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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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행위 되고 공공시설 이용은 안된다?… '오락가락' 나이 기준

"중학교 2학년인데… 16세 미만은 안된다고요?" / 국립중앙도서관 이용 가능 연령 두고 '헌법소송' / '어리다고 도서관 못 가나' 쟁점 안 다룬 채 각하 / "성관계 허용하면서 도서관 이용 제한… 난센스"

우리나라 법률 체계상 만 13∼15세 청소년은 타인과 성행위를 할 수 있는 이른바 ‘성적 자기결정권’을 갖고 있다. 현행 형법에 따라 13세 미만 어린이가 성관계를 하면 ‘미성년자 의제강간’ 조항에 의해 그 상대방은 무조건 형사처벌을 받지만, 일단 13세를 넘기면 성행위 등에 대한 ‘동의’가 가능한 나이(age of consent)라고 본다.

 

이처럼 성적 자기결정권도 있는 만 13∼15세 청소년이 정작 국가에서 운영하는 도서관은 단지 ‘어리다’는 이유만으로 이용을 제한당하고 있다. 최근 이 문제가 헌법재판소 심판대에 올랐던 사실이 전해져 눈길을 끈다.

서울 종로구 헌법재판소 전경. 세계일보 자료사진

◆"중학교 2학년인데… 16세 미만은 안된다고요?"

 

15일 법조계에 따르면 2004년생인 A(15)는 중학교 2학년이던 지난해 2월 자료 조사를 위해 서울 서초구 국립중앙도서관을 찾았다. 사설 기관이 아닌 국립도서관이고 초등학생도 아닌 중학생이니 당연히 도서관 입장, 그리고 자유로운 자료 열람이 가능할 것이라고 여겼다.

 

하지만 A가 미처 몰랐던 규정이 있다. 국립중앙도서관은 이용 대상을 ‘만 16세 이상인 자’로 제한하고 있는데 A는 그보다 두 살 적은 14세였던 것이다.

 

놀란 A가 확인해보니 초등학생은 아예 국립중앙도서관 이용이 불가능했고, A처럼 16세 미만 중학생인 경우는 ‘청소년 자료이용 신청서’라는 서식을 작성하면 출입이 가능하긴 했다.

 

하지만 도서관 전체 시설을 자유롭게 이용하려면 별도의 ‘이용증’이 있었야 했는데 이는 만 16세 이상한테 발급이 이뤄졌다. A처럼 청소년 자료이용 신청서로 입장한 이들은 도서관 내 일부 공간만 출입이 가능할 뿐더러 고문헌 원본 자료의 대출 신청 및 열람이나 자료 출력 및 복사 같은 고품질 서비스는 접근조차 어려웠다.

국회도서관 홈페이지의 이용자 안내 코너. 이용 대상을 ‘18세 이상인 자’로 제한하고 있다. 12∼17세 어린이·청소년이 도서관을 이용하려면 까다로운 절차를 거쳐야 한다. 국회도서관 홈페이지 캡처

◆국립중앙도서관 이용 가능 연령 두고 '헌법소송'

 

크게 실망한 채 귀가한 A한테 이 사실을 전해들은 부모도 놀라긴 마찬가지였다. ‘중학교 2학년이면 국립도서관 정도는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뭔가 문제가 있다 싶었던 부모는 미성년자인 A의 법정대리인을 자처해 헌법재판소에 헌법소원을 냈다.

 

그들은 헌법소원 청구서에서 “국립중앙도서관이 이용 대상자를 원칙적으로 16세 이상인 자로 제한함으로써 A처럼 16세 미만인 청소년들이 도서관 이용 제한에 따른 기본권 침해를 겪고 있다”고 주장했다. 침해당한 헌법상 기본권으로는 알권리, 정보접근권, 학문의 자유, 문화향유권, 교육을 받을 권리, 그리고 평등권 등을 들었다. ‘아동을 성인과 차별해선 안 된다’는 취지의 유엔 아동권리협약 조항들도 근거로 제시했다.

