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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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념·분단 상처 끌어안고 舊怨 풀어낸 예술적 살풀이 [한국영화 100년]

③ 임권택 감독 ‘짝코’ / 일가 좌익 몰려 참담한 소년기 보낸 / 임 감독 자신의 트라우마 극복 소산 / 시나리오 쓴 작가도 같은 수난 겪어 / 토벌대와 빨치산으로 만난 두 남자 / 30여년 흐른 뒤 갱생원서 뜻밖 만남 / 좌우 갈라져 적대시하다 결국 화해 / 반공 이데올로기 엄존하던 1980년대 / 반전·인본 메시지로 표현 영역 넓혀 / 아직 진행 중인 역사의 아이러니 자각
임권택 감독의 영화 ‘짝코’에서 전직 전투경찰 송기열과 망실공비 짝코(오른쪽)는 남북 분단으로 인한 좌우 대립을 대변한다. 한국영상자료원 제공

모든 영화감독이 자신만이 만들 수 있는, 그리고 만들어야만 하는 이야기를 가지고 있다면 임권택(83) 감독에게 ‘짝코’(1980)가 그런 영화라고 할 수 있다. 분단을 제재로 한 이 영화는 일가가 좌익으로 몰려 참담한 소년기를 보냈던 임권택 자신의 트라우마를 영화를 통해 극복해 보려는 작의(作意)의 소산이었기 때문이다. 첨예한 이념 대립의 틈바구니에서 임권택은 마음속에 품은 생각을 입 밖에 낼 수 없었던 시대에 혈혈단신 고향을 떠나 원근 각지를 떠돌았다.

그의 유년기를 송두리째 망가트린 굴레였던 이데올로기의 대립은 지금까지 해소되지 않은 한국사의 해원(解寃)과 같은 테마이기도 하다. 가족들의 좌익 활동으로 수난을 당한 사정은 ‘짝코’의 시나리오를 쓴 작가 송길한에게도 해당되는 이야기였다. 감독 임권택과 작가 송길한은 ‘짝코’를 통해 처음으로 호흡을 맞추게 됐는데, 이후 ‘만다라’(1981)와 ‘길소뜸’(1985), ‘티켓’(1986), ‘씨받이’(〃) 등의 작품에서 짝을 이뤄 한국영화사에 굵은 족적을 남기게 된다.

◆한국사회의 트라우마를 찍다

송길한은 김중휘가 쓴 2장 분량의 장편(掌篇)소설(콩트)을 맥락이 풍만한 드라마로 각색했다. 서울의 어느 뒷골목에서 노숙하던 한 사내가 경찰에 의해 갱생원으로 보내진다. 신원 불상의 이 사내는 전직 전투경찰로 6·25전쟁 때 ‘빨갱이 잡는 귀신’으로 불렸던 송기열(최윤석)이다. 막장에 몰린 인생의 낙오자들이 운집한 갱생원에서 송기열은 30여년을 바쳐 추적해 왔던 망실공비(산에 있는 것으로 추정되지만 행방이 묘연했던 공비) 백공산(김희라)과 해후한다. 콧방울이 크고 이지러진 탓에 ‘짝코’로 불리는 백공산과 송기열의 악연은 인생의 고비마다 반복된다. 그러나 갱생원의 짝코는 자신을 여수 출신의 김삼수라 주장하면서 기열을 망상에 들뜬 정신병자로 몰아간다. 이때부터 영화는 현재와 과거를 오가며 토벌대와 빨치산으로 만난 두 남자의 평생에 걸친 은원(恩怨)을 추적한다.

기열은 6·25전쟁 말기 천신만고 끝에 짝코를 체포하지만 그를 호송하는 도중에 놓치고 만다. 그 순간부터 기열의 인생은 나락으로 떨어지기 시작한다. 아내와 아이를 잃고 주변인들로부터 혹독한 수모와 냉대를 당한다. 이 모든 고통이 짝코 때문이라 생각하는 기열은 그를 잡기 위해 혈안이 된다. 고통의 시간을 살아오기는 짝코도 매한가지다. 빨치산 동료로 만난 연인 점순(방희)은 알코올 중독에 심신이 망가진 채로 매춘하는 여자가 돼 있고, 짝코 자신은 집도 없는 떠돌이 신세가 된다. 시대가 강박한 이데올로기로 서로를 적대했으나 원한을 쌓아 온 시간이 열강들의 이권 다툼에 희생된 약소국의 운명이었음을 깨닫고 두 사내는 갱생원을 탈출해 고향으로 향한다.

영화 ‘짝코’의 주인공 송기열(가운데)과 짝코(맨 오른쪽)가 토벌대와 빨치산으로 만난 과거의 악연은 개인과 역사가 교차하는 트라우마로 남아 있다. 한국영상자료원 제공

‘짝코’의 이야기는 송기열과 짝코가 대치하게 되는 내력을 기술하는 과거, 갱생원에서 두 사내의 재회를 그리는 현재를 왕래한다. 현재와 과거 회상 장면은 유기적으로 교차되는데, 무작위로 시간을 오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단서를 빌미로 삼아 과거사가 기술되는 여로(旅路)형 구성을 보여 준다. 영화 속에서 남북 분단의 비극과 그 연장으로서 민족 분열상은 맹목적 반공주의자인 송기열로, 빨치산에 가담했다가 인생을 망친 망실공비 짝코로 표면화된다. 두 주인공은 좌우로 갈려 서로를 적대하는 한국사회의 모순 유형을 대변한다. 그렇다면 이들의 콤플렉스는 무엇인가? 말할 것도 없이 짝코에 의해 자신의 인생이 망가졌다고 믿는 송기열, 좌익이란 낙인이 찍혀 도망자로 일생을 허송한 짝코의 콤플렉스는 역사적이고 체제적인 한국사회의 모순, 남북 분단으로 인한 반공 이데올로기에 연루돼 있다. 임권택은 서로를 증오했던 시간이 어떻게 두 남자의 삶을 기구하게 교차시켰는가를 유장한 인생 유전 스토리에 녹인다.

