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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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일부 조정’ 계약예규 무기로… 공공기관 ‘갑질’ 조달청은 ‘외면’

1순위협상자로 뽑혀 장비 다 들여놨는데 / 公기관 “품목 교체” “기술 공개하라” 몽니 / 부당 호소해도 조달청선 “우리 소관 아냐” / 모호한 규정 탓 평가결과 멋대로 뒤집혀 / 조정가능 범위 구체화·변경비용 청구 등 / 국가의 ‘거래상 지위 남용’ 방지법 시급

차세대 병원정보시스템 네트워크 장비 공급업체인 A업체는 최근 수십억원의 손실을 고스란히 떠안게 됐다. A업체는 지난 5월 충남대학교병원의 ‘차세대 병원정보시스템 인프라 구축사업’을 따낸 B업체와 협약을 맺고 네트워크 장비를 공급하기로 했다. A업체가 제공하는 장비는 전체 사업의 40% 이상을 차지한다.

 

하지만 충남대병원이 조달청 심사 일순위업체인 B업체에 협력업체를 A업체가 아닌 C업체로 교체할 것을 요구하면서 사달이 났다. 충남대병원 관계자는 “A업체 기술은 우리가 원한 규격 조건을 충족시키지 못한 데다 기술자료 등 관련 경력을 완벽하게 증빙하지도 못했다”고 이유를 설명했다. 앞서 A사는 핵심 장비 공급을 위해 외국에서 장비를 미리 들여놨다.

 

국가계약법과 관련한 기획재정부의 모호한 예규 탓에 조달청 평가에서 일순위업체로 선정된 업체뿐 아니라 일순위업체와 공동협약을 맺고 컨소시엄에 합류했던 영세 부품공급업체들까지 ‘도미노 피해’를 입는 경우가 속출하고 있다. 조달청에 납품업체 평가를 요청한 공공기관이 예산을 줄이기 위해 협력업체 변경 등을 강요하면서 납품업체가 손실을 떠안는 경우가 많다.

◆협력업체 교체 요구도… “조달청의 직무유기”

 

11일 기재부에 따르면 공공기관 계약예규는 ‘협상 주체인 수요기관과 우선협상대상자가 제안서 내용을 대상으로 협상을 하며, 협상대상자와 협상을 통해 그 내용의 ‘일부’만 조정할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다. 하지만 예규에서 언급한 ‘일부’의 범위에 기술평가 점수에서 중대한 영향을 미쳤던 핵심품목까지 포함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명시돼 있지는 않다. 수요기관이 핵심품목의 대부분을 교체하는 등 악용되는 사례가 빈번한 이유다.

 

모호한 규정 탓에 조달청이 이미 내린 평가를 수요기관이 제멋대로 해석해 뒤집는 것을 바로잡아야 한다는 주장도 제기된다. 충남대병원 사례가 대표적이다. A업체 관계자는 “지난해 10월쯤 충남대병원이 사업 설명회에서 요구했던 기능과 규격을 충족하는 제품을 우리가 제시했을 때 병원측이 이를 수용했고, 이미 관련 기술을 활용해 수행 중인 프로젝트들에 대한 공식증명서를 ‘한국소프트웨어산업협회장’의 승인까지 받아 제출했다”고 전했다.

 

이 관계자는 “충남대병원이 요구하는 것은 사실 특정 회사만의 기술 브랜드, 특수 규격인데 이를 특정해 재차 요구하는 것은 원계약에 없던 ‘독소조항’을 추가한 것과 다름없다”고 주장했다. 그는 “납품계약이 완전히 이뤄진 상태도 아닌데 기밀에 속하는 기술자료를 요청한 것 역시 예규에서 규정한 부당요구에 속한다”고 강조했다.

 

병원 측이 기술협상 과정에서 A업체 제안서를 다른 업체에 넘긴 정황까지 포착됐다. A업체 관계자는 “관련 문제를 감사원에 이미 제기한 상태”라고 언급했다. 실제 조달청이 충남대병원에 제출한 업체 간 평가자료를 보면 B업체는 경쟁업체를 이기는 데 A업체를 포함한 하도급(공급업체) 부분이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B업체는 경쟁업체를 0.6점 차이로 이겼는데, 2.5점까지 벌어진 하도급 점수가 결정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A업체는 지난달 감사원에 조달청의 소극행정과 충남대병원의 계약예규 위반에 대해 민원을 제기한 상태이다. 기술점수를 좌지우지할 수 있는 부품 공급업체의 70%를 바꿨는데도 평가기관인 조달청이 이를 방기한 것은 직무유기라는 주장이다. 하지만 조달청 측은 “조달청은 우선협상대상자를 선정하긴 하지만 기본적으로 협상에 의한 계약 시스템에 따른다”며 “업체 간 협의 사안이지 조달청이 관여할 문제는 아니다”고 반박했다.

◆“선정 과정의 투명성, 발주기관의 책임성 강화”

 

법률·행정 전문가들은 발주기관과 우선협상대상자 및 컨소시엄으로 합류한 공급업체들은 물론 조달청 사이에 분쟁이 끊이지 않는 가장 근본적인 이유를 입법 공백 때문으로 본다.

 

법무법인 양헌의 성준환 변호사는 “기술협상 과정에서 제안서 취지에 맞게 변경이 이뤄진 것을 두고 국가계약법을 위반한 것으로 보기 힘든 측면이 있다”고 지적했다. 하지만 협상을 통해 변경된 제안서 내용이 입찰자들의 제안서 평가 순위에 중대한 영향을 미치는 사항이고 변경을 통해 차순위 협상적격자의 제안서 내용보다 더 불리한 계약을 체결했다면 이는 법령상 계약체결 절차를 위반한 것으로 볼 여지가 있다는 게 성 변호사 의견이다.

 

성 변호사는 “기재부의 계약예규에서는 조정 가능 범위에 대해서 ‘일부’라고만 명시했을 뿐 이를 명확하게 규정하지 않아 분쟁이 잇따를 소지가 있다”며 “변경이 허용되는 제안서의 범위나 요건을 구체적으로 정할 필요가 있다”고 조언했다.

 

공공기관의 갑질을 막기 위해 추가적인 변경으로 발생하는 비용 일체를 발주기관이 부담하게 하는 등 책임성을 강화할 필요가 있다는 주장도 나온다. 변호사들로 구성된 입법 연구단체 ‘입법발전소’의 이필우 변호사는 “무엇보다 조달청이 인력부족, 전문성 부족을 핑계로 형식적 심사를 하지 않는 게 필요하고, 충분한 검토 결과 내려진 판단에 대해서는 수요기관이 확실하게 존중할 수 있는 규율들을 마련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이 변호사는 “특정한 사유가 있어야만 계약 내용을 변경할 수 있도록 규정을 구체화하고 특정 비율 이상 바꿀 때는 변경으로 인한 모든 비용을 수요기관이 부담하게 하는 등 대책이 필요하다”고 제안했다.

 

공공조달 계약을 전공한 장모 변호사는 “최근 경제행위에서 거래상 지위 남용을 억제하는 법률이 다수 발의되었다. 그런데 막상 국가와 기업 간의 계약에서는 그러한 부분이 공백 상태로 남아 있다”고 지적했다. 장 변호사는 “국가계약법도 하도급법에 준해서 계약 상대방을 보호하는 정교한 장치가 필요한 때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김라윤 기자, 세종=안용성 기자 ryk@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