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직장인 김모(37)씨는 유튜브를 뒤적이다 ‘그럼 그렇지’ 생각하곤 슬그머니 고개를 저었다. 북한 축구대표팀과의 맞대결이 중계되지 않는다는 낯선 현실을 깨달아서다. 스마트폰 하나면 다 되는 21세기인데, 축구경기 하나 제대로 볼 수 없다는 상황이 아이러니하게 느껴졌단다.
#2. 축구팬 이모(30)씨는 선발명단과 경기장 사진만 띄운 채 생방송을 진행한 어느 축구해설위원의 유튜브 방송을 보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29년 만의 평양원정이라며 잔뜩 관심이 쏠렸는데, 정작 어디서도 남북 축구대표팀의 경기를 볼 수 없어서다. 북한의 중계 거부에 ‘무관중 경기’까지 펼쳐졌다는 것을 안 그는 “이럴 거면 왜 평양에서 경기를 했느냐”고 지적했다.
1990년 남북통일축구대회 이후 29년 만의 평양원정으로 관심을 끌었던, ‘2022 국제축구연맹(FIFA) 카타르 월드컵’ 아시아 2차 지역예선 H조 3차전 대한민국과 북한의 경기가 15일 평양에서 펼쳐지는 동안, 국내 축구팬들은 인터넷 중계도 없고 TV로도 경기를 보지 못하는 현실에 답답함을 호소했다.
일부 축구팬은 전국체육대회 개막식과 세계 한인의 날 기념사에서 ‘2032년 서울·평양 공동올림픽 개최’를 강조한 문재인 대통령을 비판하는 분위기다. 2차전을 치르기 위해 내년 6월 우리나라에 올 북한 선수단에 똑같이 대응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왔다. 자유한국당은 북한 대응에 정부가 속수무책으로 당했다며, 올림픽 공동개최라는 꿈을 버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월드컵 맞대결로 관심…뚜껑 열릴수록 ‘허탈과 분노’만
파울루 벤투 감독이 이끄는 우리나라 축구대표팀은 평양 김일성경기장에서 열린 북한 대표팀과의 경기에서 0대0 무승부를 거뒀다. 이로써 우리나라는 2승1무로 북한과 승점(7점)은 같지만, 골득실(대한민국 +10·북한 +3)에서 앞서 조 선두를 유지했다. 평양원정으로만 보면 1990년 1대2로 패한 데 이어 이날 무승부로 두 경기에서 모두 승리가 없다.
월드컵 예선 맞대결이라는 점에서 관심을 끌었지만, 뚜껑이 조금씩 열릴수록 축구팬들의 기대는 허탈과 배신, 분노가 뒤섞인 감정으로 변해갔다.
스포츠는 정치와 별개라는 전제 하에, 평양에서 열린 남북 맞대결을 TV로 본다는 건 젊은 축구팬들에게 새로운 경험이고 올드팬들에게는 29년 전 기억을 되살릴 기회였지만 △취재진 방북 불허 △선수단과 대한축구협회 임원 등 55명에게만 비자 발급 △ ‘생중계 무산’이라는 황당한 일까지 생기면서 축구팬들은 경기 즐길 권리마저 박탈당했다고 분통을 터뜨렸다. 더욱이 관중석도 텅 비었다.
월드컵 예선 현장 중계가 없던 건 1985년 3월, 네팔 카트만두에서 열린 ‘1986 멕시코 월드컵’ 지역예선 이후 34년 만의 일이다. 당시 경기는 현지 위성송출 문제로 전파를 타지 못했다.
◆“경기는 보게 해줘야 할 것 아니냐”…‘서울·평양 공동올림픽’ 말한 대통령에게도 싸늘한 시선
축구팬 이모(31)씨는 “응원하는 팀이나 국가가 원정을 떠난다면 어디든 따라가는 게 축구팬”이라며 “북한이라는 특수성 때문에 갈 수는 없더라도, 경기는 보게 해줘야 할 것 아니냐”고 불평했다. 박모(34)씨도 “‘생중계 없는’ A매치(국가대항전)는 처음”이라고 어이없어했다.
일부 팬은 2032년 ‘서울·평양 공동올림픽’ 개최 의지를 드러내온 문재인 대통령에게도 곱지 않은 시선을 날리고 있다. 앞서 문 대통령은 전국체육대회와 개막식과 세계 한인의 날 기념사에서 올림픽 공동개최를 위해 시민들과 동포의 힘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북한전 무승부 소식을 전한 기사에서 누리꾼 A씨는 “공동올림픽을 외치더니 돌아온 건 온갖 수모”라며 “이러고도 계속 공동올림픽을 열자고 할 거냐”고 정부를 비판했다. B씨는 “해외에서 찬사를 받는 우리 선수들이 북한에 갈 때 여러 어려움을 겪었다”며 “정작 북한 선수들이 올 때 우리나라는 그들을 열렬히 환영할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서울·평양 공동올림픽이 웬 말”…자유한국당도 총공세
한편, 자유한국당은 생중계를 거부한 북한의 태도를 정부의 대북정책과 결부시켜 대대적인 공세를 펼쳤다.
한국당 황교안 대표는 15일 페이스북에서 “북한에서 일어나는 이 모든 잘못된 일들에 정부는 속수무책”이라며 “도대체 체육을 통해 무엇을 개선하겠다는 것이냐. 2032년 서울·평양 공동올림픽 개최가 웬 말이냐”고 대북정책 현주소를 꼬집었다.
나경원 원내대표도 국정감사 중간점검 회의에서 “입에 침이 마르게 내세우던 남북관계가 월드컵 예선전 생중계 하나 못 받아오는 수준”이라며 “잘못된 대북정책부터 백지화하고 새롭게 시작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국회의원축구연맹 회장인 김학용 의원도 페이스북에서 “A매치 경기에 응원단도 못 가고 방송도 못하고 ‘깜깜이 경기’”라며 “참으로 한심하고 부끄러운 현실”이라고 문재인 정부를 비판했으며, 국회 외교통일위원장인 윤상현 의원은 “왜 우리 국민이 중계조차 보지 못하느냐”고 질타했다.
김동환 기자 kimcharr@segye.com