◆민족사적 비극과 군사독재의 서슬을 그리다

탁월한 영화적 성취 외에도 ‘짝코’의 역사적 의의는 다채롭다. 민족사적 비극의 악순환을 풀어내려는 예술적 살풀이 의식으로서, 분단이란 한국적 현실에 눈을 뜨고 그 실감을 묘사하고자 한 임권택의 자각을 볼 수 있다는 점에서, 암울한 시대 상황을 증언하는 자료로도 이 영화는 그 진가를 드러낸다.

리얼리티에 바탕을 둔 시대 묘사도 뛰어나다. ‘짝코’가 발표된 1980년은 한국 현대사에서 각별한 의미를 갖는 해다. 전두환의 신군부가 총칼을 앞세워 권력을 장악했고, 이에 대한 반작용으로 5·18광주민주화운동이 있었으며, 반공의 망령을 씌워 민중의 저항을 잠재우려는 학살이 자행됐다. 철권통치의 억압적인 분위기는 이 영화 곳곳에서 확인된다. 길거리에서 노숙하던 기열을 갱생원으로 압송하는 경찰들, 갱생원의 획일화된 일상, 갱생원 교도관들의 억압적이고 권위적인 행태에서 당대 시대상이 읽힌다.

영화 ‘짝코’에서 강압적 규율로 통제되는 갱생원 내부의 묘사는 당시 군부독재의 억압적인 분위기를 보여 준다. 한국영상자료원 제공

또한 올해 100년을 맞은 한국영화사에서 ‘짝코’가 갖는 의의라면, 반공 이데올로기가 엄존하던 1980년대에 반전과 인본(人本)의 메시지를 함축해 한국영화의 표현 영역을 한 뼘 넓혔다는 데 있다. 임권택은 좌우 이념 대립의 틈바구니에서 개인이 감내할 수밖에 없었던 운명의 유위변전(有爲變轉·세상은 변화무쌍해 잠시도 머물러 있는 법이 없다)을 동정과 연민의 시선으로 바라본다. 이념에 의한 선 긋기를 지양하고 개인과 역사의 관계를 통해 오랫동안 한국인의 삶에 전제됐던 분단의 트라우마를 치유하고자 한 의도가 읽히는 대목이다.

◆진영 분열의 근원을 탐색한 진행형의 영화

한국사회에 만연한 진영 논리와 그로 인한 폐해를 선구적으로 포착한 ‘짝코’는 역사적 사실을 토대로 지난 시절의 사회상을 복원하고 분단을 둘러싼 상황의 전말을 추적하고 있다. 한편으로 맹목적인 반공의 메시지에 부정의 자세로 선 이 영화가 1981년 제20회 대종상영화제에서 ‘반공영화 작품상’을 수상했다는 것은 아이러니하다. “6·25전쟁은 미국과 소련이라는 두 강대국의 대리전이었다”는 주장을 담은 TV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을 보고 짝코와 송기열은 그간의 대결과 반목이 무의미했음을 깨닫는다. 그러나 좌우 양쪽의 해원을 그리려 했던 임권택의 의중이 형상화되는 이 장면은 사후 검열에서 삭제됐다. 시나리오 검열에서 통과됐음에도 최종 버전에서 검열의 칼날을 피해 가지 못했다. 검열로 인한 미완의 기획이었던 동시에, ‘짝코’는 흥행에서도 참담한 실패를 맛보게 된다. 당시 속내를 임권택은 다음과 같이 비장하게 말하고 있다. “영화는 잘 만들어 놓고도 검열 때문에 ‘병신’이 되고 말았다. 군부독재 시절이란 시대 상황을 고려해 반쪽짜리에 만족해야 했지만 기분은 영 씁쓸했다.”

‘짝코’의 메시지는 명확하다. 좌와 우로 서로를 적대시해 온 사람 사이의 화해를 통해 구원(舊怨)을 풀어 보자는 것이다. 이후부터 임권택은 인간을 위해 만든 이념이 인간을 인간답게 살게 하기 위한 수단이 되지 못하고 불행과 비극, 희생의 원인이 되는 현실을 인본의 가치로 돌파하는 작품을 양산한다. 고향으로 향하는 기차 안에서 짝코가 송기열의 품에 안겨 죽음을 맞는 ‘짝코’의 마지막 장면에서 이 전언은 분명해진다. 그 순간 영화는 이념과 분단의 상처를 끌어안는다. 강대국 간 쟁투의 파급을 온전히 겪어 내야 하는 약소민족의 설움, 그에 대한 회의의 시선은 과거를 성찰하는 반성뿐 아니라 지금까지도 해소되지 않는 역사의 아이러니에 대한 자각을 준다. 진영으로 갈려져 사사건건 으르렁대는 최근의 사정 또한 여기서 멀지 않다는 점에서 ‘짝코’가 주는 울림은 현재 진행형이다.

장병원 전주국제영화제 프로그래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