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석 계측 장비 분야에서 세계 최고의 기술력을 보유한 일본 호리바(堀場) 제작소. 이 회사의 경영 철학 중 하나는 “튀어나온 못은 더욱 튀어나오게 하라”이다. 틈새시장을 노리라는 뜻이다. 창업주인 호리바 마사오(堀場雅夫)는 “대기업과 정면승부를 벌이는 대신에 틈새시장을 공략하라”고 강조한다. 이런 정신으로 창립 이후 60여년 동안 흑자 행진을 이어가고 있다.
컴퓨터 칩을 장착하는 분야에서 세계적인 기술력을 지닌 일본 아이플러스(i-plus)는 장인 정신으로 미국 인텔이나 애플이 포기한 기술 개발에 성공한 케이스다. 우수 인재를 영입하고 기술자의 실력 향상을 위해 지원을 아끼지 않는 점은 대기업 못지않다. 대기업과 다른 점은 고품질의 다품종 소량 생산을 추구한다는 사실이다. 세계적인 의료 및 화학분석 장비 회사인 시마즈사도 일본 강소기업의 저력을 보여준다. 이 회사는 연 100억엔가량(약 1090억원)의 연구개발(R&D) 예산 중 40%를 기초 연구비로 쓴다. 당장 수익을 낼 수 없는 분야에 전체 R&D 비용의 절반 가까이 투자하는 셈이다. 글로벌 소재·부품 시장을 장악한 일본 중소기업들의 경쟁력이 어디에서 나오는지를 알 수 있는 사례들이다.
일본은 오래전부터 2차전지나 반도체, 디스플레이 등의 분야와 관련된 첨단소재에 집중하며 자원 무기화에 대한 대응에도 공을 들였다. 이러한 기반이 오랜 기간 다져진 덕분에 과학 분야에서 23명(물리학 11명·화학 7명·의학 5명)의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했다.
일본의 대한(對韓) 수출 규제 조치를 계기로 한국의 소재·부품 산업의 취약성이 드러났다.
소재·부품 산업의 기술력이 낮기 때문이다. 대기업은 완성품을 만드는 제조 기술에 집중하는 과정에서 시장 규모가 크지 않은 소재·부품은 해외 기술력에 의존하는 경로를 선택했다. 국내 중소기업은 자본과 인재 부족 등의 악조건 속에서 소재·부품 산업을 개척해왔지만 아직도 많은 부문에서 세계 수준의 기술력에는 미치지 못하고 있다. 무엇보다 국가와 기업 모두 소재·부품의 경쟁력을 높이기 위한 R&D가 제대로 이뤄져야 한다는 지적이다. 우리 정부는 최근 수년간 과학기술 강국을 목표로 R&D 예산을 늘리며 양적인 성장에 골몰했을 뿐, 내실을 기하지 못한 결과라는 자조 섞인 비판도 나온다. 소재 국산화를 중심으로 한 해법들이 제시되고 있지만, 단순히 이번 상황을 모면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장기적으로 산업 기반을 다질 수 있는 근본적인 해법을 마련하기 위해 총력을 기울여야 한다는 공감대가 형성되고 있다.
29일 과학기술정보통신부 등에 따르면 정부는 기초 소재와 관련한 정부 출연연구기관들과 함께 일본의 수출 규제에 대응하고 소재를 국산화하기 위한 R&D 로드맵을 마련하는 작업에 착수했다. 출연연의 한 관계자는 “기존에도 R&D에 대한 정부 로드맵은 있었지만 산업과 잘 연계되지 않았다”며 “현 상황에서 어떤 부분이 시급하고, 밸류체인 등을 감안해 기업들과 어떤 연관성을 가질 것인지에 대한 부분도 파악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실제로 최근까지 정부의 R&D는 양적 측면에서는 성장했으나 질적 성장이나 효과성은 담보하기 힘들었다. 이명박정부 시절 ‘R&D 투자를 국내총생산(GDP) 대비 5% 수준으로 끌어올려 7대 R&D 분야를 육성해 7대 과학기술 강국으로 도약한다’는 577전략이 대표적이다. 그러나 수치적인 목표 달성만을 내세웠을 뿐, 이로 인한 장기적인 목표는 제시하지 못했다.
산업연구원 소재산업실의 이재윤 부연구위원은 “소재가 개발되더라도 기업에 적용되기 위해서는 각종 인증이나 표준화 등의 작업을 10년여에 걸쳐 진행해야 하는데 이러한 부분이 쉽지 않았다”며 “우리나라는 그간 단시간에 발전해서 선진 기업이나 국가를 따라잡는 것이 중요했기 때문에 이러한 부분에 소홀했던 것이 사실”이라고 설명했다.
전통적으로 세계 최고 수준의 기초과학 역량을 보유한 미국에서도 이를 공학적 응용 분야에 접목하며 4차산업혁명 시대에 적극 대응하고 있다. 대표적인 제조 강국인 독일에서도 원천 분야의 연구를 자국의 경쟁력 있는 산업과 연계하려는 시도가 한창이다.
반면 우리나라에서는 관련 예산 확충이나 노벨상 수상자 배출 등의 선언적인 목표만을 내세웠을 뿐 기초 분야에 대한 충분한 기반이 조성된 적은 없었다. 이러한 상황이 장기간 지속하면서 서울대 공대에서 수년간 박사과정의 정원이 미달하는 사태가 발생하기도 했다.
경북 구미에서 발생한 불산 누출사고와 가습기 살균제 사태 등을 거치며 강화 일변도로 흐른 각종 규제를 점검해볼 필요가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업계의 한 관계자는 “국민 안전을 위해 규제가 제대로 확충되는 것은 맞겠지만, 기업의 상황을 제대로 고려하지 못한 채 규제가 마련되다 보니 신기술이 개발되더라도 규제를 지키는 과정에서 사장되는 경우가 속출하고 있다”고 밝혔다.
김준영 기자 papenique@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