정한 장면이 스토리를 갖고 있다는 것은 환상에 불과할 뿐이고, 작가는 눈앞에 펼쳐지는 장면을 잘 담기만 하면 된다고 믿었다. 이런 위노그랜드의 생각으로 ‘철도’를 보면 우리는 마네가 이 그림을 그린 의도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그는 거창한 의미를 담은 웅장한 역사화를 그리던 선배 화가들과 달리, 자신이 사는 장소와 시간을 떠나지 않았다.
그림에 등장하는 생라자르역은 자신의 작업실 바로 옆에 있었다. 사람이 많이 몰리는 유명한 역이었지만, 그림에는 무슨 역인지 구분하기도 힘들 뿐 아니라, 그림에서 기차역임을 암시하는 요소는 방금 지나간 기차가 남겨놓은 증기뿐이다.
마네는 그것이 현대성이라고 생각했다. 현대의 도시는 전통적인 마을과 달리 사연도, 배경도 알 수 없는 익명의 사람들이 가득한 곳이다. 그런 장소에서 마주친 장면에 우리가 스토리를 부여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그건 어디까지나 우리의 머릿속에서 만들어낸 허구다.
‘철도’에 등장하는 여성이 아이의 엄마인지, 아니면 보모인지를 알 수 있는 흔적이 없는 것은 그 때문이다. 아이의 얼굴을 볼 수 있으면 딸임을 알 수 있었을지 모르지만, 마네는 아이의 고개를 돌려 숨겨버렸다.
모델을 세워놓고 스튜디오에서 작업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림에 등장하는 모든 요소를 철저하게 우연히 마주친 풍경처럼 만든 것이다. 한 평론가는 이 그림 속에는 강아지와 책, 부채 등 다양한 소품들이 등장하지만 그것들은 모두 “팩트일 뿐, 단서가 아니다”고 설명했다. 여성의 얼굴은 완전한 무표정이고, ‘올랭피아’와 달리 관객인 우리가 아닌 다른 뭔가를 멍하니 보고 있다. 아이의 얼굴을 볼 수 있다면 아마도 똑같은 표정을 하고 있지 않을까?
두 명의 인물이 캔버스의 균형을 깨고 화면의 왼쪽으로 치우친 것도, 인물의 다리가 잘려나간 것도 마치 고개를 돌리다가 슬쩍 목격한 듯한 효과를 의도한 것으로 보인다. 단체사진이 존재하기 훨씬 전에 단체초상을 만들어낸 네덜란드 화가들과 마찬가지로, 마네는 스냅샷 사진이 등장하기 훨씬 전에 스냅샷을 그림으로 그려낸 것이다. ‘철도’는 마차를 타고 빠르게 지나가다가 내다본 창밖 풍경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렇게 시대를 앞선 작품을 대중과 평론가들은 몰라봤겠지만, 진부한 역사화에 질려 있었던 일군의 젊은 화가들은 놓치지 않았고, 마네가 추구하던 현대성이라는 주제를 이어받아 계속 발전시켰다. 그들이 바로 모네와 피사로 같은 인상주의 화가들이다. 마네는 인상파가 아니지만, 미술사 서적이 예외 없이 마네로 시작하는 이유는 그가 사람들의 눈앞에 있으면서도 아무도 정확하게 표현하지 못했던 현대성을 짚어내어 전달했기 때문이다.
도시에 사는 우리는 마네의 그림 속에 등장하는 무표정한 사람들을 항상 목격한다. 우리는 그들이 누구인지,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모르고, 무슨 사연이 있는지는 더더욱 알 수 없다. 그들 눈에 비친 우리도 마찬가지다. 그것이 마네가 발견한 현대성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