 

청구서를 받아든 헌법재판관들이 국립중앙도서관 규정을 꼼꼼히 살펴보니 16세 미만이라고 도서관 자료 이용이 확정적으로 제한된 것은 아니었다. ‘도서관장이 필요하다고 인정하는 경우’ 예외적으로 자료 이용이 가능했다. 즉 A 본인 또는 그 부모가 도서관장을 설득하고 이것이 받아들여지면 도서관장이 그의 재량권 안에서 A의 자유로운 도서관 이용을 허락할 수도 있었다는 얘기다.

서울 서초구 국립중앙도서관 전경. 세계일보 자료사진

◆'어리다고 도서관 못 가나' 쟁점 안 다룬 채 종결

 

헌재는 최근 재판관 9명 전원일치로 A 가족 측의 헌법소원을 ‘각하’했다. 각하란 헌법소원 제기에 필요한 법적 요건을 갖추지 못해 위헌 여부를 더 따져볼 것도 없이 사건 심리를 종결한다는 취지의 결정이다.

 

재판관들은 결정문에서 “국립중앙도서관장은 필요하다고 인정하는 경우 임의적으로 도서관 이용에 필요한 조치를 취할 수 있도록 재량을 부여받았다”며 “도서관장이 A의 도서관 이용 승인을 거부했다면 모를까, 그렇지 않은 단계에선 헌법소원 청구의 전제가 되는 기본권 침해가 있었다고 볼 수 없다”고 판시했다.

 

이처럼 헌재는 ‘나이’를 기준으로 국립중앙도서관 이용 대상을 제한하는 것이 합헌인지, 위헌인지는 아예 판단조차 하지 않았다. 하지만 성적 자기결정권 행사도 가능한 14세 청소년의 도서관 자료 이용을 단지 ‘너무 어리다’ ‘다른 성인 이용객한테 방해가 될 수 있다’ 등 이유만으로 제한하는 게 과연 타당한가 하는 의문은 가시지 않는다.

 

다른 국립도서관은 어떨까. 입법부 소속 국회도서관은 자유로운 이용 대상이 ‘18세 이상인 자’로 행정부 소속인 국립중앙도서관보다 연령 기준이 오히려 높다. 12∼17세 청소년은 먼저 국회도서관 홈페이지에 회원으로 가입한 다음 ‘국회도서관 이용 신청서(청소년용)’를 제출, 열람증을 수령하는 까다로운 절차를 거쳐야 이용이 가능하다.

법원도서관 홈페이지의 이용자 안내 코너. 이용 대상을 ‘16세 이상인 자’로 제한하고 있다. 법원도서관 홈페이지 캡처

◆"성관계 허용하면서 도서관 이용 제한… 난센스"

 

사법부 소속 법원도서관 역시 국립중앙도서관과 마찬가지로 이용 대상을 ‘만 16세 이상인 자’로 한정, 15세 이하 어린이·청소년의 자유로운 접근을 차단하고 있다.

 

사실 우리나라는 어린이·청소년에게 뭔가를 ‘허용’하는 나이 기준이 법률마다 달라 혼란스럽기까지 하다. 앞서 소개한 대로 성행위 동의가 가능한 성적 자기결정권은 만 13세부터 주어진다. 범죄를 저질렀어도 어리다는 이유로 형사책임을 면제받는 이른바 ‘형사 미성년자’ 연령 기준은 만 14세다.

 

짙은 수위의 성적 장면 등이 포함된 ‘미성년자 관람불가’ 등급 영화는 다들 알다시피 만 18세부터 볼 수 있다. 술·담배 이용은 19세부터 가능하다. 대선과 총선 등에서 선거권을 행사하고 혼자 계약을 체결하거나 결혼을 할 수 있는 연령, 즉 완전한 의미의 성인은 만 19세를 기준으로 본다.

 

이를 두고 평소 ‘미성년자 의제강간 기준을 현행 만 13세보다 더 올려야 한다’는 취지의 주장을 펴 온 법조계의 한 관계자는 “현행법상 성적 자기결정권 행사도 가능한 만 13∼15세 청소년이 정작 국립도서관이나 국회도서관 이용은 마음대로 못한다니 이런 난센스가 따로 없다”며 “도서관 이용 연령 기준 같은 건 지금보다 더 내리고, 성적 자기결정권 행사 연령 기준은 지금보다 올려 청소년을 제대로 육성·보호해야 한다”고 말했다.

 

김태훈 기자 af103@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