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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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를 사랑한 바람의 건축가… 관객은 그저 빠져든다

다큐영화 ‘이타미 준의 바다’
세계적 건축가 이타미 준이 2006년 제주에 남긴 수 미술관. 영화사 진진 제공

포도호텔, 수풍석 미술관, 방주교회….

 

이타미 준(伊丹潤·한국명 유동룡·1937∼2011)은 한국을 대표하는 동시에 제주를 가장 잘 이해한 건축가다. 제주의 자연, 지역성을 건축의 야성미와 온기로 승화했다. 이 같은 건축 철학은 “현대 건축과 미술이 서양 지향적”이라는 자성에서 출발했다. 특히 건축과 시간이 어떻게 관계를 맺는지 주목했다. 미술에도 조예가 깊던 그는 2003년 프랑스 국립기메동양미술관에서 건축가로는 처음으로 개인전을 가졌다. 제2의 고향인 제주 서귀포에 정착하려 했지만 꿈을 이루지 못하고 뇌출혈로 세상을 떠났다.

 

지난 2일 서울 종로구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 만난 영화 ‘이타미 준의 바다’ 정다운 감독(사진 왼쪽)과 김종신 프로듀서는 “이타미 준 선생님은 제주를 가장 잘 이해한 건축가”라고 강조했다. 서상배 선임기자

오는 15일 개봉하는 영화 ‘이타미 준의 바다’는 이타미 준이 남긴 유산, 그의 삶의 궤적을 따라가는 다큐멘터리다. 올해 제20회 전주국제영화제에서 한국경쟁 부문 수상으로 작품성을 인정받았다.

 

지난 2일 서울 종로구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 만난 동갑내기 부부 정다운(44·여) 감독과 김종신(〃) 프로듀서는 “관객들이 자신의 시공간을 돌아보게 하는 위로의 영화”라고 소개했다. 위로란 두 글자에는 부부의 경험이 녹아 있다.

 

‘결혼은 미친 짓이다’ 연출부로 만나 결혼에 골인한 이들은 영국으로 건너가 각각 건축과 영상, 영화 연출을 공부했다. 한국으로 돌아온 뒤 앞날이 막막하던 시절, 제주가 고향인 김 프로듀서의 아버지가 “꼭 가 봐야 하는 곳이 있다”며 부부를 제주 수풍석 미술관에 데려간 게 영화 출발점이 됐다.

 

이타미 준이 2006년 제주에 남긴 풍 미술관. 영화사 진진 제공

“13년 전 수풍석 미술관을 처음 본 순간을 잊을 수가 없어요. 제주를 상징하는 물과 바람, 돌을 건축으로 표현한 건데, 자기 마음을 들여다볼 수 있는 명상의 공간입니다. 인간이 고독하고 약한 존재란 걸 이해하고 있으면서도 인간에 대해 따뜻한 시선을 가진 건축가란 생각이 들었죠. 이타미 준이란 재일 한국인 건축가가 만들었다는 사실은 뒤늦게 알았습니다.”(정 감독)

 

건축계 거장인 그를 당장 찾아갈 엄두는 내지 못했다. 그러던 사이 2011년 부음을 듣고 충격을 받았다. 정 감독은 ‘더 이상 늦으면 안 되겠다’는 생각에 영화 제작을 결심했다. 남편이 프로듀서로 지원 사격에 나섰다. 그렇게 8년 대장정이 시작됐다.

 

“처음에 시행착오가 많았어요. 이렇게 오래 걸릴 줄 몰랐죠. 제주영상·문화산업진흥원, 영화진흥위원회 등의 제작 지원을 받아 찍었습니다. ‘이타미 준 선생님이 돌아가셨는데 영화를 어떻게 찍을 건지’, ‘건축을 통해 무엇을 어떻게 보여 줄지’에 대한 질문을 매번 받았어요.”(김 프로듀서)

 

부부는 “건축을 통해 건축가의 인생을 보여 주는 영화”를 구상했다. 영화에는 이타미 준의 23개 건축물에 대한 이야기가 담겼다. 카메라 앵글의 다양한 각도, 생생한 음향 덕분에 실제로 그 공간에 있는 듯한 느낌이 든다. 한국과 일본, 프랑스에서 그와 직간접적인 인연을 맺은 50∼60명을 만나 32명의 인터뷰를 추렸다.

