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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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모에 휘말린 탐정… 할리우드 인간군상 파헤치다

영화와 현실 오가는 뮤지컬 ‘시티오브엔젤’ / LA무대로 옛 누아르 영화 추억 소환 / 30년 묵은 원작 다듬어 국내 첫 공연 / 테이·이지훈 주연 맡아 ‘만툭튀’ 연기 / 18인조 라이브 밴드 재즈 공연은 ‘덤’

신작이 쏟아진 여름 뮤지컬 무대에 세련된 작품이 올라왔다. ‘블랙코미디 누아르 뮤지컬’을 표방한 ‘시티오브엔젤’이다. ‘천사의 도시’ 로스앤젤레스(LA)를 배경으로 무대는 영화와 현실 사이를 오간다. 주된 전개는 담배를 입에 문 중절모, 코트 차림의 경찰 출신 탐정이 주인공인 흑백 누아르 영화에서 이뤄진다. 그 줄거리는 이를 구상 중인 시나리오 작가와 성공한 속물 영화감독의 밀고 당기기가 벌어지는 영화 바깥 할리우드에서 결정된다.

영화 속 탐정의 순정파 비서 역을 맡은 배우는 바깥세계에선 영악한 영화감독 비서를 연기하는 식으로 이 뮤지컬은 주요 인물이 1인 2역을 맡는다. 헷갈리지만 않는다면 각 배우가 어떻게 1인 2역을 소화하는지 감상하는 재미가 별나다.

뮤지컬 ‘시티오브엔젤’의 주인공은 현실과 이상 사이에서 갈등하는 시나리오 작가 ‘스타인’과 그의 상상이 만든 탐정 ‘스톤’이다. 두 주인공이 활약하는 시티오브엔젤의 한 장면 .샘컴퍼니 제공

시티오브엔젤 조명과 영상이 만들어낸 필름 속 세계는 탁월하다. LA의 음습한 밤거리와 환락가, 비 내리는 교도소 앞, 늙은 재벌의 저택과 영안실 등에서 전형적인 옛 할리우드 영화 탐정물이 펼쳐진다. 염세적인 사설탐정과 남자를 이용하는 팜므파탈, 폭력과 살인사건, 주인공의 내레이션과 과거 회상 등이 옛 누아르 영화에 얽힌 추억을 소환한다.

뮤지컬 속 영화는 늙은 재벌 재산을 독차지하기 위한 음모에 휘말리는 탐정 ‘스톤’이 주인공이다. 가출한 의붓딸을 찾아 달라는, 수상쩍은 재벌의 젊은 아내 ‘칼라’의 의뢰를 받아들인 스톤에겐 폭력과 조작된 살인 혐의가 찾아온다. 냉소와 유머라는 섞이기 힘든 매력을 함께 지닌 스톤 역은 테이와 이지훈이 맡는다. 지난 8일 공연에선 최근 창작 뮤지컬 엑스칼리버에서 랜슬럿으로서 물오른 연기와 가창력을 선보인 이지훈이 등장했다. 마치 영화 속 만화 주인공 같은 독특한 캐릭터를 맡아서도 어색함 없는 연기가 돋보였다.

독보적 캐릭터로 1인 1역인 영화 속 스톤과 쌍을 이루는 할리우드 시나리오 작가는 ‘스타인’이다. 성공을 눈앞에 둔 재능 있는 작가지만 멋대로 줄거리를 바꾸는 영화감독 버디와 영화계 큰손 어윈에게 휘둘리는 신세다. 영화산업과 할리우드 군상에 대한 시티 오브 엔젤의 풍자와 비판은 날카롭다. 영화감독과 내연관계인 여배우가 맡은 재벌 딸 배역을 죽일 것인지 살릴 것인지를 놓고 벌어지는 갈등에 스타인은 타협과 분노를 오락가락한다.

애인 바비와 버디의 비서 도나에게도 창작의 적지 않은 부분을 의존했던 스타인은 결국 자신의 피조물인 스톤의 격려를 받으며 영혼을 지닌 작가로 홀로서기를 한다. 스타인 역은 베테랑 배우 최재림과 강홍석이 맡는다. 지난 8일 공연에선 ‘마틸다’로 2018 한국뮤지컬어워즈에서 남우주연상을 탄 최재림이 가창력을 뽐낸다.

원작은 1989년 뉴욕 브로드웨이에서 초연돼 이듬해 토니어워즈 6개 부문, 드라마데스크상 8개 부문에서 수상했다. 30년이나 된 낯선 원작을 ‘논 레플리카(수정과 각색이 허용되는 라이선스)’로 들여와서 연극과 뮤지컬을 넘나들며 좋은 작품을 만들어 온 오경택 연출이 요즘 감각에 맞는 고급스러운 뮤지컬로 만들어냈다.

앙상블에 이르기까지 출연진 모두의 고른 가창력과 탁월한 연기가 돋보였지만 이날 공연에서 버디와 어윈 역을 맡은 정준하 연기는 따로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국민 예능 프로그램 ‘무한도전’의 멤버였던 정준하는 그 자체가 강력한 캐릭터다. 이는 다른 예능 프로그램에선 큰 자산일 테지만 연극·뮤지컬 무대에선 배역 소화의 장애물이다. 그만큼 무대 위에서 ‘정준하’를 지우고 할리우드 영화계 속물로 변신하기 위해선 더 많은 노력이 필요할 수밖에 없다.

시티오브엔젤 복고풍 무대에 생명을 불어넣은 건 재즈다. 미국 싱어송라이터 사이 콜먼이 작곡한 1940년대풍 재즈가 4인 앙상블 스캣의 서곡에서 시작해 극 전반을 감싸 안았다. 특히 요즘 인기 뮤지컬마다 실력을 발휘해 온 김문정 음악감독은 자신의 오케스트라에서 따로 18인조 빅밴드를 엄선해 신나는 재즈 하모니를 들려줬다. 통상 뮤지컬 라이브 연주가 무대 밑에서 진행되는데 시티오브엔젤은 18인조 빅 밴드를 무대 뒤편에 배치해 파티 장면 등에선 연주 장면이 자연스럽게 배경에 녹아들게 하였다. 덕분에 커튼콜까지 끝난 뒤에도 관객은 자리를 바삐 뜨는 대신 후주를 연주하는 라이브 밴드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서울 충무아트센터에서 10월 20일까지.

 

박성준 기자 alex@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