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대통령이 29일부터 닷새간 계획했던 하계휴가를 취소했다.
문 대통령이 국내외 현안이 산적한 상황을 종합적으로 고려해봤을 때 현시점에서 청와대를 비우는 것은 부적절하다는 판단 때문으로 보인다.
일본의 수출규제 조치로 한일 갈등이 격화하는 것을 비롯, 러시아 군용기가 영공을 무단으로 진입한 데 이어 북한이 단거리 탄도미사일을 발사하는 등 안보 정세가 긴박하게 돌아간다는 점이 주로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이 크다.
3년간 개별 품목에 대한 심사를 면제받았던 한국 기업은 화이트리스트 배제가 결정되면 일본으로부터 품목별로 일일이 수출 허가를 받아야 한다.
이를 고려하면 '화이트리스트 한국 배제' 안건을 논의하는 다음 달 2일 일본 각의는 일본의 '경제보복' 조치로 인한 한일 갈등의 분수령이 될 가능성이 크다.
문 대통령으로서는 휴가로 인해 이날 자리를 비우는 것보다는 집무실에서 관련 정부 부처로부터 보고를 받는 등 현안에 대응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판단한 것으로 풀이된다.
청와대 관계자는 28일 연합뉴스와의 통화에서 "휴가 중이어도 현안을 보고받고 결정하는 체계는 유지되지만 문 대통령이 휴가를 취소한 것은 그만큼 이 사안을 엄중하게 보고 대응하겠다는 뜻일 것"이라고 설명했다.
일본의 경제보복 외에도 러시아의 독도 영공 침범과 북한의 탄도미사일 발사 도발로 한반도 정세에 '격랑'이 일고 있어 이에 대한 기민한 대응이 필요하다는 점 역시 휴가 취소의 배경이 풀이 된다.
외교·안보 현안 못지않게 국내 현안 중에서도 시급성을 다투는 것이 있다.
최근에 더해진 일본 수출 규제 대응 예산 증액분까지 더해 정부가 지난 4월 제출한 총액 '6조7천억원 + α' 규모의 추경안은 다음 달 10일이면 19년 만에 '역대 최장기간 국회 체류' 기록을 바꾸게 된다.
문 대통령은 지난 18일 여야 5당 대표와의 회동에서 일본의 조치에 대한 초당적인 대응과 함께 추경의 조속한 처리를 '시급한 두 가지 문제'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이에 따라 정무라인을 통해 여야의 국회 정상화 논의 상황을 보고 받으며 추경 처리 방안도 고심할 것으로 보인다.
청문회에 대한 부담감 등으로 교체 대상 부처의 후임 장관을 찾는 데 어려움을 겪는 것으로 알려진 가운데 9월 정기국회 전에는 개각을 완료할 것이라는 게 대체적인 견해여서 후임 인선에도 시간을 할애할 것으로 예상된다.
한편, 문 대통령은 휴가 취소를 결정하면서 적잖은 고민을 한 것으로 전해졌다.
청와대는 문 대통령 취임 첫해부터 노동 효율성 향상은 물론 경제나 고용 창출 효과에 영향이 크다는 점을 들어 초과근무를 획기적으로 단축하는 동시에 직원들이 적어도 연가의 70%는 소진할 수 있도록 독려해 왔다.
여기에는 청와대가 초과근무를 줄여 감축된 비용으로 일자리를 창출하는 등 모범적 사용자로서 역할을 하겠다는 뜻이 담겨 있었다.
문 대통령이 이번에 자신의 휴가를 취소하면서도 "직원들의 예정된 하계휴가에 영향이 없도록 하라"고 당부한 것도 이런 취지의 연장 선상으로 읽힌다.
그러나 문 대통령 자신 만큼은 휴가를 떠나는 것보다는 고심 끝에 당장의 현안에 충실하게 대응하는 것이 급선무라는 결정을 했다는 것이 청와대 관계자의 전언이다.
◆ '日 수출규제에 추경까지'…경제부처 수장들, 여름휴가 취소
경제부처 수장들도 국회에 제출된 추가경정예산(추경)안이 100일 가까이 묶여 있는 데다가, 일본의 수출 규제로 휴가를 아예 포기하고 있다.
28일 관가에 따르면 경제 컨트롤타워인 홍남기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오는 29일 단 하루 가려던 여름 휴가를 이날 결국 취소했다.
추경안은 국회에 제출된 지 95일째지만 여전히 처리되지 못하고 있다.
아울러 지난 4일부터 시작된 일본의 수출 규제는 전략물자 수출 간소화 대상인 화이트리스트(백색국가명단)에서 한국을 제외하려는 움직임을 보이는 상황이다.
다만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가 29일까지 휴가를 떠나 각료회의가 미뤄지면서 의사 결정도 멈춘 상황이라, 딱 하루 휴가를 갈 계획이었다.
하지만 문재인 대통령이 29일∼내달 2일 가기로 했던 여름 휴가를 이날 취소한 데다, 국회 상황이 새로 생기며 홍 부총리도 휴가를 취소했다.
홍 부총리는 정부세종청사 인근 관사에 머물며 그동안 짬이 나지 않아 읽지 못했던 책을 탐독할 예정었지만, 휴가를 취소하며 다음 기회로 미뤘다.
일본 수출규제 대응 주무 부처 수장인 성윤모 산업통상자원부 장관도 애초 7월 중순에 여름 휴가 일정을 잡아놨었지만, 휴가 일정을 전면 취소했다.
일본의 규제가 장기화할 조짐을 보이는 가운데 추가 조치 가능성에도 대비해야 하는 만큼, 올해 휴가 계획은 없는 것으로 알려졌다.
산업부 관계자는 "사안이 사인이니만큼 앞으로도 휴가를 가기가 쉽지 않아 보인다"며 "주무 부처의 수장이기 때문에 선택한 것으로 직원들은 상황에 맞춰 휴가를 쓰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김현미 국토교통부 장관은 이달 31일부터 다음 달 2일까지 사흘 동안 여름 휴가를 갈 계획이다.
김 장관은 휴가 기간 국내에서 머무르며 가족과 함께 시간을 보내면서 부처 관련 현안들에 대한 정책 구상도 할 것으로 전해졌다.
최근 사의를 표명한 최종구 금융위원장은 휴가 계획이 없다.
이달 취임한 김현준 국세청장은 이번 주 초 휴가 일정을 확정할 예정으로, 8월 첫 주에 휴가를 떠날 가능성이 큰 것으로 알려졌다.
내달 12일에 지방국세청장과 세무서장 등이 한자리에 모여 하반기 운용 방향을 논의하는 관서장 회의가 예정돼 있기 때문이다.
김경호 기자 stillcut@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