 

이타미 준의 생전 모습. 그는 건축뿐 아니라 미술에도 조예가 깊었다. 일본에서 태어나고 자란 그는 평생 한국 국적을 유지했다. 이타미 준이란 예명은 그가 한국에 처음 올 때 이용한 일본의 이타미 공항과 절친한 사이였던 작곡가 길옥윤의 예명 준에서 따왔다. 영화사 진진 제공

제작비 마련은 쉽지 않았지만 부부는 인복이 많아 보였다. 2020년 도쿄올림픽 주경기장 설계를 맡은 일본 건축가 구마 겐고와  2014년 건축계 노벨상인 프리츠커상을 받은 반 시게루, 작곡가 겸 피아니스트 양방언 등이 선뜻 출연을 결정했다. 양방언은 자신의 음악 사용도 흔쾌히 승낙했다. 이타미 준의 딸인 유이화 ITM 건축연구소 대표의 전폭적 지원이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배우 유지태도 내레이션으로 참여했다.

 

이에 대해 정 감독은 “선생님이 뿌린 씨앗이 어떻게 꽃을 피우는지 확인하는 과정이었다”고 돌아봤다. 김 프로듀서도 “다큐멘터리 영화는 일반 영화처럼 시나리오대로 찍는 게 아니라 사람들을 만나며 방향을 전환하게 되는 계기가 있다”면서 “다큐멘터리 영화의 본질이자 매력은 시간성”이라고 강조했다.

 

영화에 건축의 공간성뿐 아니라 시간성이 담긴 건 이런 맥락에서다. 이는 아이와 청년, 중년, 장년을 상징하는 네 명의 남성이 등장하면서 구현된다. 극영화 요소를 도입한 이 지점에서 영화는 다큐멘터리 영화에 대한 고정관념을 깬다.

 

정 감독은 “시간성, 세대를 표현한 것”이라며 “아이가 ‘할아버지, 여행은 어땠어요?’라고 묻는 건 영화를 통해 전달하고 싶은 메시지라 연출된 장면”이라고 설명했다. 김 프로듀서도 “나머지는 카메라 동선 정도만 설명하고 자연스럽게 찍었다”고 했다. 영화에 나온 사람들이 이타미 준의 공간을 통해 만났다가 헤어지는 마지막 장면도 시간성을 드러낸다.

 

이타미 준이 2006년 제주에 남긴 석 미술관. 영화사 진진 제공

“제가 말하고 싶은 건 미래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선생님의 공간과 정신, 철학이 다음 세대에 계속 전달된다는 것, 좋은 공간이 갖는 힘이라 생각하거든요. 젊은 친구들이 영화를 많이 봤으면 좋겠습니다. 다들 굉장히 지쳐 있고 상대적 박탈감이 너무 크잖아요. 자기가 가고자 하는 길을 닦으면서 치열하게 살았던 선생님의 이야기가 위로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정 감독)

 

영화가 이타미 준을 재평가하는 계기가 됐으면 하는 바람도 있다. 경주세계문화엑스포공원 경주타워 디자인 도용 사건은 형사 소송은 졌지만 민사 소송은 이겼다. 그럼에도 명예 회복은 이뤄지지 않았다. 저작권자가 이타미 준임을 알리는 명판은 바닥의 돌에 음각으로만 새겨져 눈에 띄지도 않는다.

 

“경주타워 디자인 저작권 관련해 작은 운동이 일어났으면 좋겠어요. 판결문에 명판의 디자인과 위치, 크기 등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다 나와 있어요. 사람들이 돌을 밟아 다른 건 거의 지워졌는데 신기하게도 유동룡이란 선생님 이름은 또렷이 남아 있습니다.”(정 감독)

 

영화의 러닝 타임은 112분. 원래는 3시간짜리다. 감독판 개봉뿐 아니라 일본 현지 개봉도 계획하고 있다. 쉽진 않다.

 

부부의 꿈은 좋은 공간의 선한 영향력을 앞으로도 그들만의 방식으로 알려 나가는 것. 2012년 건축 전문 영화·영상 제작사인 기린그림을 설립했다. 이들의 인생 영화는 ‘바그다드 카페’(1987)와 ‘그랑블루’(1988). 여기에 정 감독은 ‘나의 아저씨’(1958)와 ‘베를린 천사의 시’(1987)를 추가했다. 네 작품 모두 시공간성이란 연결 고리가 있다.

 

부부는 ‘위대한 계약, 파주출판도시 이야기(가제)’란 두 번째 작품을 준비 중이다. 이번엔 공동 감독을 맡는다.

 

박진영 기자 jyp@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