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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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궁에 빠진 '화성 8차 살인'… 이춘재가 진범일까

커지는 경찰 부실수사 논란 / 李, 당시 피해 소녀 근처에서 살아 / 체모 형태·혈액형 달라 제외된 듯 / 경찰, 곤혹 속 자백 신빙성 등 수사 / 전문가 “무기수 사실 고백 가능성” / ‘20년 옥살이’ 범인 “재심 청구할 것” / 법원 재심 결정 내릴지는 ‘미지수’
화성연쇄살인사건 용의자 이춘재

화성 성폭행연쇄살인사건 용의자 이춘재(56)의 8차 사건 자백이 사실일 가능성이 점점 높아지고 있다. 이 사건 범인으로 검거돼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20년간 수감생활을 한 윤모(당시 22세)씨는 재심청구를 위해 변호사 선임에 나서는 등 본격 법적 대응을 준비 중이다. 경찰은 곤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하면서도 8차 사건의 신빙성 확인에 나서는 한편 자백 이외의 여죄 확인에 수사력을 모으고 있다.

배용주 경기남부경찰청장은 8일 기자간담회를 갖고 “수사본부에서 이춘재의 8차 사건 자백 이후 2009년 출소한 윤씨를 최근 만나 조사를 벌였다”며 “8차 사건에 대한 신빙성과 여죄 확인 작업을 벌이고 있다”고 밝혔다. 이 자리에 참석한 수사본부 관계자는 “이춘재가 8차 사건을 자신의 소행으로 자백할 당시 ‘피해자인 박모(당시 13세)양의 뒷 건물 건너에 살고 있었다’는 진술을 했다”고 밝혔다. 이어 이 관계자는 윤씨를 범인으로 특정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의 방사성동위원소 감별법과 관련해 “1000명인지 500명인지 정확하진 않지만 이춘재와 윤씨 등을 포함한 피해자 거주지 인근 마을 남자들의 체모를 수거해 국립과학수사연구소에 보내 피해자의 방에서 수거했던 체모의 성분과 동일한 인물을 찾는 작업을 벌였다”며 “이 과정에서 먼저 체모의 형태가 피해자 방에서 수거한 것과 다를 경우 분석에서 제외시키는 작업을 거쳤는데 결과적으로 윤씨가 용의자로 특정됐다”고 말했다.

 

당시 이춘재도 수사팀에 체모를 제공했지만 분석에 들어가기 전 형태와 혈액형이 달라 용의선상에서 빠졌는지는 파악되지 않고 있다.

이춘재의 자백이 ‘소영웅심리’에 의한 ‘과잉자백’보다는 사실일 가능성이 크다는 전문가들의 분석도 이어지고 있다. 한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이수정 경기대 범죄심리학과 교수는 “이 사건의 경우 범인이 무기수이고 다시는 사회로 돌아오지 못할 입장에서 영웅이 돼 봤자 얻는 게 없어 ‘이제는 털고 가자’라는 심경의 변화일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경기도 수원시 경기남부지방경찰청에 화성연쇄살인사건 수사본부가 운영되고 있다. 뉴스1

충북 청주시 한 빌라 2층에서 살고 있는 윤씨는 이날 취재진과 만난 자리에서 “가족들과 재심을 준비하고 있으며 이를 위해 변호사를 선임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30년 전 억울한 일을 당했을 때 아무도 도와준 사람이 없었다”며 “신분이 노출되면 직장에서도 잘릴 수 있어서 당분간 언론 인터뷰에 응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현재까지는 주변 사람들과 준비하고 있으며 때가 되면 언론과도 인터뷰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청주에서 직장생활을 하는 윤씨는 자신의 신원이 언론을 통해 알려지는 것을 극도로 경계했다. 이씨가 재판과정에서 주장했던 것처럼 고문 등에 의한 허위 진술이 사실로 확인될 경우 과거 경찰이 부실한 수사로 애꿎은 시민에게 누명을 씌우고 20년 옥살이를 강제했다는 비판을 면하지 못할 것으로 예상된다.

이춘재가 8차 사건도 자신이 저지른 일이라고 자백했으므로 재심이 열리면 윤씨에 대해 무죄가 선고될 가능성이 크다고 전망하는 반면 재심 요건이 매우 까다로운 탓에 개시 자체가 어려울 것이라는 정반대 의견도 나온다.

윤씨가 재심 절차를 밟는다고 가정할 경우, 그는 이춘재의 자백에 따른 ‘새로운 증거의 발견’을 재심 사유로 들어 관련법에 따라 원판결을 내린 수원지법에 재심을 청구할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법원이 재심 개시 결정을 내릴지는 미지수이다. 화성 8차 사건과 관련, 재심 개시 요건에 해당하거나 이를 확신할 수 있을 정도로 명백한 근거가 나와 있는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엇갈리고 있다. 더욱이 일반 형사사건에 대해 재심 결정이 내려지는 것은 매우 이례적이다. 재심의 개시는 수사기관의 수사는 물론 법원의 판결에 오류가 있었다고 인정하는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수원·청주=김영석·김을지 기자 lovekook@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