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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시대변화 코드 앞서 읽은 최태원의 ‘행복경영론’

SK그룹의 행복실험 성공하고 있나 / 기업 존립목적 ‘이윤추구’ 아닌 / ‘이해관계자 행복극대화’ 강조 / 서린사옥 부서간 칸막이 없애고 / 부사장·전무·상무 등 직급도 폐지 / 자유롭게 일하는 ‘행복실험’ 한창 / 행복 요인 ‘성취감’ 최우선 꼽아 / ‘경제적 만족’은 한참뒤로 밀려

“사회 구성원의 행복 극대화가 기업의 철학이 돼야 한다.”

지난 2004년 4월 경기도 용인 SK연수원에서 열린 ‘SK그룹 창립 51주년 기념식’. 최태원 회장이 ‘행복경영론’을 제시했다. ‘이윤추구’가 존립 목적인 기업의 총수가 ‘이해관계자의 행복 극대화’를 강조하자 SK 구성원과 산업계, 한국 사회 모두가 새로운 경영론에 주목하기 시작했다. 최 회장은 15년째 행복경영론을 설파하고 있다. 올해에는 경영진에 구성원들이 행복해할 방법(행복지도)을 찾으라고 주문하고, 이를 평가와 보상의 기준으로 삼겠다고 공언했다. 최 회장의 이런 행복실험은 성공하고 있을까.

세계일보 취재 결과, SK그룹 수펙스추구협의회 인사지원팀(HR)은 지난 4월 SK이노베이션, SK텔레콤, SK하이닉스 등 16개 주요 계열사 직원 4만명을 대상으로 ‘행복 설문조사’를 진행했다. 크게 세 분야로, 관심은 행복영향요인에 대한 설문이다. ‘나는 언제 행복한가’라는 질문과 12개의 보기를 제시했다. 결과는 다소 뜻밖이었다. 구성원의 약 20%가 ‘성취감’이라고 답변했다. 이어 ‘소속감’ ‘개인성장’ ‘일과 삶의 균형’ 등이 뒤를 이었다. 업무에서 성취감과 보람을 느낄 수 있고 워라밸까지 보장되는 일터가 우리 사회에 얼마나 될까. 그런 일터에서는 구성원의 자존감이 높아질 것이다. 우선순위로 꼽힐 것 같았던 ‘경제적 만족’은 7위로 밀렸다. ‘복리후생’ ‘사회의 인정’ ‘고용 안정성’ 등 전통적으로 직장을 고를 때 중요하게 여긴 가치들은 대부분은 하위권에 머물렀다.

 

지난 7월 중국 베이징에서 가진 ‘행복토크’에서 최 회장은 “기업의 존재 이유를 ‘돈 버는 것’에서 ‘구성원 전체의 행복 추구’로 바꿔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행복토크는 회장이 자신의 생각을 설명하고 구성원들의 동의를 구하는 성격의 소통장이다. 여기서 ‘구성원’은 고객, 주주, 사회를 아우르는 개념이다.

SK의 행복실험도 한창이다. 서울 종로구 SK서린사옥은 지난 4월 ‘공유오피스’로 리모델링해 직원들이 계열사, 부서 칸막이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일할 수 있도록 했다. 최근 경영계 화두인 에자일(Agile·민첩한) 조직, 일하는 방식 혁신에 ‘오피스 환경’은 빼놓을 수 없는 조건이다. SK의 한 팀장급 직원은 “초기 관리자급 사이에선 불만이 적지 않았지만 다 편견이더라”며 “몰입도가 높아서 자연스럽게 워라밸이 실현된다”고 평했다. 20∼21층 2개층을 계단으로 튼 휴게공간, 회사 애플리케이션으로 주문하면 샐러드가 일하는 곳에 배달되는 등 구성원들조차 모르는 서비스가 추가되고 있다. 최근엔 부사장-전무-상무 등 임원 직급도 폐지했다. “패기를 갖고 스스로 삶과 일을 디자인해 세상의 행복을 키우라”는 것이다.

최근 재계에서는 ‘삼성맨 위상이 예전만 못하다’는 소문이 무성하다. 각종 수사로 자존감이 떨어지고 구글, 넷플릭스, 카카오 등 국내외 혁신기업에 치이는 탓이다. 삼성 경영진이 외부 콘퍼런스 등에 참여하는 모습도 꽤 눈에 띈다. 업계 관계자는 “인재 확보를 위해 발로 뛰라는 내부 압력이 만만치 않다”고 전했다. 한 헤드헌팅업계 관계자는 “실력을 갖춘 인재들일수록 보상, 간판 등 물질적 요소보다 조직문화, 성장 가능성 등을 더 중요하게 여긴다”고 말했다. 1990년대생을 필두로 한 밀레니얼 세대의 특징도 간과할 수 없다. 작가 임홍택은 ‘90년생이 온다’에서 “90년대생들에게 기업들은 속수무책”이라며 “권력은 이미 기업에서 개인으로 이동했다는 점을 깨달아야 한다”고 지적했다. SK의 남다른 행보가 주목되는 이유다.

 

조현일 기자 conan@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